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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56화 (56/129)

56화

“텔레비전에 나온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가이드의 인식이 관광 가이드보다 낮으니까 말입니다!”

악의 없는 류윤재의 말에 웃고 있는 백우경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신입 주제에 이사장에게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욱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김세희와 류윤재는 고의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내뱉은 말이라 지금 여기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

호은은 첫인상부터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 백우경의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에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다.

“관광 가이드가 저희보다 먼저 생각나긴 하겠네요. 그래서 저희도 가이드와 에스퍼 홍보에 힘쓰려고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백우경이 매끄러운 목소리를 뱉자마자 김세희가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래서 호은 씨가 홍보 영상 만든 거구나!”

“확실히 저도 그 영상을 시골에 보내드리니 이제야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게 됐습니다.”

가이드 공단이 설립된 지는 몇 십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 몇 십년 동안의 노력보다 호은의 홍보 영상 하나가 더 파급력이 좋았다. 에스퍼를 치유할 수 있는 가이드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영상을 본 사람들은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3 스퀘어로 사고를 쳐 징계로 받게 된 홍보 업무였지만 김세희와 류윤재의 반응을 보니 호은의 영상이 일반인뿐만 아니라 가이드에게도 평이 좋았던 것 같았다.

어깨가 올라갈 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호은이었다.

“그렇네요. 권호은 씨가 홍보 영상도 잘 만들어 주시고 이번 가이드 검진 광고 영상에도 나와 주신다고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보너스로 보답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김세희가 작은 목소리로 류윤재에게 귓속말했으나 에스퍼인 백우경에게도 분명히 닿았을 것이다.

“크흠. 그나저나 홍보 영상에 김세희 씨와 류윤재 씨 인기도 좋던데. 이번 광고 영상에도 함께하시는 건 어떤가요?”

“잠깐, 무슨!”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호은은 삑사리를 내며 백우경을 쳐다봤다. 이런 말은 없었다. 보내줬던 자료에도 영상에 나오는 건 호은이 다였고 알다시피 해당 영상은 반정부 자극하기 위한 미끼용 영상이다.

홍보부와 아무 상관 없는 김세희와 류윤재가 출연했다가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상황이라 호은의 심장이 크게 펌프질했다.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건 얼굴도 보인다는 말 아닌가요?”

“선배님들이 가이드 신분은 노출 안 되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만.”

호은이 뭐라 말하기 전에 김세희와 류윤재가 먼저 문제의 부분을 정확하게 짚었다. 가이드의 신분은 노출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보통 노출되는 쪽은 현장직 가이드였다.

“홍보 영상에 나왔던 동물 이모티콘을 이용해 신분을 감췄던 것처럼 이번에도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건 어떨까요? 두 분의 신분은 노출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오늘 보니 세 사람의 궁합이 좋아 보여서요.”

뱀같이 혀를 놀리는 백우경에 호은은 똥 밟은 기분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설마 백우경이 방금 기분 나빠서 저 두 사람 엿 먹으라고 저런 행동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백우경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호수가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다였다.

지금 행동이 계획의 일부인지 아니면 단순한 변심인지 알 수 없어 호은은 그저 김세희와 류윤재를 보며 거절하라고 팔을 들어 엑스자를 만드는 게 다였다.

“신분 노출이 안 되는 거라면 괜찮은데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호은은 황망하게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엑스를 그리고 있는 호은의 팔이 어딘가 처절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잘됐네요. 마침 권호은 씨가 보내주신 의상 콘셉트는 혼자보다 세 사람이 나을 것 같고.”

“이사장님 잠시만요! 세희 씨? 윤재 씨? 정말 괜찮으세요? 지금도 너튜브 영상으로 두 사람 실물이라며 엉뚱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데…….”

인기가 빠르게 상승한 만큼 해당 영상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궁금증은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가이드에게 향했다.

호은 같은 경우에게도 아직 공단에서 인정 기사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존에 운영하던 너튜브를 들킨 것처럼 김세희와 류윤재의 정체 또한 다른 인물로 추측하는 영상과 글들이 제법 올라온 상태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텐데 또 한 번 김세희와 류윤재가 등장한다면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없던 인물도 그 자리에 데려다 앉혀 놓을지 몰랐다.

“그래도 매일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질리고. 신분 공개 안 되는 거면 해 보고 싶어요!”

“저도 영상을 찍으면 또 한 번 어르신들에게 보여 드릴 게 생겨서 좋습니다.”

“이걸로 두 분 다 허락했네요. 물론 해당 건에 대한 보너스는 제대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백우경은 볼일이 끝나기라도 한 듯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그런데 이사장님은 여기 커피 마시러 오신 건가요?”

슬슬 일어나려는 듯 움직이는 백우경에게 호은이 질문했다. 이곳에 접근하며 우연이라고 말했던 백우경이었으나 그의 행동을 봐서는 이 호텔에 올 목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밥을 먹으러 온 것도 아니고 굳이 가이드 공단과 인천 지사와 먼 이곳을 찾아와 한 것이 커피 타임 가지기라니.

“네. 여기 케이크를 좋아하거든요.”

백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웨이터가 그에게 커피와 작은 상자를 건넸다. 크기를 봐서는 조각 케이크나 디저트류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 사람은 백우경에게 나란히 인사를 했다. 완전히 밖으로 나간 백우경을 확인한 호은이 질책하듯 김세희와 류윤재의 이름을 불렀다.

“두 분 모두 너무 경각심이 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에스퍼도 아니고 혹시라도 반정부 눈에 띄면 어떡하려고요!”

“그건 호은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폭 퍼먹던 김세희가 오로지 케이크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호은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야 저는 현장직이니까…….”

“호은 씨. 저희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역시 한 명이 놀리는 것보다는 세 명이 놀리는 게 더 열받을 겁니다.”

류윤재는 얼어 버린 호은의 접시 위에 과일을 내려놓았다.

“둘 다 위험한 거 알면서 도와주겠단 말이에요?”

습관적으로 접시에 있던 과일을 집어 입에 넣은 호은은 신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정신을 퍼뜩 차렸다.

“네!”

“네.”

생각도 못 한 대답에 호은은 멍해졌다. 혼자만 짊어지려고 했다. 같은 가이드여도 현장직이니까. 위험도가 높은 곳으로 온 것은 반강제적이긴 했어도 호은의 선택이었다. 선택하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그 책임을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게 뭐 어렵다고.”

“맞습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화에 여전히 끼지 못한 호은은 입 안에 남은 과일을 느리게 씹었다. 신맛을 사라지고 달콤한 끝맛이 혀를 감싼다.

“두 사람 다 고마워요.”

김세희와 류윤재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호은에게 서로 마주 봤다. 동시에 장난기 있는 얼굴로 바뀐 두 사람은 웃으며 다음에 맛있는 거 사 달라 할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떤 비싼 음식이 있는지 서로 아는 것을 툭툭 던져 대는 두 사람에 결국 호은도 웃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

점심 식사를 끝내고 다시 인천지사로 복귀한 호은은 익숙하게 훈련장으로 향했다. 배연우는 아직 외근 중인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무 업무는 따로 시키고 간 게 없었고 아직까진 호은이 스스로 업무를 찾을 정도의 능력은 없기에 다리 근육이나 키우자고 생각했다.

건물로 들어서는 출입구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정장 차림이 아닌 운동하기 좋은 가벼운 차림의 도인호였다.

“여기서 뭐 해?”

푸른 핏줄이 서 있는 게 유난히 잘 보이는 팔을 붙잡은 호은은 습관적으로 가이드 워치를 확인했다.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안 그래도 아침에 가이딩 시작한다고 말하자마자 껌딱지처럼 호은의 몸에 붙어 있었으니 충분했나 보다.

“잠깐 몸 좀 풀려고요.”

“오늘 일없어?”

“네. 아무래도 팀장님 쪽 일이 늦어질 것 같아서요.”

도인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밥은 잘 먹고 왔어요?”

“응. 다음에 같이 가자. 비싸서 그런지 맛있더라고. 그러고 보니까 이…….”

물 흐르듯 이사장을 봤다는 이야기를 꺼내려던 호은은 서둘러 입을 멈췄다. 이사장 만난 얘기를 하다 영상 촬영 이야기까지 나올 뻔했다. 다행히 도인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호은의 얼굴을 평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렇게 마주친 김에 카페나 갈까?”

도인호가 대답하기 전 호은은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를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훈련장에서 벗어나 카페로 온 두 사람은 음료를 시키고 나란히 앉았다.

“잘됐다. 인호 너도 훈련장에서 훈련할 거면 같이 하자.”

달콤한 초콜릿 프라페를 한 입 먹고 나서야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호은이었다.

“무슨 훈련할 건데요?”

“요즘에는 계속 달리기만 하는데. 추천하는 거 있어?”

“그러면 종아리 쪽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은 어떨까요.”

“아. 훈련장 말고 헬스장 쪽으로 가서 말이지.”

어젯밤 가이딩이 부족했던 것이 충격이었는지 침대에서 잘 때도 틈 하나 없이 껴안고 자던 도인호였다. 오늘 아침에는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 빼고 접촉 가이딩에 집중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 도인호는 호은에게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분명 오늘 밖에서 마주치면 최소 손 잡아 달라고 말할 것 같았는데.’

빨대를 휘적이며 휘핑크림을 섞던 호은은 실눈으로 도인호를 쳐다보다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지구력을 키우려면 근력 운동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좋아. 오늘은 하체 기구로 운동해야겠다.”

“점심에 음식 말고는 할 얘기 없어요?”

얼음이 녹아 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린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기가 아슬아슬한 미끄럼틀 타듯 떨어진다.

의자에 허리를 기대앉은 도인호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의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소리였다.

호은은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땀을 무시하며 빨대를 물었다. 그냥 단순한 질문인 것 같은데 찔리는 게 있으니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든다.

온종일 인천 지사에 있던 도인호가 이사장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 확률은 없었다. 누군가 말을 전달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답을 고민하던 호은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딱히 없는데…….”

“그래요. 낯선 냄새가 묻어 있길래요.”

벽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에서는 재즈풍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알 수 없는 흥얼거림과 적당한 리듬감 있어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호은도 처음에는 음악에 맞춰 상체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메두사의 눈을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까?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춘 호은이 메말라간 입술을 혀로 적셨다.

“웨이터인가…….”

“그런가 보네요.”

“……힉.”

차가운 얼음이 담긴 유리잔을 예고도 없이 얼굴에 갖다 대는 도인호에 호은은 낯선 비명을 질렀다.

“더워 보여서.”

호의를 베풀었다기에는 그늘이 내려앉은 얼굴로 도인호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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