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베란다로 도망친 호은은 바람을 쐬며 올라왔던 열을 식혔다. 심장은 여전히 폭주 기관차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도인호의 얼굴은 위험하다. 아니, 얼굴만 위험한가? 그가 하는 행동, 내뱉는 말투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난 정말 쓰레기야.”
오늘은 도인호의 진심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63 스퀘어 사건 이후 도인호가 자신에게 가진 행동이 마치 처음 태어난 병아리 같다고 느꼈던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도인호의 삶은 폭주 전과 폭주 이후로 크게 달라졌다. 그리고 본인은 달라진 사유로 권호은을 뽑고 있는 것이다.
호은은 손바닥으로 볼을 비비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도인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권호은이 자신을 살려 줬다-, 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척추부터 시작해 전율이 일었다.
마치 신이 된 듯한 느낌. 분명 과거의 자신이 도인호를 구해 주겠다며 건방 떨며 입을 놀렸을 때 받았던 느낌과 같았다.
만약 본인이 바로 정신 차리지 않았다면 도인호의 말에 반박하는 게 늦어질 뻔했다. 자신은 가이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밖에 없다. 에스퍼 케어. 그것이 가이드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당연한 것을 한 거니 우쭐댈 필요 없다.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건 오만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다.
도인호가 말하는 모든 대상은 에스퍼 케어를 한 가이드 권호은을 향한 거다. 권호은 그 자체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
가라앉던 열기는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왔다. 머리에 김이라도 날 거 같았다. 자신에게 향하지 않은 말에 허락도 받지 않고 설레고 있었다. 그 끝이 어떨지 뻔히 알면서도.
“잠깐이면 되니까.”
체념한 거 같은 말투를 던진 호은은 자기 손을 마주 잡아, 기도하듯 들어 올렸다. 두 눈을 감은 호은이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의 죄를 내뱉었다.
“마음 정리할 때까지만이라도 착각하고 있을게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깊이 빠지는 늪이 앞에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은은 자신이라면 그 늪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걸음을 내디뎠다.
설령 늪에 빠져들어 다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잠식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늪에 들어가고 싶었다.
***
주말은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호은은 양치질하며 거울로 비치는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내려온 다크서클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유난히 몸 상태가 찌뿌둥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오늘이 월요일이기 때문일까?
“퉤.”
치약을 뱉은 호은은 입을 가시고 거실로 나왔다. 먼저 씻은 도인호는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블랙 슈트에 초록색 사원증을 찬 상태였다.
호은이 나온 것을 확인한 도인호는 쇼핑백에서 옷을 꺼내 드레스룸 옷걸이에 걸었다.
일요일이었던 어제는 도인호와 같이 백화점 나들이를 갔다. 인턴 생활한다고 가져왔던 캐리어에는 옷이 몇 가지 없었다. 적은 수의 와이셔츠와 슬랙스를 돌려 입는 거까진 괜찮았으나 도인호 집에서 온 뒤로 생활복이 적어 도인호의 옷을 얼마나 자주 빌려 입었는지 모르겠다.
말이 빌려 입은 거지 도인호는 호은이 자기 옷을 입었다는 것을 모르는 기세였다.
옷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토요일 저녁이었다. 토요일 오전에 베란다에 걸어 놓고 갔던 두 사람의 빨랫감이 덜 마른 것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인호의 옷을 빌려 입은 호은은 흰색 티셔츠가 평소보다 큼지막하다고 느꼈다.
어깨 한쪽을 드러낼 정도로 흘러내린 옷을 손으로 정돈하며 침실로 들어간 호은은 피부가 뚫릴 정도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작은 옷들이 덜 말랐나 보네요.”
“작은 옷?”
침대에 누워 있던 도인호는 호은의 손을 잡아당겨 침대로 걸터앉게 했다. 쇄골 부위까지 훤히 보이는 노출 부위를 빤히 바라보던 도인호가 손을 들어 느리게 쓸었다.
“읏.”
“지금 제가 입는 옷을 형이 입으면 이럴 거 같아서 작은 거 위주로 꺼내 둔 건데.”
어깨를 움츠린 호은이 방어하듯 손을 들어 목덜미와 쇄골의 중간 부위를 막았다. 도인호는 호은이 자기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티를 안내 모를 거라는 건 호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딱 봐도 도인호와 호은의 체형은 차이가 컸다. 어깨와 가슴이 넓어 품이 큰 옷을 입는 도인호의 사이즈는 호은에게 맞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샀다가 빠르게 성장한 탓에 뜯지도 못한 새 옷을 도인호가 호은을 위해 꺼내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그 옷들은 호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인호는 자기 옷을 입은 호은을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감상했다. 이상하게 아랫배 쪽이 간지러웠다.
이능력이 뭉치기라도 한 듯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당황했는지 발갛게 물든 피부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가리고 있는 손에 시선이 닿았다.
차 안에서 입술로 닿았던 부위라 그럴까. 조금 더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은의 입술을 뭉개고 씻고 나와 좋은 향이 나는 피부를 짓씹고 싶었다.
“안 되겠다. 내일 정말 옷 사러 가야겠다.”
빠르게 침대 안으로 들어온 호은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며 어색한 눈짓을 보냈다.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던 도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악어가 물 안에 숨어 사냥감을 천천히 기다리는 것처럼 도인호 또한 욕망에 번들거리던 눈길을 지우고 순진한 척 눈동자를 굴렸다.
“같이 가요.”
“그럴까? 백화점 가는 김에 집에 필요한 것도 사고.”
“좋아요.”
방 안의 조명을 끈 도인호가 호은이 숨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자신에 비해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냄새에 더럽고 추잡한 생각들이 일순간 사라지는 거 같았다.
악어와 악어새 관계라고 굳건히 믿고 있을 호은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도인호의 품에서 안정을 느끼고 금방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호은은 받았던 월급으로 얼마 정도 지출할지 계산하며 도인호와 백화점 나들이를 떠났다.
당연히 스트릿 패션 코너에서 캐주얼 정장을 사려던 호은이었다. 그러나 도인호는 호은이 쓴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 준 뒤 익숙하게 VIP 라운지로 호은을 데려갔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던 공간에 들어온 호은은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인호야. 여기 이렇게 들어와도 돼?”
“옷 사러 온 거잖아요.”
“그, 그니까. 3층 가면 되는데.”
“그러다 누가 알아봐서 인파 몰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아직 반정부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니까요.”
“그러면 그냥 인터넷에서 살까?”
라운지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돈을 내라고 할까 봐 호은은 앉았다 일어섰다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도인호는 고개를 저으며 호은에게 음료를 마실 거냐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음료가 들어가겠냐고 물었으나 생과일 제조라는 문구를 본 호은은 자연스럽게 딸기 바나나 라테를 시켰다.
“도인호 고객님.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
음료를 가져온 직원이 나가고 얌전히 음료를 음미하던 호은은 누가 봐도 명품관 매장에 있을 거 같은 직원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로 말씀하셨던 분이 이분이신가 보네요?”
“슈트랑 일상복 위주로 보려고 합니다.”
호은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는 두 사람을 봤다. 고개를 바쁘게 움직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도인호와 대화를 끝낸 직원은 곧 준비해 드리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인호야 뭐야?! 나 여기서 옷 사는 거야? 여기서 사면 너무 비싸지 않나? 티셔츠 같은 건 아무거나 사면 되는데.”
“형은 아무 옷이나 입어도 분명 잘 어울리겠지만.”
마치 뱀이 몸을 옭아매듯 도인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호은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아무거나 입히고 싶지 않아서요.”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은 도인호는 천천히 걸음을 떼 문을 열었다.
“프라이빗 룸으로 이동 도와드리겠습니다.”
준비가 된 건지 이동하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호은은 도인호 뒤에 꼭 붙어 따라갔다.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가자 행거에 스타일링이 끝난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까지 다양하게 늘어져 있었다. 브랜드는 호은이 알 만한 명품 브랜드였다.
도인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직원이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호야. 너무 비싼 것 같은데? 나는 스파 브랜드 옷 사려고 했거든…….”
호은의 말에 고개를 기울인 도인호는 마치 스파 브랜드에서 옷을 왜 입냐는 듯 악의 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자신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 다가오는 직원에 호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순간이었다. 도인호는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피팅하고 결정된 옷은 이걸로 계산 부탁드립니다.”
도인호는 ‘자신이 이 정도 살 수 있는 능력은 된다, 돈 많다.’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돈이 많은 편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는 인생을 살았다.
도인호의 행동은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다. 이곳에 호은을 평생 데려와도 될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었기에 카드를 내미는 행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부담스러워하는 호은을 흘긋 쳐다본 직원은 재빠르게 도인호의 카드를 받았다.
“자 고객님. 탈의실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반강제로 직원에게 끌려간 호은은 그날 옷 입히기 당하는 인형처럼 입고 벗고를 세 시간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해방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도인호에게 따지려고 열을 올리던 것도 김이 빠진 호은은 집으로 돌아가며 반쯤 달아나려는 영혼을 억지로 붙잡았다.
“인호야. 앞으로 십 년은 옷 안 사도 될 거 같아…….”
“다행이네요.”
“그리고 돈 벌어서 갚을게.”
“오늘 일은 제가 갚은 겁니다. 그동안 밥 사 준 답례로.”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는 도인호를 보며 호은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확실히 밥 먹으러 가면 도인호에게 절대 계산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놨다. 그건 다섯 살이나 더 먹은 형의 자존심이었다.
‘그래, 가이드 신입 연봉이 1억인데 위험 현장을 다닌 도인호는 당연히 돈이 많겠지.’
거기다 십 년 차였다. 적금을 잘했더라면 정말 도인호에게 이 정도는 껌값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형아의 자존심에는 조금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저녁이라도 사겠다며 마무리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거울 앞에 선 호은은 이러려고 쇼핑했나 싶어 피식 웃었다.
도인호가 건넨 슈트로 갈아입고 나오자 거실에 있는 도인호와 같은 브랜드의 같은 디자인 옷이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도인호에 호은은 결국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커플 템이 맞추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그, 그런 거 아, 아닙니다. 같은 팀원인 걸 구분하기…….”
웃으면서 달려드는 호은에 도인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도인호를 괴롭히기 위해 다가갔던 호은은 저를 반겨 주는 커다란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누구의 웃음소리인지 구별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