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둘 다 그만하게. 젊은 친구들이 자네들을 보고 뭐라 생각하겠나?”
엄태석의 목소리는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배연우와 엄성찬은 스파크가 튀기듯 서로를 쳐다보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은 인사부 명성에 아주 중요한 일이라네. 에스퍼 의심자를 놓치는 인사부라니. 20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어.”
주름선이 잡혀 있던 엄태석의 이마는 찡그린 모양새로 주름이 깊어졌다.
“우리 인사부는 알다시피 가이드와 에스퍼를 가장 먼저 만나는 부서이지.”
어느새 준비한 건지 회의실 벽에 빔 프로젝터를 튼 강힘찬은 노트북을 연결해 통계 파일 액셀 창을 띄웠다.
“가이드 같은 경우에는 일반 검진에 들어 있는 혈액 검사 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은 사람이 대상이지. 모든 병원은 가이드 공단에서 나눠 준 의료 프로그램에 수치를 입력할 의무가 있고, 전산 내용은 가이드 공단에 공유가 되니 병원을 한 번도 안 간 사람이 아닌 이상 가이드를 놓치기는 어렵다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김세희도 류윤재도 자신도 모두 결과지 하나로 가이드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이드 발현은 나이가 정해져 있지 않고 또 발현 시 외적 특성이 없어 혈액 수치 하나로만 찾는 건 제법 힘들긴 하다만.”
엄태석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호은을 흘긋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가이드 검진이라는 것도 생길 예정이니 에스퍼가 직접 찾아가 가이딩이 들어오나 확인하는 불필요함도 줄어들고 한결 수월해질 거 같군.”
강힘찬은 통계 창을 닫고 일본어로 가득한 논문을 열었다.
“이제 에스퍼로 넘어갈까. 에스퍼의 발현은 1차와 2차 두 번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1차 발현은 에스퍼 유전자와 비슷한 사람이라네. 해당 유전자는 신체적으로 뛰어나고 회복력도 일반인과 비교해서 빠른 편이지.”
언젠가 들었던 내용에 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 파동(波動)을 다룰 수 있던 에스퍼는 일반인과 에스퍼는 다른 파동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네. 그를 통해 에스퍼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파동 탐지기가 개발됐고 해당 탐지기로 1차 발현자 중 2차 발현자를 구분하지.”
“그럼 2차 발현자가 에스퍼라는 소리인가요?”
가만히 듣던 호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탐지기 정확성이 100% 맞는다면 그렇겠지만 탐지기의 정보가 정확한 것만은 아니었다네. 해당 파동은 에스퍼를 감지하는 게 아니라 존 상태를 감지하는 거였어.”
“존 상태요?”
“그래.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적절하게 균형 잡혀 있는 상태로 집중력 최고조에 있을 때 인간은 존 상태에 들어가지. 에스퍼는 존 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면, 일시적으로 존 상태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네. 운동선수처럼 말일세.”
존 상태? 호은은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2차 발현으로 판단된 사람은 에스퍼 의심자로서 이능력 각성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인사부의 관찰 대상이 되지.”
“우리 인사부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부서에서 직원이 가장 많은 곳이 인사부라고.”
성별과 연령대가 다 다른 20명 정도의 사람 사진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현재 2차 발현까지 한 에스퍼 의심자로 판정된 사람이라네. 그리고 관찰 도중 이능력을 쓰는 거 같은 사람은 특별 관찰 대상자가 된다네.”
이번에는 어린 여자아이와 왼쪽 눈에 길게 흉터가 남은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이능력은 각성한 것을 금방 눈치채지만,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능력은 실시간으로 계속 모니터링해야 한다네. 이 두 사람처럼 말이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가이드가 직접 접촉하면 가이딩 빠지는 걸로 각성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호은은 복잡한 발현 내용에 머리가 폭파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이드는 에스퍼와 접촉하면 가이딩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관찰할 필요 없이 2차 발현자로 분류된 순간 직접 가이딩해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좋은 의견이군. 하지만 각성전 에스퍼는 가이딩이 필요 없다네. 불완전한 이능력자 상태라 가이딩 없이도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지. 완벽히 각성한 뒤에야 가이드가 눈치챌 수 있다네.”
“아…….”
호은의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흔들리자 도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호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특별 관찰 대상자로 구분하는 건데, 최근 해당 대상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고 하더군.”
“현재 남아 있는 특별 관찰 대상자는 이 두 분 말고도 3명 더 있었슴다. 모두 63 스퀘어를 기점으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게 틀림없는 반정부 소행임다!”
강힘찬은 커다란 목소리로 거친 숨을 뱉었다.
“그놈들 때문에 두 달째 야근…… 으으! 더는 못 참슴다!”
반정부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이라도 있나 싶은 정도로 씩씩거리던 강힘찬에게는 이렇게 화낼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포부가 남달랐던 강힘찬은 이왕 가이드가 된 거 이사직까지 올라가겠다는 마음으로 인사부에 들어왔다.
가이드 공단에서 입김이 강한 부서가 여러 곳 있었는데 인사부는 그중 하나였고 엄태석의 내부 인지도 또한 높은 편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하겠다 다짐하던 강힘찬은 계속되는 야근에 미칠 지경이었다. 운동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이능력품으로 전투계획도 짜야 하는데 야근으로 인해 모든 스케줄이 엉망이 되었다.
하필 이런 문제를 논의할 부장님은 집안 문제로 한 달 휴가계를 낸 상태라 강힘찬은 독단적으로 상부에게 해당 일을 알리고 홍보부에 협력을 요청한 것이었다.
인사부 직원과 홍보부 직원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힘찬이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야근만 멈추면 됐다. 자신을 죽일 듯 째려보는 엄성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저런. 팀장이 무능하면 가이드만 고생한다니까.”
배연우는 다정스럽게 강힘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은 배연우는 엄성찬을 탓하듯 흘겨보았다.
“내가 없다고 일이 이렇게까지 된다니.”
엄태석도 실망스러운 시선으로 엄성찬을 쳐다봤다.
“작은아버지!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성이 같아서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엄태석과 엄성찬은 같은 집안사람이었다. 배연우가 계속 백이라고 외치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풉. 노력은 무슨.”
“뭐?! 이 새끼가 아까부터!”
배연우의 비웃음에 엄성찬은 목에 핏줄을 세우며 크게 외쳤다. 에스퍼는 목청도 좋은 건지 소리가 회의실 밖까지 뚫고 나갔다.
“넌 여전히 목소리만 크구나.”
“너는 그럼 뭐가 잘났는데?!”
“나? 다방면으로 잘났지.”
배연우는 강힘찬 앞에 있던 노트북을 들어 2차 발현 대상자 목록 창을 열었다.
“20명의 2차 발현자와 이 중 특별 관찰 대상자 3명은 63 스퀘어 사건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적어도 팀장이라면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반정부는 어떻게 알고 특별 관찰 대상자를 데려간 걸까. 내부에 반정부 편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웃, 웃기지 마! 지그문트를 까먹은 거냐?!”
“열 좀 내지 마. 잘하는 게 소리 지르기밖에 없냐? 지그문트 이능력은 훌륭하지만, 입사 후에 배신을 하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호은은 남운수 귓가에 손을 올리고는 지그문트가 누구냐 물었다.
“호, 호은 씨도 봤을 겁니다……. 상대의 생,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에스퍼라……. 입사 전……, 가이드와 에, 에스퍼를 마중 나가는 역할을 합니다…….”
남운수의 말에 호은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집 앞까지 찾아와 면접장에 데려다준다고 했던 남자.
확실히 폴과 같이 왔으니 인사부 직원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생각을 읽는 이능력이라니. 호은은 그때 당시 자신이 했던 생각 중 이상한 게 있었나 되짚었다.
“나도 연우 대리와 같은 생각 했다만.”
엄성찬은 억지 부리지 말라고 배연우에게 쏘아붙이려다 엄태석의 말에 급히 입을 닫았다.
“지그문트는 지난주 토요일부터 출장에 나간 상태라 다음 주가 되어야 올 거라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사부에서 배신자가 나올 확률은 적다는 거라네. 지그문트가 있는 한 인사부에 배신자가 있었다면 들키고 말았을 거라네.”
“맞슴다! 인사부에서 배신자라니! 백신자는 있을지 몰라도 배신자는 없슴다.”
“백?”
엄성찬이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까닥하자 강힘찬이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헙. 아무것도 아님다.”
“한 번만 봐준다.”
“배신자 건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대화를 가만히 듣던 엄태석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배신자 건에 관한 내용을 종결시켰다.
“그, 그러면 이제 부장님도……, 오, 오셨으니까 어떻게 할지…….”
“흠……. 이미 상부에서 협력 작전이 떨어진 이상 하는 수밖에 없겠군.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궁금하기도 하고 말일세.”
엄태석이 배연우를 바라보자 배연우는 그 눈길을 길게 받아치지 못했다.
“아가. 특별 관찰 대상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라.”
“넵! 지난 일주일 동안 특별 관찰 대상자 보고서에 따르면 여자아이 쪽은 미래와 관련된 이능력을 가진 거 같다 예상 중임다. 어머니에게 복권방에 좋은 일이 있을 거 같다며 즉석 복권 구매를 유도해 당첨되었고, 공사장 부품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미리 안 것처럼 피한 적도 있다고 함다. 이게 단순 우연인지 아니면 이능력으로 인한 건지 추가 관찰이 필요함다.”
복권 당첨이라는 단어에 꽂힌 호은은 이능력자가 아니라면 정말 운이 좋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대상자는 아직 어떤 이능력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같이 그와 마주친 사람이 황홀한 꿈을 꿨다며 그에게 돈을 주고 있었슴다.”
강힘찬의 보고가 끝나자 엄태석이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반정부가 나타날 걸 예상하면 인사부 페어에서 홍보부 사람을 섞어 넣어야겠군.”
“맞슴다! 홍보부는 네 명이니 둘 둘 찢어지면 될 거 같슴다.”
회의는 점점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현재 관찰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여자아이는 폴, 남자 쪽은 제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홍보부는 두 의심자 다 확인한 상태고요.”
엄성찬의 답변을 들은 호은은 배연우가 폴 쪽으로 갈 거로 예상했다.
엄성찬과 사이가 안 좋으니 같이 있어 봤자 싸우기밖에 더 하나 싶었다.
“그러면 가이드 먼저 배치하면 되겠군. 여자아이는 배연우.”
“아뇨. 저는 엄성찬 팀장과 같이하겠습니다.”
호은의 예상을 깬 건 배연우의 대답이었다.
“딱 봐도 능력이 위험해 보이는 건 남자 쪽이고. 신입 가이드한테 그런 일을 맡길 순 없습니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답변이었다. 호은은 배연우가 엄성찬과 같은 팀이 되어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느니, 자신이 더 잘났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말하지 않아 살짝 아쉬워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불구경과 싸움이라더니.’
어느새 두 사람의 싸움에 푹 빠져 버린 호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