71화
소식을 들은 호은은 서둘러 달려 나갔다. 김세희는 가이딩 회복을 위해서 인천 지사에 있는 의료 센터에 입원했기에 뛰어가면 금방이었다.
배연우와 그동안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달리는 실력이 옛날과 비교해 놀라울 만큼 성장해 있었다.
의료 센터에 도착한 호은은 로비를 둘러봤다. 류윤재가 근무하는 가이딩 센터는 오늘따라 사람이 복작거렸다. 바빠 보이는 1층 로비를 지나 호은은 김세희가 입원한 3층 입원실로 걸음을 옮겼다.
“호은 씨!”
311호 병실 앞에 서 있던 류윤재가 호은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근무복을 입고 있는 류윤재는 방금까지 일하다 올라온 거 같아 보였다.
“일어난 건 두 시간 전쯤인데 정밀 검사는 지금 다 끝났다고 합니다. 같이 들어가 봐요.”
땀으로 인해 와이셔츠가 등에 딱 달라붙었다. 이곳에 뛰어오는 내내 안 좋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김세희가 다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컸기에 혹시라도 잘못됐을까 조바심 났다.
손바닥으로 밀면 그만인 병실 문에 손을 갖다 댄 호은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문이 열리고 병실 베드에 기대앉아 있는 김세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벚꽃 나뭇가지는 인턴 가이딩 실습 기간에 김세희가 다루던 것과 같은 거였다.
아니, 조금 더 벚꽃이 많이 핀 거 보니 다른 누군가가 갖다 놓은 거 같았다.
“세희 씨?”
창밖을 보던 김세희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병문안 온 거예요?”
김세희의 피부는 평소보다 창백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쾌활했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안도할 수 있게 만들다니. 호은을 짓누르던 조바심이 한결 가벼워졌다.
“검사 결과 들었어요? 컨디션은 어때요? 일어났을 때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은가요?”
보조 의자에 앉아 쉴 틈 없이 질문을 퍼붓는 호은을 보고 김세희와 류윤재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밥은 드셨……,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그게 아니라. 헤헤. 이렇게 평정심 없는 모습은 처음 봐서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김세희가 웃었다.
“제 걱정을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런데 저 컨디션 최고예요.”
김세희의 갈색 단발머리는 어느새 어깨까지 길렀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한 김세희는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꼭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
한 번도 벚꽃 냄새를 인식해 본 적 없던 호은이었으나,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향기가 벚꽃 냄새일 거 같단 확신이 들었다.
유리병에 든 벚꽃 나뭇가지가 바람 따라 흔들렸다.
“이틀 가까이 잤으니 그런 기분이 들 만합니다.”
서 있던 류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뱉고 호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도 오늘이 월요일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김세희의 시선이 탁자에 놓인 캘린더로 향했다.
“저를 이렇게 만든 반정부는 잡았나요?”
김세희의 말에 호은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토요일 자정. 신은혜에게 온 보고서를 남운수가 홍보부에 공유했다. 보고서는 그날 나눴던 모든 기록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이후 이능력자 협회 소속 포탈 이능력자가 현장에 다녀왔지만 역시나 반정부 포탈 이동 경로를 찾지 못했다.
“아직 잡지 못했어요. 그날 세희 씨 가이딩을 강제로 가져가려고 한 이유도 찾고 있습니다만.”
호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이 한심했다. 반정부를 잡는 홍보부라고 말해 놓고서 홍보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호은 씨 잘못이 아닙니다.”
류윤재가 호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떨군 고개를 들자 김세희 또한 씩씩한 표정으로 호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많은 가이딩을 빼앗겨서 기절한 거래요. 검사 결과도 가이딩 회복이 많이 된 상태라 당장 내일부터 퇴원해도 된다고 하던데요?”
팔근육이 보이는 포즈를 취한 김세희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자 봐요. 고등학생과 성인의 회복 속도 차이가 보입니까?”
호은을 안심시키려 일부러 오버하는 김세희에 호은은 코끝이 찡하게 올라왔다.
“다음에 세희 씨 저 필요하면 꼭 말하세요. 제가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정말요? 앗싸! 일일 노예권 얻은 거죠?”
“세희 씨 노예권이라는 말은 좀 그렇습니다. 일일 소원권은 어떨까요?”
대화를 듣던 류윤재가 끼어들었다. 호은을 제외하고 어떻게 부려 먹어야 하나 진지하게 토론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가슴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뭐든 좋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올린 호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병원이라는 공간만 아니었다면 평화롭던 인턴 시절로 돌아간 줄 알았을 만큼 안정됐다.
아직 심신의 안정이 필요한 김세희이기에 몸 상태 확인을 끝낸 호은과 류윤재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쉬워하는 김세희와 작별 인사를 끝낸 두 명은 병실을 나왔다.
“호은 씨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숙소로 돌아가려는 호은을 붙잡은 류윤재에 두 사람은 센터 밖으로 나갔다. 건물 뒤쪽에는 쉴 수 있는 벤치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어 센터 소속 가이드가 자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류윤재는 자판기에 사원증을 갖다 대 음료수를 뽑아 호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캔 따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호은은 청량한 음료를 마시며 부족했던 수분을 보충했다.
“호은 씨 오늘따라 평소랑 복장이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이능력자 협회 본사에 가느라 좀 차려입었어요.”
도인호가 사 줬다고 말하면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호은은 적당히 대답했다.
“그렇군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음료 캔만 만지작거리라는 류윤재에 호은이 먼저 운을 뗐다.
“호은 씨는 연애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연애요?”
류윤재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보여 줬다.
“하하. 제가 이 나이 먹고도 제대로 연애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
“그래서 연애 상담을 좀 받아 보고 싶어서…….”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류윤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곤란해 보이는 모습에 호은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몇 번 해 보기는 했는데. 도움이 될지는 잘…….”
“정말입니까?!”
류윤재는 호은의 말에 기대를 가득 품은 눈동자로 쳐다봤다. 간절해 보이는 류윤재의 얼굴에 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앓고 있었거든요.”
“짝사랑 중이신 건가요?”
“부끄럽지만, 어쩌면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류윤재는 소녀처럼 뺨을 붉게 물들여 입술을 달싹였다. 호은은 자신마저 설레는 기분이 드는 듯했다.
“혹시 김한슬 에스퍼님 인가요?”
“그, 그걸 호은 씨가 어떻게 아시는 거죠?”
류윤재는 손을 엑스자로 모아 자기 가슴을 가렸다. 혹시라도 저를 지켜보고 있던 겁니까? 말도 안 되는 류윤재의 상상에 호은은 기겁했다.
“김한슬 씨 가이딩해 주고 싶어서 가이딩 센터에 지원하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였군요. 맞습니다. 저도 호은 씨처럼 파트너 가이드가 되고 싶었는데 제 능력 부족이죠.”
류윤재 사원증에 있는 가이딩 등급은 B였다. 인턴 동기 세 사람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음에도 류윤재는 파장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김한슬의 전담 가이드가 되지 못했다.
“팀 가이드가 되면 김한슬 씨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들었지만, 이런 마음으로 팀 가이드가 되어 봤자 민폐만 끼칠 거 같았습니다…….”
어느새 다 마신 캔을 찌그러트린 호은은 조용히 류윤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팀에서 다른 에스퍼에게 집중 못 하고 오로지 김한슬 씨만 바라볼 제 모습이 그려졌거든요.”
항상 모든 일에 묵묵하게 따르던 류윤재였다. 그가 어느 하나에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김한슬 씨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콕콕 찌르고 커피라도 마신 것처럼 두근거려서 나중엔 김한슬 씨 생각에 잠도 안 옵니다.”
류윤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가이딩 센터에서 다른 가이드가 아닌 저에게 가이딩을 받는 김한슬 씨에게 자꾸 무언가 바라게 되고 혹시라도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는데.”
김한슬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볼이 발그레해지던 류윤재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면 저 같은 남자를 누가 좋아할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전 시골 사람이라 촌스럽고……. 한슬 씨는 서울 사람이더라고요.”
“지역이 뭐가 중요해요? 서로 마음만 같으면 되지.”
“그래도……. 여자들은 시골 남자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다 버리고 시골로 내려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거겠죠. 출신지 때문에 김한슬 씨가 류윤재 씨를 싫어할 리는 없을 거예요.”
류윤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입니까?”
“두 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김한슬 씨의 마음이 류윤재 씨와 같다고 느꼈다면 자신을 믿어 보세요.”
호은은 볼을 긁적였다.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말을 답변이라고 내뱉은 거 같아 부끄러웠다.
연애 경험이 있긴 했으나 다른 사람의 연애사를 조언해 줄 만한 대단한 연애는 해 보지 못했기에 이 말이 류윤재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고마워요. 호은 씨.”
류윤재는 들고 있던 캔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신 캔을 호은처럼 꾸긴 류윤재는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저는 슬슬 복귀해 봐야겠습니다. 다음에 또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보조개가 파일 만큼 웃는 류윤재를 따라 호은도 웃었다.
“아 맞다. 세희 씨 얘기 전달할 게 있었는데 빠트릴 뻔했네요.”
걸음을 돌리려던 류윤재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희 씨. 오늘 처음 의식이 깨고 나서 말없이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울었다고요?”
“네……. 아무래도 사고 우울증일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방금 보셨죠? 평소의 세희 씨 같았던 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켜봐야겠네요.”
“씩씩해 보여도 많이 놀랐을 겁니다. 예전에 세희 씨가 학교 끝나고 노래방 가고 스티커 사진도 찍고 떡볶이를 먹는 시절이 그립다고 했는데 한번 시간 맞춰서 놀러 가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좋네요. 세희 씨 기분 전환도 할 겸.”
호은은 건물 위쪽을 쳐다봤다. 밖에서 올려다본 3층은 누구의 병실인지 알 수 없는 창문이 일렬로 배치돼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신의 불찰로 다친 김세희를 떠올리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타이거를 꼭 잡고 말겠다고 다짐한 호은은 주먹을 쥐었다.
***
집으로 돌아오자 무슨 일인지 도인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는 것처럼 보여 소리를 최대한 조심하며 씻고 나온 호은이 일과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도인호의 가이딩 퍼센트를 확인했다.
“뭐야. 왜 이렇게 낮아졌어?”
눈을 비비며 숫자를 다시 확인해 봤지만 27%였다. 침대에 들어온 호은이 도인호의 손을 붙잡았다.
“호은 형…….”
잠긴 목소리로 호은을 부른 도인호가 감았던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