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평등하다는 말에는 여전히 공감이 안 되지만 상처만 받지 말아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연우의 얼굴이 그늘져 있었다. 오늘의 훈련은 여기서 끝인지 주변 정리를 시작하는 배연우에게 호은도 어지른 무기들을 진열장에 갖다 놓았다.
“오늘 무기 테스트 보고서 나중에 올릴 테니 너도 그중에서 어떤 게 잘 맞았는지 생각하고 있어.”
“넵.”
“뭐야. 할 말 있어?”
평소라면 빠르게 퇴근했을 호은이 배연우의 앞을 얼쩡거렸다.
“대리님에게 에스퍼는 어떤 존재인가요?”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호은이 용기를 쥐어 짜냈다. 그늘졌던 얼굴이 신경이 쓰였다. 그 얼굴은 에스퍼를 혐오하는 것보다는 마치 상처받은 쪽에 가까워 보였다.
“에스퍼는 내가 불행할수록 행복해지는 놈들이라.”
“…….”
“내가 불행한 만큼 더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존재야. 그런 이유로 남운수 팀장이랑 다니는 건 제법 볼만해. 세상 모든 불행을 끌어다 모은 것 같거든.”
“아…….”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와 반대로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없애려 화제를 돌리려던 호은에게 배연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정신 차리고 절대 헷갈리지 마. 그들이 원하는 건 네가 아니라 그저 네 몸속 어딘가에 흐르고 있는 가이딩뿐이니까.”
“…….”
“가이드가 아닌 우린 그 녀석들한테 필요 없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호은의 몸을 훑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서 마음고생을 하는 가이드들이 많으니까 알려 주는 거다.”
“많다고요?”
“그래. 초반에는 멋모르고 에스퍼한테 반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런 애들을 얼빠라고 하지.”
호은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얼빠라는 단어가 찔렸다. 확실히 연예인 수준의 외모를 가진 에스퍼가 네가 필요하다, 너만이 날 살게 만든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면 안 넘어갈 가이드가 얼마나 될까?
“질 나쁘게 신입 가이드만 노리는 에스퍼도 있고.”
“신입 가이드요?”
“그래. 인턴 기간에 실습 가이딩하지 않아? 그걸 핑계로 접근해서 가지고 노는 거지. 너는 뭐 없었냐?”
“저희는 그런 에스퍼는 없었는데요?”
“흐음…….”
입을 열려다 닫아 버린 배연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은은 김세희와 류윤재를 떠올렸다. 다행히 인턴 동기 중에는 그런 파렴치한 일을 당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김세희도 류윤재도 지금까지 실습에서 만났던 에스퍼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류윤재는 김한슬 씨와 핑크빛 기류를 보이고 있었다. 호은은 동기들은 괜찮다고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숙소로 돌아가자 켜지지 않은 전등과 어두컴컴한 집이 호은을 반겨 줬다. 도인호의 훈련이 늦게 끝나는 걸까 의아해하며 호은은 빠르게 씻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냉장고 문을 열며 호은은 고민에 빠졌다. 인천지사의 단점 중 하나로는 배달 음식이 안 되는 점이었다. 지사 내부에 가게가 많긴 했지만 가끔은 포장이 아닌 집까지 배달되는 음식을 먹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인데.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나날이 요리실력이 늘어 가는 호은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적당히 손질해 밥과 볶자 금방 볶음밥의 형태가 되었다. 소고기 뭇국을 끓이고 있을 때쯤 잠금장치 소리가 들리더니 도인호가 들어왔다.
“마침 기다렸는데! 딱 좋은 타이밍에 왔네.”
부엌에 있던 호은이 거실로 나가 도인호를 반겨 줬다. 도인호는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빤히 쳐다보는 얼빠진 모습에 호은이 도인호의 이름을 불렀다.
“인호야?”
멍하니 있던 도인호는 호은이 이름을 불러주고 나서야 움직였다. 도인호는 호은을 살포시 껴안으며 물었다.
“저 기다렸어요?”
“응? 기다렸지. 밥 같이 먹으려고.”
“…….”
도인호가 웃으며 호은의 머리통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도인호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리던 호은의 귓가로 배연우가 했던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왼손에 찬 가이드 워치는 도인호와 접촉하자 가이딩 수치를 나타내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충분히 채웠던 것 같은데 47%로 내려가 있었다.
‘지금 도인호의 행동은 단순히 가이딩을 채우려는 거겠지.’
호은의 팔은 어정쩡한 위치에 멈췄다가 이내 축 바닥을 향해 떨어트렸다.
“에스퍼는 무슨 훈련 받는지 궁금하네. 지난번처럼 이능력 사용하나?”
도인호에게 충분히 품을 내어 준 호은이 자연스럽게 몸을 떼어 냈다. 도인호가 손을 닦고 오자 호은은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능력에 대해 공부 중이에요.”
“이능력 공부?!”
“불을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음. 확실히 이능력도 공부해야 하긴 하겠네.”
천천히 밥을 씹는 호은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던 도인호는 “형은요?” 하고 무슨 훈련을 했는지 물었다.
“나는 오늘 무기 테스트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
“이능력품! 만들어 주려고 한다며.”
“들었어요?”
“당연히 들었지. 거기다 만들려면 에스퍼가 엄청나게 고생한다는 것도 들었어. 난 이능력품 없어도 괜찮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괜찮다고 어필하는 호은은 꼭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진 천진난만함. 도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안 괜찮아요.”
도인호의 평소 얼굴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다. 같이 살다 보니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져 의외의 표정을 보는 순간들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역시 그마저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얼굴을 알아챘을 뿐이다.
그래서 호은은 도인호가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이 좋았다. 저 무뚝뚝한 얼굴의 입술이 올라가거나 눈물에 젖어 가는 모습은 오직 자신의 앞에서만 보여 준다는 것이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제가 약해서 형을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하잖아요. 저한테 의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약한 전 미덥지 않겠죠.”
지난번 민원부 현장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의 도인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물을 보였다.
“뭐라도 하고 싶어요. 형을 위해서.”
이번에도 눈물을 보일까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도인호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내가 형을 구해 줄 수 없다면 적어도…… 도움이라도 되게끔.”
간절한 욕망이 도인호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저건 도대체 무슨 표정인 걸까.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이 무거워져 쉽게 열리지 않는 호은이었다.
“형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저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지금은 이능력품이지만 나중에는 제가…… 꼭 지켜 줄게요. 지난번처럼 다치지 않게.”
“그런데 인호야…….”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호은이 도인호의 심장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나도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흉터가 남아 있을 부위가 천 너머로 느껴졌다. 호은은 손을 거두며 도인호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반대로 가이드에게 에스퍼는 필요한가? 그 질문에 호은은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도인호가 가진 저 마음이 가이드에게 버림받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보여 조금은 슬펐다.
“그러니까 괜찮아.”
지금 도인호가 불안해하는 대상자는 다름 아닌 가이드인 권호은일 게 분명했다. 호은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도인호가 필요로 하는 이상 가이드 권호은은 그 옆에 계속 있을 거다. 더 파장이 잘 맞고 등급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만 잠시 머물러 있는 거다. 그러니 머물다 떠날 사람에게 자신의 수명을 깎으면서까지 이능력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약해서 다친 거고! 이번에 열심히 훈련받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호은은 도인호의 손을 자기 허벅지에 갖다 댔다. 손에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질에 도인호가 잠시 놀라더니 이내 손바닥을 느리게 움직이며 허벅지를 매만졌다.
“위험하다 싶으면 삼십육계 줄행랑치면 되니까!”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내며 호은이 논점을 흩트렸다. 더 이상 진지한 이야기의 흐름을 가져갈 수 없게 되었다.
도인호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손길로 호은의 안쪽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저 같은 것에겐 기대고 싶지 않은 거네요…….”
음울한 목소리는 자리를 떠나 버린 호은에게는 닿지 않았다.
***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처럼 도인호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호은에게 드디어 자유라고 불릴 토요일 아침이 다가왔다.
배연우와 나눴던 대화 이후 호은은 괜히 도인호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게 껄끄러웠다. 하루빨리 이상한 감정을 정리하고 옛날의 자신처럼 도인호를 대하고 싶었으나 하루가 멀다고 가이딩을 30% 이하로 떨어트리고 오는 도인호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은 꼭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녀올게요.”
남운수 팀장과 마지막 현장 체크를 하러 가는 도인호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잠옷에 까치집 머리의 호은이 잠이 묻은 얼굴로 도인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뭐 할 거예요.”
“응?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전 6시 넘어서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래? 기다릴게.”
오전 11시에 촬영하러 가는 호은은 늦어도 도인호보다는 일찍 끝날 것 같았다.
미리 받은 대본의 대사와 영상의 분량이 적었다. 이 정도면 서너 시간 안에는 끝나겠네. 혼자서 결론을 지은 호은이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서는 도인호에게 문을 닫기 직전까지 손을 흔든 호은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거짓말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얼마나 가슴 떨리는 삶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에게 백수 너튜버인 걸 숨기며 취준생인 척 속였던 시절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걸 깨닫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11시가 되고 인천 지사 정문으로 나가자 류윤재와 김세희가 호은을 반겨 줬다.
“촬영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 은근히 관종이라 이런 거 좋아해요.”
“저도 이번 기회로 관광 가이드가 아닌 가이드 공단이 유명해지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법인 카드 말고 제 카드로 꼭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화기애애하게 인턴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도롯가에서 커다란 차 한 대가 등장했다.
“저거 설마 저희가 타는 차는 아니겠죠?”
“어? 저거 연예인 차인데.”
“우와.”
흰색 카니발 리무진이 다가오는 걸 보며 호은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커다란 차는 김세희의 말처럼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였다. 세 사람을 태우는 것뿐인데 저런 차를 타라고 하지는 않겠지 싶어 호은은 두 사람을 인도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차는 보란 듯이 세 사람 앞에 멈추더니 차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세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주고받고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누가 세 명이 타는데 리무진을 끌고 와?”
혼잣말을 중얼거린 호은은 협회의 돈 낭비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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