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야. 인사부 아니라고 이젠 인사도 안 하네?”
중년 남자의 목소리라기엔 가벼운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라고 말한 묵직한 목소리와 다르다 싶었더니 중년 남자의 뒤에 있는 배연우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비소를 걸치고 있었다.
사원증을 확인하자 남자의 이름은 엄성찬으로 직급은 팀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에스퍼였다.
배연우는 엄성찬이 등장하자마자 썩은 음식을 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연우 넌 여전하구나.”
“하…….”
배연우의 기가 찬다는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호은은 숨 쉬는 소리가 크게 나갈까 봐 최대한 숨을 참았다.
“본인 발로 나갈 땐 언제고, 다시 들어오는 거 보니까 여기가 운명인가?”
엄성찬은 누가 봐도 악의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성격이라면 바로 쏘아 댔을 배연우는 가만히 있었다.
호은은 자신이라도 나서서 말려야 하나 눈치를 봤다.
오늘 아침. 남운수와 나눴던 대화에서 분명 배연우와 남운수는 인사부 출신이라 들었다. 앞에 있는 남자 두 명은 과거의 두 사람과 같이 일한 동료로 보였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푸읍! 캑.”
입술을 달싹거리던 호은은 남운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물줄기에 화들짝 놀라며 도인호 옆으로 붙었다.
“아 씨! 묻었잖아!”
“콜록, 콜록. 죄, 죄송합니다. 사, 사레들려서…….”
남운수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몸을 일으켜 엄성찬의 젖은 옷을 털어 주려 했다. 그러나 발을 헛디딘 건지 휘청거리는 몸은 의지할 곳이 엄성찬 밖에 없다는 듯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촤르륵
엄성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젖어 있는 바지와 노출된 가슴팍에는 니플 패치가 붙여져 있어 우스꽝스러웠다.
“……푸흡.”
고개를 숙인 배연우가 끅끅거리며 웃고 있었다. 긴장의 끈이 맥없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배연우는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껏 예민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평소의 모양새로 돌아왔다.
“하아.”
긴 한숨을 뱉은 배연우는 남운수를 흘긋 보더니 아직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흘렸다.
“남운수 이 새끼야! 너 내가 재수 없다고 나한테 오지 말라 했지!”
“으응, 미안……. 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사, 사레가.”
엄성찬의 생김새는 사레가 들릴 만한 얼굴까진 아니었다.
엄태석의 얼굴이 남자답게 이목구비가 진했다면 엄성찬 또한 엄태석의 외모와 묘하게 비슷했으나 어딘가 흐린 인상이었다.
덕분에 카리스마 넘쳐 보이는 엄태석과 비교되어 온화해 보였다. 나쁘게 말하자면 만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부장님.”
붉으락푸르락 표정이 변하고 있는 엄성찬을 가볍게 무시한 배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태석을 마주 보았다. 도인호와 비슷한 키의 엄태석은 배연우가 일어났음에도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래. 홍보부에서는 잘하고 있나 보지.”
“보시다시피.”
배연우는 남운수의 어깨에 자기 팔을 걸쳤다.
“야!!! 아까부터 나는 무시하냐?!”
“그만.”
배연우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던 엄성찬의 손은 엄태석에게 쉽게 제압당했다. 둔탁한 소리는 제법 묵직했다.
“다른 사람도 있지 않으냐.”
“쳇…….”
“든든한 백이 있어서 그런가. 4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예의가 없네요.”
배연우는 재수 없는 표정을 걸친 채 엄성찬을 쳐다봤다. 분한지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엄성찬이었으나 엄태석의 말처럼 이 자리에는 호은과 도인호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입 가이드인 권호은이라고 합니다…….”
인사할 타이밍을 보던 호은은 눈치껏 자기소개했다. 엄태석이 호은에게 눈길을 줬다. 그는 짧게 자른 턱수염을 만지며 호은을 아는 척했다.
“아아. 자네가 권호은이구먼.”
신사답게 손을 내민 엄태석에 호은은 커다란 손을 잡았다.
“음? 신기하군.”
손을 마주잡자 느껴지는 찌릿함에 손가락 마디가 절로 구부려지려고 한다.
호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쥔 도인호는 엄태석의 손에서 호은의 손을 빼고 대신 자기 손을 넣어 악수했다.
“도인호입니다.”
엄태석은 도인호의 행동에 코웃음을 쳤다.
“자네도 알지 않는가. 에스퍼끼리의 접촉은 불쾌하기만 하단 걸.”
“그런가요.”
도인호의 손을 내치는 엄태석의 행동에 호은의 콧등이 긴장으로 인하여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호은은 여전히 저릿한 손바닥에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엄태석 부장님은 S등급이니까 최대한 안 닿는 게 좋슴다.”
쟁반을 들고 서 있던 강힘찬이 식은땀을 흘린 호은에게 알려 줬다. S등급의 에스퍼를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당장 옆에 있는 도인호만 해도 S등급이었으나 방금 같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등급인데도 이렇게 차이 나는 걸 보며 이게 파장의 중요성인가 싶었다.
“부, 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 그동안 보이지 않으시던데…….”
“가족 행사가 있어 그동안 오지 못했다네.”
도인호와 남운수는 최근 인사부에 합류해 에스퍼 의심자를 같이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도 엄태석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방금 회의를 통해 내용은 들었다네. 쯧. 내가 있었으면 홍보부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요. 저도 인사부에서 협력 요청이 와서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팀장이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하나 봐요.”
조금 전 엄성찬의 빈정거림을 받아칠 기회를 엿보던 배연우가 입을 놀렸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짝! 갑자기 피부를 때리는 마찰음이 들리는 건 순간이었다. 엄성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배연우는 남운수를 쳐다봤다. 남운수의 손은 엄성찬의 뺨에 가 있었다.
“?!!!”
엄성찬은 자신이 맞은 것이 이해가 안 되는지 눈알이 빠질 만큼 눈을 크게 떴다. 남운수는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음울한 얼굴로 엄성찬의 눈앞에 손바닥을 보여 줬다.
“모, 모기가 앉아서…….”
남운수 손바닥에는 모기가 피를 뱉고 납작하게 죽어 있었다.
“가을에도 모기가 있나 보군.”
엄태석은 지나가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엄성찬이 맞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강힘찬 가이드는 테이블에 놓인 물티슈를 들어 엄성찬의 뺨과 남운수의 손바닥을 닦았다. 그러고는 비품실에 들어가 모기 스프레이를 꺼내 주변에 살포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회의실에서 마저 얘기하시는 건 어떨까요?”
자리에 앉아 있던 폴은 이능력을 쓴 건지 호은의 옆에 서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화제를 돌려 버린 폴에 엄성찬은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쳤다.
“좋군. 아가 자네도 따라오게.”
엄태석이 부르는 아가는 강힘찬을 뜻하는 거 같았다. 회의실로 들어가는 와중 폴이 호은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잘 적응한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폴 씨!”
“제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요.”
“당연하죠. 제가 처음 본 에스퍼나 다름없는걸요.”
호은의 말에 폴이 마저 입을 떼려는 순간 도인호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형……. 다들 기다려요.”
어느덧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본 호은이 서둘러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폴이 회의실 문을 닫으려고 하자 반대편 손잡이를 잡고 있던 도인호가 폴을 위아래로 훑었다.
“제가 닫겠습니다.”
“네? 그러시겠어요?”
“그리고 처음 본 에스퍼 접니다.”
“네?”
“그쪽 아니라고요.”
멍하니 서 있는 폴을 보며 도인호는 문을 닫았다.
“그러게, 임자 있는 가이드를 왜 건드립니까.”
“제가요?”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폴이 억울하다며 걸음을 뗐다.
“과장님. 저는 그냥 아는 얼굴 봐서 그런 건데요.”
자신을 변호하듯 열변을 토하던 폴은 바닥에서 돋아난 초록 줄기가 내미는 서류를 받았다.
“어후, 깜짝아.”
“폴 주임은 이번이 1년 차죠.”
폴은 책상을 건반처럼 두드리고 있는 남자의 손을 쳐다봤다. 마디마디가 가녀리고 기다란 손의 주인은 인사부의 문지훈 과장이었다. 이능력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바닥에서 줄기를 꺼내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당분간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문지훈 과장은 가이드와 에스퍼 면접을 보는 것이 주 업무다 보니 현장에 나가는 일은 적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사무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가능하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자리에 앉았을 때 접대 테이블 쪽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궁금증이 커지던 참이었다.
쫑긋거리는 귀를 막지 못해 고개를 최대한 숙이고 엿듣던 폴은 뺨 때리는 소리에 손을 모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그렇게 폴은 이능력을 써서 접대 테이블로 순식간에 이동했던 것이다.
맞은 것은 자신의 상사인 엄성찬 팀장이었다.
자신이 알기로는 엄성찬은 이렇게 맞고만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지 팀장 때문에 진지하게 부서 이동을 할까 고민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 엄성찬을 때린 것이 남운수라는 사실에 폴은 놀랐다.
에스퍼 의심자를 관찰하는 것은 2인 1조를 원칙으로 하기에 이번 홍보부에서 현장 점검하러 왔을 때 폴은 남운수와, 엄성찬은 도인호와 짝을 이루었다.
그때 봤던 남운수의 첫인상은 더럽게 운이 안 좋은 남자였다. 하는 행동과 말투도 어눌해 보이고 기다란 머리카락은 문지훈 과장님처럼 신기한 분위기가 아닌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말수도 별로 없었기에 엄성찬의 뺨을 때린 남운수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반전 드라마를 본 것 같은 충격이었다.
“가서 조용히 전달만 하고 오세요.”
“네…….”
엄성찬이 당하는 모습이 고소한 와중에 저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러한 폴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계속 경고의 말을 내뱉는 문지훈에 폴은 알겠다며 열 번은 대답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간 폴은 들고 있는 서류를 하나씩 놓아주기 시작했다. 호은의 자리에도 놓아주려는 순간 도인호가 예의 있는 동작으로 폴에게서 서류를 가져가더니 자연스럽게 호은의 앞에 두었다.
“…….”
폴은 어이없는 표정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막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호은은 받은 서류를 들고 쭉 읽었다.
“최근 한 달 동안 에스퍼 의심자를 놓치는 일이 번번하다고 들었는데. 인사부도 옛날만큼의 명성은 없어졌나 보군요.”
회의실에서 먼저 입을 뗀 건 배연우였다. 남운수 덕에 긴장이 풀린 건지 평소 재수 없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뭐? 반정부 때문이면 너희가 할 일이잖아.”
배연우의 도발에 엄성찬이 큰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인사부였으면 반정부도 같이 잡았을 텐데.”
“이게!!! 아까부터!!!!”
-쾅!
배연우가 턱을 괸 채 엄성찬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것에 열받은 엄성찬이 목청을 크게 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엄태석이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쳤다.
“!!”
화들짝 놀란 호은은 자신이 인사부에 온 건지 개판부에 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