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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61화 (61/129)

61화

김세희의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호은은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행동이 먼저였다.

앞에 있는 남자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인터뷰 중인 대기실의 문을 열자 기자에게 손이 붙잡힌 김세희가 반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시는 건가요!”

방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지르자 새하얀 입김이 터져 나왔다. 한겨울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방 안을 감쌌다.

“그만, 그만해!!!”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김세희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과 신음을 흘리는 원인을 찾자 기자에게 잡힌 팔 때문인 거로 보였다.

“그 손 놓으세요!”

기자의 손에서 김세희를 떼어 놓기 위해 호은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파지직.

바닥이 어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빙판길이 만들어지더니 호은이 서 있는 곳까지 빠르게 다가왔다.

“!!”

그 순간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팔과 함께 호은은 너무나도 가볍게 들렸다.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뒷걸음질 치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얼음이 뾰족하게 여러 방향으로 돋아나 있었다.

미지근한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호은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조심해야죠.”

조금 전까지 사인받고 있던 남자다. 검은색 마스크는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르게 만들었다.

“고슴도치 되실 뻔했네.”

남자의 말에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두 발자국만 더 앞에 있었다면 호은의 발은 지금쯤 뾰족한 얼음 가시에 찔려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느꼈던 위화감은 이 여자인가?’

호은은 얼어 있는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빙결 이능력은 반정부 중 반설아의 이능력이다.

가면을 쓰고 있어 저 얼굴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능력은 그녀가 반설아라 말하는 거 같았다.

호은은 아직까지 배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팔에 손을 갖다 댔다.

풀라는 신호였다. 느슨해진 팔의 힘을 느끼며 김세희를 데려올 타이밍을 보던 호은은 여자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하는 순간 재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고, 모든 신경은 발에 집중한다.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김세희가 있는 곳까지 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첫걸음을 뗐을 때 묘한 쾌감이 일었다. 가볍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발바닥이 땅을 밟고 떨어지는 시간이 매우 찰나처럼 느껴졌다. 일반인이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호은이 김세희의 옆으로 다가와 반설아의 팔을 뿌리쳤다.

“……!!!”

김세희를 뒤에 숨기고 나자 호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지난번, 무력하게 반설아에게 당하던 자신과 다르다.

반설아의 눈동자는 마치 검은색과 남색이 섞여 블랙홀처럼 보였다.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눈을 똑바로 마주 본 호은은 자신감 넘쳐 보였다.

“속도는 좋네. 그래서 다음은?”

반설아가 입을 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흩어진다.

호은은 당황하지 않은 척 주먹 쥔 손을 들었다. 주먹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마치 무언가 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반설아의 시선은 말아 쥔 주먹에 향했다.

그녀는 호은이 공격할 거라 생각했는지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호은의 다음 턴을 기다렸다.

‘망했다.’

호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다였다.

주먹을 쥐고 있어 봤자 고작 체술이 다였다. 이래서 배연우가 현장 가이드는 이능력품이 필요하다고 한 걸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 텐데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속으로 자책했다.

‘김세희를 안고 뛸까?’

호은은 김세희를 안고 뛰었을 때 지금과 같은 속도를 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눈앞에 반설아는 호은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더니 연분홍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을 올렸다.

“뭐 없지?”

“아, 아닌데.”

인터뷰 대기실이 복도 끝에 있어서 그런지 김세희의 비명에 반응한 사람은 호은과 사인을 받던 남자가 다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이 상황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거 같았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방 안의 기온이 낮아서 그런지 몸이 떨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뒤쪽에 있는 김세희는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벗어나 김세희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급한 상태였다.

호은은 뒤에서 평화롭게 서 있는 남자를 힐끔 봤다. 일반인일 게 분명한 남자는 반설아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녀가 에스퍼인 건 방금 이능력으로 확인됐을 거다.

촬영장 스태프는 일반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보안요원조차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이었던 걸로 보았을 때 남자의 행동은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다.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오히려 다행일지도.’

호은은 김세희를 남자에게 맡긴 뒤 두 사람에게 도망치라 말할 예정이었다.

그사이 반설아를 어떻게든 붙잡는다면 적어도 그녀의 이능력에 당할 사람은 세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어들 것이었다.

결론 내린 머리는 빠르게 행동을 실행시켰다. 싸움할 때 등을 보이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호은은 등을 돌린 채 김세희에게 문밖으로 뛰라고 말했다. 김세희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저기요! 세희 씨 데리고 나가세요!”

남자에게까지 말을 내뱉은 호은은 마지막으로 반설아의 몸을 막기 위해 뒤를 돌았다.

“아…….”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왜 만화 같은 거 보면 그런 장면 있지 않은가? 마법 소녀가 의상을 체인지하는 시간 동안은 악당이 기다려 주고, 또 동료를 도망치게 할 때도 악당은 기다려 준다.

그러나 뒤를 돌자 보이는 것은 그 짧은 기다림을 무시한 반설아가 만들어 낸 뾰족한 얼음이 마치 미사일처럼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현실이다.

저거라면 도망치는 김세희와 남자에게도 닿을 게 분명했다. 손가락을 튕기려는 반설아에 호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닿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나만 맞는다면…….’

김세희의 작은 머리통을 감싼 호은은 뒤이어 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카로운 것이 날라 오는 듯한 소음이 들린다. 고통을 기다리던 호은은 무언가 튕기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으음. 도망쳤네요?”

김세희를 가운데에 둔 채 마주 보고 서 있던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호은이 뒤를 돌자 깨져 버린 얼음 조각들과 휑하니 열린 창문의 풍경이 보였다.

“그쪽이 한 거예요?”

“아. 이거요?”

남자는 흰색 팔찌를 차고 있는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팔찌에서 투명한 방어막 같은 게 펼쳐졌다.

“투명한 방패……?”

호은이 손으로 막을 두드리자 단단한 소리가 울렸다.

“설마 이능력품인가요?”

반설아의 이능력은 남자가 만든 방패로 인해 처참히 부서졌다. 덕분에 몸에 구멍이 생기는 일은 면했지만,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도 듣지 못한 채 놓쳐버리고 말았다.

창문을 허망하게 쳐다본 호은이 남자의 팔찌로 시선을 돌리자 손목을 감싸고 있던 팔찌의 줄이 툭 하고 끊겼다.

“일회용품이라 벌써 끝났네요.”

이능력품이 일회용일 수 있나? 호은이 남자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김세희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차 좀! 아니, 구급차가 아니라.”

호은은 김세희를 조심히 안아 들고 방으로 나갔다. 일반 병원에 가는 것보다 치유 에스퍼에게 치료받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김세희를 안은 채 복도로 나온 호은은 가장 먼저 비서실장을 찾았다.

“실장님! 김세희 씨가 쓰러졌어요. 방금까지 반정부가 있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비서실장은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세희는 비어 있던 대기실 소파에 담요를 두른 채 눕혀 놓은 상태였다.

비서실장이 건넨 손수건으로 젖은 땀을 닦은 호은은 이능력품을 가지고 있던 남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어디 간 거야.”

“누구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은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분명 아무도 없었던 거 같은데 등장한 남자에게 심장이 덜컹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 그쪽이요.”

“저요? 우와! 오늘 덕계못 다 파괴하고 가네요.”

“덕, 덕계못이요?”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오늘 사인도 받고 또 호은 씨가 저를 찾아 주시기도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저를 왜 찾았나요?”

“그…… 아까 이능력품 쓰신 거 때문에요.”

“아. 내가 아니라 이능력품…….”

“아니, 아니! 당연히 그쪽도 찾은 거 맞죠.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마스크로 가려도 웃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광대가 올라가 있었다. 남자는 두 손을 들어 호은의 손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말요? 저 도움 됐어요?”

“예? 네네. 아니었으면 선인장이 될 뻔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일반인이신데 이능력품은 어떻게 가지고 계신 건가요?”

호은이 남자에게 잡힌 팔을 자연스럽게 떨구며 질문했다.

“아. 이능력품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쪽 시장엔 빠삭하거든요.”

“이능력품 회사요……?”

“2년 전까지 다니다가 지금은 보시다시피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긴 한데. 뭐 덕분에 이능력품 구매는 저한테는 쉽죠.”

“구매요? 이능력품은 일반인이 못 다루지 않나요?”

“맞아요. 가이딩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건 일회용이라 이능력 안에 가이딩까지 조금 담겨 있어요.”

“일회용이요?”

“한두 번 쓰면 망가지거든요. 계속해서 가이딩을 채워 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이능력품이 깨지는 원리예요.”

호은은 남자의 팔찌가 끊어졌던 걸 떠올렸다.

“그래도 인기 많아요. 일반인이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신 너무 비싸서 알아도 못 사는 사람이 태반이지만요.”

“얼마나 비싼데요?”

“이거는 3억 5천만 원 했나.”

“???”

휘둥그레 눈을 뜬 호은은 남자의 비어 있는 왼손을 쳐다봤다. 손에 지금 3억 5천만 원을 차고 있던 거야?

다시 보니 남자의 옷은 디자인은 평범해 보였으나 죄다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다.

“이런 일회용 이능력품 사는 게 취미라서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괜히 저 때문에 망가트린 거 같아서 죄송하네요.”

“그러면 나중에 밥 한 끼 사 주실래요?”

“네?”

“저 권호은 씨 밥 먹는 거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아……. 네 좋아요.”

물 흐르듯 남자와 연락처 교환까지 한 호은은 행복해 보이는 듯 방방 뛰는 남자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여 줬다.

아직도 팬이라고 다가온 남자에게 적응이 안 됐다. 팬이라는 존재가 있을 정도의 인기가 있는 권호은이라니. 너튜버 생활에서도 꿈꿔 보지 못한 걸 가이드가 되어 이룬 것이 이상하기만 하다.

남자를 보내고 나서야 호은은 김세희가 있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잠든 김세희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자 비서실장이 조용히 호은에게 다가왔다.

“치유 에스퍼 호출했으니 금방 올 겁니다. 그리고 홍보부 직원들도 올 거예요.”

“홍보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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