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 그러게. 조금 덥다.”
손부채질하며 열이 달아오른 얼굴에 바람을 보내던 호은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심장이 크게 울린다. 누가 심장에만 마이크를 준 거야? 귀 밝은 에스퍼라면 분명 요란하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눈치챘을 거다.
‘두 번은 거짓말 못 하겠네.’
여전히 벌러덩거리는 심장에 호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다 도인호와 자신을 위해서 한 행동이지만 이렇게 사람이 당당하지 못해서는 제명이 못살 것 같았다.
“이제 슬슬 갈까?”
남은 음료수를 한 번에 마신 호은은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 음료가 남은 도인호는 더 마실 생각이 없었는지 호은과 자신의 컵을 트레이에 담아 카운터에 건넸다.
“헬스장으로 갈까요.”
단단한 손이 호은에게 손을 감쌌다. 손이 잡혀 꼼짝없이 같이 이동하게 된 호은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에 일 있다고 말한 후 도망가려던 계획은 이렇게 쉽게 실패해 버렸다.
몸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는데 맞잡은 손의 열기는 그대로였다. 누구의 땀인지 모를 축축함이 느껴졌으나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최근에 지켜보는 의심자가 어린아이인데요.”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도인호였다.
“동화책을 읽는데 궁금하더라고요. 저는 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이 없거든요.”
도인호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하게 됐다.
어렸을 때 이곳에 끌려와 동화책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걸까? 아니면 어린 시절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에 애써 속으로 삼키는 호은이었다.
“그래서 어제 몇 권 사서 읽어 봤는데 그중에 하나만 결말이 달랐습니다.”
“결말? 동화책은 다 행복하게 끝나지 않나.”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호은과 보폭을 맞추어 걸어 주는 도인호의 움직임은 몹시 부드러웠다. 목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나긋하게 들려왔다. 뒷말을 바로 내뱉지 않고 뜸 들이는 모습에 호은은 보채듯 도인호를 올려다봤다.
“그 동화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다 잃고 쓸쓸하게 혼자 남겨졌습니다.”
“동화에 그런 결말이 있다고? 뭐지.”
“제목이 아마.”
“……?”
“양치기 소년이었나.”
“……!”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한 한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우뚝 걸음을 멈추자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몸에 달라붙어 호은은 손가락질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도인호가 본 동화책이 양치기 소년이란 말인가? 흥부 놀부도 있고 콩쥐 팥쥐도 있고 전통 있는 한국의 전래동화도 많은데 한국과 전혀 상관없는 폴란드 전래동화가 한국에 들어와 이렇게 유명해져 서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단 말인가.
사색이 된 얼굴을 차마 들 자신이 없어 호은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거울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지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어. 그런 동화가 있었지. 거짓말은 나쁘다는 교훈을 주려는, 하하.”
“거짓말은 나쁜 거죠?”
슬쩍 고개를 들어 도인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몰래 염탐하려던 호은은 비스듬하게 쳐다보는 도인호와 바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시선은 심장을 관통해 양심을 무참히 찔러 댔다.
“그렇긴 한데. 거짓말도…… 선의의 거짓말 그런 것도 있고.”
누군가 리모컨을 들어 볼륨 버튼을 낮추는 것처럼 호은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다 왔네요.”
훈련장 건물 입구를 보고 나서야 호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화의 흐름을 끊어 준 이 공간이 왜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지이잉.
훈련장으로 들어가려는 두 사람의 핸드폰에 동시에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남운수 팀장이었다. 인사부와의 협동작전을 허락받은 건지 다음 주부터는 현장에 가이드들도 같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현장 최종 점검으로 출근해야 할 것 같아요.”
“출근?”
도인호가 내민 핸드폰을 보자 호은과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홍보부 전체가 참여해야 하는 현장이 맞는지 검토하기 위해 남운수와 도인호는 현장을 점검한다는 내용이었다. 호은은 익숙한 날짜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사장의 비서가 보냈든 메신저에 언급된 촬영 날짜도 토요일이었다.
“나는 안 가는 건가?”
“네. 에스퍼만 가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물어보자 호은이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는 도인호였다. 양치기 소년은 재미 삼아 거짓말을 했다면 호은은 지금 온도, 습도, 조명은 없지만, 날씨가 좋았기에 거짓말을 이어 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네. 토요일에는 못 보니까 일요일에 재미있게 보내자.”
물끄러미 호은은 바라본 도인호는 호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래요. 재미있게 보내요.”
얼마나 재미있게 놀려는 건지 대답을 내뱉는 도인호의 눈동자는 마치 작열하고 있는 태양처럼 일렁거렸다. 찰나의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열리는 자동문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입구에서 제사 지내냐?”
“대리님!”
복귀 후 호은이 있을 훈련장으로 바로 왔던 건지 평소보다 제대로 갖춰 입은 배연우와 그 뒤로 남운수가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훈련하러 온 거야?”
질문을 던진 배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으로 시선이 향했다. 얼마나 잡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본 도인호의 상태는 가이딩 컨디션 자체로만 봤을 때는 꽤 좋아 보였다.
배연우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구겼다.
평소 도인호를 마주쳤을 때 무의식으로 하는 방사 가이딩조차 블랙홀에 빠진 듯 도인호에게 순식간에 먹히다시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방사 가이딩을 풀어 놓아도 도인호는 가이딩을 집어삼키지 않았다. 권호은의 가이딩으로 가득 차 다른 건 필요 없는 거다.
“쯧.”
D등급 가이드가 결정체 이식자인 도인호를 저렇게까지 케어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배연우는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뒤에 있던 남운수를 끌어당겼다 놓았다.
당황해하는 얼굴의 남운수는 눈 깜짝할 사이 다리 스텝이 꼬이더니 도인호의 권호은의 가운데로 몸을 기울였다.
놀란 호은이 잡았던 손을 놓고 남운수의 어깨를 잡아 그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줬다. 배연우는 멀어진 두 사람의 손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가이딩할 체력 있으면 훈련이다.”
허둥대며 호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남운수를 제치고 배연우는 호은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에스퍼는 에스퍼의 훈련을 하러 가지?”
“아…… 아. 우리도 가, 갈까?”
주변을 얼릴 듯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도인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본 배연우가 턱을 들었다. 저쪽으로 꺼지라는 뜻이었다.
“인호야…… 숙소에서 보자!”
“훈련 잘하고 와요.”
손바닥을 흔들며 도인호에게 인사를 건넨 호은은 서둘러 배연우를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엉켜 오는 호은에게 배연우는 당황해하며 덩달아 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왜 이래?”
호은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에스퍼의 청력으로 목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복도를 걸은 뒤에야 잡고 있던 배연우의 팔을 풀어 줬다.
“어후 심장아……. 양치기 소년은 어떻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을까요.”
“뭐라는 거야.”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배연우는 야외 훈련장이 아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조용히 따라가던 호은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띠었다.
옆에서 궁금해하는 기색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배연우는 별다른 말없이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인턴 시절 실전 교육을 받았던 층수라서 호은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전에는 B관을 갔다면 이번에는 반대쪽인 A관이었다.
“스피드 훈련은 꾸준히 하고.”
배연우는 철제문을 열면서 그렇게 말했다. 호은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대답 대신 감탄사만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한쪽 벽면에 단도부터 다양한 총기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클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야구방망이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무기들로 가득했다.
“너도 이능력품 하나 맞춰야지.”
“이능력품이요?”
“그래. 도인호한테 못 들었냐?”
“음…….”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도인호에게 특별한 말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호은이 모르는 눈치이자 배연우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엑, 깜짝 선물이야 뭐야.”
“무슨 말씀이세요?”
“이능력품은 에스퍼만이 만들 수 있는 건 알지? 도구에 이능력을 넣는 거니까.”
“네.”
호수가 가지고 있던 여러 이능력품을 떠올리며 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력을 흡수하는 다이아 메인이라는 물질로 만든 도구에다가 이능력을 불어넣는 건데, 이능력자의 수명을 깎아 넣는 것과 비슷하다 볼 수 있어. 이능력을 옮길 때 고통과 가이딩 소모도 엄청나서 일반적인 에스퍼는 만들려고 안 하지.”
“그러면 어떤 에스퍼가 만드는데요?”
“컨트롤 능력이 부족한 걸 보완하려고 만들거나 아니면.”
“……?”
“가이드 꾀어내려고 주거나.”
배연우는 휘파람을 불며 호은을 쳐다봤다.
“그런 거였군…….”
당황하거나 부끄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호은이 예상과 다르게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배연우가 말한 대상자가 누굴 향하는지 모른 채 호은은 여러 개의 이능력품을 가진 호수를 떠올렸다.
‘에스퍼가 꾀어내려고 준 게 아니라 꾐에 넘어가서 줬을 것 같네.’
혼자 다른 생각에 빠진 호은에게 배연우는 무안한지 집중하라는 듯 손뼉을 쳤다.
“자자. 하여간 너도 이능력품 생길 거니까 어떤 무기가 몸에 맞을지 테스트해 보자고.”
“저 그런데 대리님, 저는 이능력품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도인호가 만든다면 더욱이요.”
“뭐?”
“수명을 깎아 먹는다면서요.”
호은이 진열장 앞으로 가 단도를 꺼내 들었다. 좌우로 휘두르다 빠르게 앞으로 칼을 뻗으며 호은은 그립감을 느꼈다.
“남는 이능력품이면 몰라도…… 굳이?”
날카롭게 빛나는 칼끝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시원하기 짝이 없다.
배연우는 호은의 말을 곱씹더니 허리를 뒤로 꺾으며 웃었다. 몇 초간 웃음을 흘렸을까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입가를 순식간에 내렸다.
“씨팔, 이거 또 지랄이네.”
호은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1초. 배연우는 한쪽 팔로 호은의 가슴팍을 짓눌러 벽에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있는 손을 제압해 단숨에 힘으로 몰아붙였다. 목에 닿는 서늘한 칼의 촉감에 호은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인턴 기간 동안 정신 교육은 뭘 받은 거야. 가이드면 가이드답게.”
한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호은의 귀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에스퍼를 이용하라고. 우리도 충분히 이용당하고 있으니까.”
“윽.”
“에스퍼들이 가이드를 뭐라 부르는 줄 아냐? 충전기야.”
칼날 부분이 점점 깊숙이 호은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걸어 다니는 보조 배터리 취급받는 중인데 누가 누굴 걱정해?”
바닥에 칼이 떨어졌다. 어느새 풀린 손에 호은은 천천히 목에 갖다 댔다.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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