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호은은 홍보부라는 단어에 주변에 다시 반설아라도 왔나 싶었다.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누구누구 오는지 알 수 있나요?”
“전부요.”
“저, 전부.”
호은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러갔다.
“몇, 몇 시에 온다고 했죠. 잠깐만요. 저 일단 옷 좀 갈아입고 싶은데….”
홍보부가 온다는 소식에 호은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잠입한 반정부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큰일인데, 가이드까지 당했다. 마지막으로 반정부가 도망가게 내버려 뒀으니…….
배연우에게 혼날 생각을 하자 입 안이 바싹 메말라 갔다.
이동식 행거에 걸린 옷을 챙기며 호은은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배연우도 무서웠지만 도인호에게 이런 식으로 촬영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최대한 숨기고 있다가 영상이 나오고 나서 설명하려고 했다.
적어도 그때쯤이면 시간이 많이 지나 도인호도 “어쩔 수 없네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들킨다면…….
“에취.”
한기가 몰려와 호은은 재채기를 뱉었다.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호은 씨 괜찮아요?”
김세희의 옆에 앉아 있던 류윤재는 안절부절못하는 호은을 부르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류윤재 씨. 양치기 소년 이야기 결말 아세요?”
“네?”
“권호은은 반정부와 함께 사라졌다고 말해 주실래요.”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호은에게 류윤재가 정신 차리라며 호은의 팔을 철썩 소리 나게 때렸다.
“김세희 씨도 아직 누워 있는 상황에서 그런 농담은 재미없습니다.”
눈썹과 눈썹을 모은 류윤재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 나서야 호은은 호들갑 떨던 것을 멈췄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건 류윤재와 김세희일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이번 영상과 관계없는 자들이었다. 지신과 동기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이 장소에 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호은은 기절한 상태로 눈을 뜨지 못하는 김세희에게 시선을 건넸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괴로운 얼굴이었다.
“이번 건 제 불찰입니다. 기자가 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수상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한번 마주친 적 있는데 못 알아봤는걸요. 모자를 왜 썼나 의심했어야 했는데…….”
비서실장인 신은혜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뚝뚝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언뜻 분노가 스쳤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번 사건은 그녀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그녀는 얽혀 있는 사건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호은에게 당시 상황을 천천히 설명해 달라 부탁했다.
“인터뷰 때는 별거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같은 팀원들이 잘해 주냐, 보통 인터뷰에서 이런 걸 묻나? 싶은 질문들이었어요.”
“확실히 가이드 관련 질문은 아니네요. 그러면 혹 방사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느낌은 없었나요?”
“네……. 못 느꼈습니다. 제가 유난히 방사 가이딩에 대해서는 감이 둔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권호은 씨에게는 해당 기자가 터치를 하거나 그런 건 없었나 보네요?”
“네. 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인터뷰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고 김세희를 만지던 것과 다르게 호은에게는 신체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다.
“그것 말고 특이 사항은 없었나요?”
“네…….”
“63스퀘어에서 권호은 씨를 마주쳤다는 티도 내지 않았고요?”
“그때 봤던 가이드가 저인 걸 모르는 거 같았습니다.”
반설아와 대치하면서 호은은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까 불안했다. 지난번 현장에서 반설아에게 적의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녀는 권호은이 63스퀘어 때 봤던 가이드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살려 두고 가지는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 당시 헬멧을 써서 그런지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덕분에 혼자서 복수 아닌 복수를 끝낸 호은이 뿌듯해하고 있을 때도 반설아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단 알겠습니다.”
호은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던 신은혜는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들었다.
“네. 들어오시면 됩니다.”
전화에 관심 없는 척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호은은 누군가 들어온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치유 에스퍼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행이다.”
호은와 류윤재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리는 문으로 들어오는 치유 에스퍼를 반겨 주었다.
“이쪽입니다. 반정부에게 팔이 붙잡혀 있었어요.”
반설아에게 잡혀 손자국이 남은 김세희의 팔을 보여 주자 치유 에스퍼는 그 밖에도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외상은 치료했습니다. 내상도 제가 확인했을 때 큰 문제 없고요.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김세희 팔을 치유한 에스퍼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기절할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에스퍼랑 가이드랑 같은 선상에 두지 마세요.”
의아해하는 치유 에스퍼에게 류윤재가 딱 잘라 말했다. 병동에서 일하다 보니 가이드가 다치는 경우도 많이 본 건지 날카롭게 말을 내뱉는다. 그 태도에 에스퍼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자리를 떠났다.
“류윤재 씨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일에 휘말리기나 하시고.”
“저는 딱히 아무 일 없었는걸요.”
치유 에스퍼와 함께 순간이동 에스퍼가 현장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는 신은혜는 대기실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통화를 끝낸 신은혜는 류윤재에게도 검사를 권유했다.
“류윤재 씨도 혹시 모르니까 검사 다 받아 보세요.”
반정부와 연관된 사건이다 보니 귀가 도중 다시 습격당할 것을 대비해 순간이동 에스퍼와 함께 복귀하기로 결론이 났다.
홍보부인 호은을 제외하고 류윤재와 김세희는 본사 직원에게 둘러싸인 채 촬영장을 떠날 수 있었다.
“이런 신성한 주말에 불러내다니. 휴일 수당 무조건 받아 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배연우의 목소리에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던 호은이 자세를 바로 했다.
“대리님?”
복도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멀리서부터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일정한 속도로 걸어오는 배연우를 확인한 호은이 자신도 모르게 반갑게 뛰어갔다.
“대리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배연우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분홍 머리 위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호은은 뛰던 것을 멈추고 빠르게 옆에 있던 빈 방으로 숨었다.
배연우만 먼저 온 줄 알았더니 도인호가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은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거 같은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불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방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나 왜 숨었지.”
잘 숨었으면 모를까 분명 도인호가 봤을 거다.
문 앞에 멍하니 선 호은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거짓말한 건 자신의 의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인호가 영상 촬영하는 걸 싫어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은이 선택한 방법은 도인호를 설득하는 게 아닌 거짓말을 하고 몰래 촬영하자는 거였다.
하지만 후자의 결과에서는 반정부를 마주치는 일도 없었고 가이드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하.”
괜히 거짓말했다는 후회가 슬슬 들려고 할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응.”
역시나 숨어 봤자였는지 도인호가 문을 열었다. 복도를 비추고 있는 조명 덕에 어두운 방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새 어두운 시야에 익숙해졌는지 앞을 밝히는 빛에 호은의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찌푸린 눈을 제대로 뜬 순간 보인 도인호의 얼굴은 조명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런지 그늘져 보였다.
“다친 곳은 없어요?”
호은의 머리부터 천천히 살펴보던 도인호의 시선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차라리 왜 거짓말을 했냐고 말이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도인호의 입술은 고집스러울 만큼 꾹 다물어져 있었다.
호은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미 촬영장 상황을 다 들었을 도인호였겠지만,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마주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괜찮아 보이네요.”
“어? 응. 몸은 괜찮아.”
호은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써 웃었지만 도인호의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도인호의 모습은 평소 모습과 같다고 느꼈을 거다. 하지만 호은만은 지금 도인호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났겠지? 말할 기회를 여러 번 줬던 거 같은데 끝까지 속였으니까.’
파트너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인데 자신은 그 신뢰를 깨 버렸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선택이었다.
“권호은, 와서 현장 브리핑해.”
복도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배연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호은을 방 밖으로 꺼냈다.
평소라면 손을 꼭 잡고 다치지는 않았냐 지랄 염병을 했을 두 사람이 오늘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배연우는 괜히 기침을 뱉으며 호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비밀 임무 하느라 고생했다. 아, 이번에 권호은은 이사장님 지시로 촬영 진행한 거다. 혹시 몰라서 임무는 나한테만 공개했던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도인호를 힐끔거리며 배연우가 말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이사장 지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도인호의 이 사이로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아니 남운수는 왜 이렇게 안 와. 얼른 모여야 브리핑을 하지.”
괜히 큰소리로 남운수를 질타하던 배연우는 복도 저편에서 뛰어오는 남운수를 발견했다.
그는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건지 머리가 물에 젖은 상태였다.
“죄송해요……. 수도꼭지가 갑자기 터져 버려서.”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자 배연우에게 물이 튀었다. 배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던졌다.
“홍보부 다 모이신 걸까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신은혜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배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반설아가 도망쳐 창문이 깨진 방으로 홍보부를 안내했다.
“CCTV 영상 먼저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이곳에서 촬영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 같습니다.”
신은혜가 내민 태블릿으로 영상 하나가 재생됐다. 촬영장 소품이 모여 있는 공간에 사람 한 명이 등장했다. 반설아였다.
“포탈을 열 수 있는 에스퍼가 있는 거 같은데 해당 소품장에 포탈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반설아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모자 캡을 더 깊게 내리눌렀다.
두 번째 촬영은 가이드 세 사람이 나와야 했기 때문에 보디가드나 협회 관련 사람들이 다 촬영장에 몰려 있었다.
덕분에 한산해진 복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 반설아는 예정되어 있던 기자 대기실로 쉽게 들어가 기존에 있던 기자를 아무도 몰래 처리할 수 있던 것이었다. 캐비닛 안에 들어간 기자는 현재는 구출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뒤 이곳에서 권호은 사원과 인터뷰를 하고 다음으로 김세희 씨가 들어갔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나자 도인호의 미간이 한데 모였다.
“이건 뭐죠.”
고갯짓으로 화면을 가리킨 도인호는 호은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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