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도인호의 손에는 해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고요한 병실에 꽃내음이라도 나면 호은이 편안할 것 같아 매번 다른 꽃으로 병실을 장식했다.
지난번에 놓았던 꽃이 시들어 가는 거 같아 해바라기를 구매한 도인호는 문을 열자 일어난 호은의 모습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꽃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도인호는 비척거리며 호은에게 다가갔다. 품 안에 따듯하게 채워지는 온기에 호은이 깨어난 게 실감이 났다.
권호은이 무사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도인호는 호은의 어깨에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문질렀다.
“형이 깨어만 나면, 저는 제 모든 걸 형에게 바친다고 맹세했어요. 그래서 형과 같은 홍보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이제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앞으로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목울대를 움직인 도인호는 괴로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이 민원부 현장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됐잖아요.”
호은이 냇가에 빠졌을 때 침착하게 굴었던 도인호의 속은 엉망이었다.
또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권호은을 지키지 못했다. 월랑에게 공격을 퍼부으면서 신경은 온통 호은에게 향했다. 맥박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움직임은 있는지. 호은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도인호는 또 한 번 그를 잃을 뻔했을 것이다.
“결정체 이식자로서만 살아갈 땐 폭주해서 죽게 되면……. 결정체를 남기고 떠나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런데 저 자신으로서 살아가려고 보니까. 저 자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호은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기껏 형이 살려 준 목숨인데.”
쓸모없는 사람은 버려진다. 결정체 이식 수술을 위해 끌려왔던 여러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도인호 혼자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실험 성공으로 쓸모가 있었기에 죽지 않은 거다.
쓸모가 없으면, 필요하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
물론, 호은이 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안다. 그들과 다르게 호은은 상냥하니까. 분명 자신이 쓸모없는 놈이라는 걸 알아도 버리거나 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오 년이 지나고도 자신이 그대로라면?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가 되면 호은이 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도움이 되어야지 호은의 옆자리를 지킬 수 있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말 잘 듣는 충견의 역할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호은의 옆을 계속 차지하고 싶었다.
“형이 저한테 몇 번이고 거짓말해도 전 화내지 않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도인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이십 년 동안 행복했던 순간을 뽑자면 이상하게도 호은과 케이크를 먹었던 그 달콤한 시간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그때와 비슷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도인호는 호은이 무엇을 하든 괜찮았다.
“형이 저만 버리지 않으면.”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고백이 나왔다가 밤공기에 흩어졌다. 할 말이 끝났는지 음울한 낯짝의 도인호가 호은을 살펴보았다.
혹시 자신이 말하는 도중에 호은의 심기를 거슬렸을까 눈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다섯 살이나 많이 먹어 놓고 거짓말하니까 좋냐!!!”
잠자코 도인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던 호은이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확인하고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파트너인데! 서운하다!!! 기분 나쁘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라!!!!”
도인호가 당황한 듯 호은을 쳐다보자 앉아 있던 호은이 이번에는 일어서서 복부에서부터 소리를 쥐어짜듯 두 배나 커진 소리를 울려 댔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호은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도인호를 쳐다봤다.
“야 인호야. 오늘은 내가 너 대신 말해 줬는데. 다음부터는 네가 말해.”
“……?”
“버리니 뭐니 그런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방금 네 얘기 해 준 것처럼 다 토해 내.”
바닷바람으로 호은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나도 가이드로서 부족해. 너는……. 뭐 내가 볼 땐 부족한 거 없는 에스퍼인데. 그래도 네가 부족하다 느끼면 거기까진 이해할게. 근데 내가 버릴까 봐 네 마음을 숨기는 짓은 하지 마.”
오늘의 대화를 삼키는 건 파도가 아니었다.
“우리 파트너잖아. 서로가 필요한.”
악취가 날 정도로 까맣게 뭉친 도인호의 마음이 호은의 말 한마디로 한 번에 휩쓸렸다.
“내가 폭주에서 널 구해 준 건 맞지만 살려 준 건 아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건 인호, 네 의지야. 그러니까 널 위해 살면 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는 옆에서 그런 널 지켜볼게.”
덧없는 웃음을 지은 호은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도인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호은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이 지는 순간, 어둠과 빛이 뒤섞인 호은의 얼굴은 손을 뻗으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고 마치 신앙심을 품고 신을 바라보는 신자의 시선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숭고한 눈빛을 빛내던 도인호가 손을 뻗었다.
자기 손보다 한 뼘이나 작은 호은의 손가락 사이를 겹쳐 깍지를 꼈다.
“거짓말해서 서운했어요…….”
도인호의 목소리 끝이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질투 났어요. 내가 모르는 사이 형이 다른 사람과 무슨 일을 했다는 게…….”
앉아 있는 도인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호은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허리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서웠어요……. 쓰러진 게 김세희 씨가 아니라 형이었을까 봐.”
진심을 토해 낸 도인호를 칭찬하듯 호은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물로 젖어 가는 옷을 느끼며 호은은 두 눈을 감았다.
“미안해. 거짓말도, 걱정시킨 것도.”
파도가 길게 울었다. 도인호는 자신의 울음소리가 부디 그 소리에 섞여 호은에게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인천 지사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는 도인호가 잡고 있었다. 왼손은 운전대에 다른 한 손으로는 호은의 손을 꼭 잡고 있어 조수석에 앉은 남자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어서 발개진 눈가가 꼭 아기 같았는데, 한 손 운전하는 모습이 웃겼기 때문이다.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호은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을 보았다.
거짓말로 며칠 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고속도로 같았다. 역시 거짓말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 거짓말 덕분에 도인호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거짓말을 한 번만 더 하면 도인호가 훌쩍거리는 게 아니라 엉엉 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따듯한 히터 바람을 쐬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지 않으려고 볼 안쪽을 씹으며 정신 차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몽롱한 정신 속 도인호가 가이드인 자신에게 갖은 의미가 생각보다 컸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들었다.
‘저런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내가 강해져야 하는데…….’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던 호은이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잠에 빠졌다.
조용해진 옆좌석에 도인호는 신호가 멈춘 틈을 타 잡고 있는 손을 들었다.
호은의 손등에 입술을 포개자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짧게 입 맞춘 도인호는 잡은 손에 틈 하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을 얽었다.
“이제 놓고 싶어도 안 놔줄 거예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호은에게 닿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옆에 있겠다고 한 건 형이니까.”
“…….”
“나중에 원망해도 늦었어요.”
집착과 소유욕이 한 대 얽힌 도인호는 입꼬리 한쪽을 희미하게 들었다.
***
“으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호은이 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시야는 익숙한 엘리베이터였다.
“일어났어요?”
습관적으로 올라가는 층수를 보던 호은이 잠이 덜 깬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더니 발작하듯 몸을 비틀었다.
“뭐, 뭐야!”
다리를 버둥거리던 호은은 자신이 도인호의 품에 안겨 숙소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내리니까 조금만 더 자요.”
“아니, 인호야, 그게 아니라! 나 내려 줘.”
“형. 엘리베이터 흔들려요. 얌전히 있어야죠.”
호은을 내려놓기는커녕 자세를 고쳐 잡은 도인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태평한 얼굴로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나갔다.
현관문까지 열고 나서야 호은을 내려 준 도인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 언제 잤어?”
신발을 가지런히 벗은 호은이 침을 흘린 입가를 손으로 닦으며 물었다.
“별로 안 잤어요. 배는 안 고파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도인호를 보며 호은은 멋쩍어하던 것도 잊고 한 손으로 배를 매만졌다.
“배고파……. 조개구이라도 먹고 올걸.”
거실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10시가 넘어가 있었다. 기지개를 켜던 호은은 바다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 있었구나 싶었다.
“우동 먹을래, 인호야?”
이미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에 나가는 것은 귀찮았기에 호은은 냉장고 문을 열며 간식거리를 찾았다. 어묵과 우동 사발면이 있는 걸 확인한 호은이 입맛을 다시며 도인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익숙하게 냄비부터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인호, 너는 오늘 어땠어?”
간단하게 요리를 끝낸 호은이 접시에 우동을 덜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젓가락으로 집어 후후 불던 호은은 문득 도인호 또한 오늘 현장에 나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정부 실마리는 아직 못 찾았지만, 여러모로 반정부와 관련됐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이드가 부족해서 지난번 가이드 인질 사건을 벌였던 거 같은데. 에스퍼 의심자는 왜 노리는 거지?”
호은의 가느다란 흰 목덜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도인호는 질문을 듣는 척하며 느리게 목선부터 쇄골 라인을 훑어보았다.
“반정부 인원이라도 늘리려는 걸까요.”
점성이 묻은 듯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호은은 어색한 손길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그런가? 이제 월요일부터는 인사부랑 합동 임무를 하는 거네. 뭔가 떨린다.”
“인사부 현장은 조심해야 할 겁니다. 가이드 스카우트할 때와 에스퍼 스카우트 할 때의 현장 느낌이 달라서요.”
“아하하. 벌써 겁주는 거야?”
그릇을 비운 호은이 만족감이 서린 얼굴로 도인호를 보며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도인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겁먹어서 제 뒤에 꼭 붙어 있으면 좋겠어요.”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호은은 도인호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장, 장난도 치고 도인호! 개그 센스가 늘었다?”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며 도인호를 위아래로 흔든 호은은 발갛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이 들킬까 봐 신음을 삼켰다.
진심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까 순수한 도인호는 생각하는 그대로를 내뱉는다. 그 말에 자신이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씻어야겠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난 호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