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은 호은은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미로에 빠져나가려고 아무리 벽을 더듬으며 걸어 봤자 도착하는 곳은 출구가 아닌 막다른 벽이었다.
“선을 지키라니…….”
배연우는 에스퍼를 저격하고 한 말 같았으나 정작 저격받은 것은 호은이었다.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확실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최근 자신은 확실히 이상했다.
아직은 단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오해하는 건 도인호가 아니라 권호은 자신일 거다.
“정신 차리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린 호은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선을 그으려고 노력해 보자.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마음을 접어야 해.”
호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의지 받은 게 처음이라서,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 줘서, 맹목적으로 나만 바라봐줘서.
여러 가지 이유가 쌓여 호은의 마음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는 다 자신이 가이드로서 도인호를 폭주에서 도와줬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호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폭주를 막지 않았다면 저 모든 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을 거다.
심장이 아려 오기 시작했다.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감정은 도인호와 같이 있을 때는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혼자가 되면 다시 심연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짝
반정부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를 시기에 사적인 감정을 내세울 여유는 없다. 호은은 자기 뺨을 몇 번 더 때리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자. 도인호가 관심 가지고 있는 건 권호은 자체가 아니라 폭주를 막아 줬던 가이드라는 걸.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은 감정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
숙소로 돌아간 호은은 평소처럼 도인호와 지내다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내일 접촉 가이딩을 할 예정이라 64%인 상태로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후에 별일 없었죠?”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했어.”
평소 자신이 어떤 표정과 행동을 했는지 떠올리며 호은은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원래라면 소파에 앉아 도인호와 사적인 대화를 이어갔겠지만, 오늘의 호은은 부산스러운 몸짓을 이어 가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가죽 소파에 앉자 몸은 분명 푹신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차라리 오늘은 원래 숙소에서 잘 걸 그랬나.
“아니야. 그러면 더 이상해.”
혼잣말을 내뱉은 호은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넓은 집안에 호은이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개인 방 하나가 다였다.
안방보다는 작았으나 꽤 넓은 공간에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탁 트인 거실이나 넓은 안방과 비교하면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인턴 동기들과 연락해 내일 점심 약속을 잡던 호은은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한 거실에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으로 다가갔다. 귀로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지만, 거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내심 도인호가 달라진 자신의 태도에 당황해 얼마 있지 않아 방으로 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밖은 개미 한 마리조차 없는 듯 조용했다.
‘소파에서 잠이라도 자는 건가?’
호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호은은 부엌에 가는 척 문을 열고 나왔다.
집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도인호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하다 했더니 자고 있었구나.’
호은이 안도의 한숨을 뱉으려는 순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도인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인호야?”
도인호에게 한달음에 달려간 호은이 땀을 흘리고 있는 이마를 닦아 줬다. 에스퍼도 감기에 걸리나?
눈을 뜨지 않는 도인호에 어떻게 해야 하나 손을 멈춘 순간이었다. 가이드 워치를 차고 있는 손목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떨어졌어?”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가 39%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호은은 서둘러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
도인호의 오른손을 잡은 순간 열에 데일 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뜨거운 걸 쥐기라도 한 듯한 온도였다. 호은이 잡고 있던 도인호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손을 옮기자 왼손의 온기는 오른손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괜찮았다.
‘아까 봤을 때 분명 64%였는데.’
호은이 도인호의 손을 부여잡은 채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꺼내 도인호의 땀을 천천히 닦아 줬다.
“인호야, 괜찮아?”
도인호의 짙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노란색 눈동자가 반쯤 보였다.
“형. 죄송해요. 혼자서 쉬고 싶으셨을 텐데. 갑자기 몸이…….”
눈을 뜨고 처음 내뱉는 말이 자신의 걱정에 호은은 죄책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숙소에서 최대한 거리두기 해결 방안은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잠깐 떨어졌다고 아파하는 도인호의 모습을 또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야. 내가 옆에 있지 않아서 미안해.”
“…….”
도인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치 애교부리는 고양이처럼 맞잡은 손을 들어 호은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그래도 이렇게 와 줬잖아요.”
부드러운 피부가 손등을 스치자 마음이 붕 뜨기 시작했다. 잡고 있는 손이 뜨거워서 그런지 호은의 얼굴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그래서 오늘은 뭐 했어요?”
와중에 도인호는 호은이 무엇을 했는지 물어봤다. 호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린 아이에게 동화책을 낭독하듯 말했다.
“대리님이 점심에 수육 사 주시고…….”
결국, 평소와 똑같은 레퍼토리가 되어 버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도인호와 일과를 공유하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던 시간 말이다. 그었던 선이 지우개로 몽땅 지워져 버린 상황에 호은은 어쩔 수 없다며 할 말 많은 새처럼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
“현장직은 사람을 얼마나 굴리길래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하하.”
오랜만에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는 인턴 동기들은 호은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다크서클이 반쯤 내려오고 어쩐지 다리에 자아가 없는 듯 흐느적거리며 걷는 호은에게 김세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호은 씨 비타민 같은 거 안 드시면 제가 하나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아침에 가이딩 좀 빡세게 하고 오다 보니까.”
호은은 뭉친 어깨를 손으로 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딩이 부족해 앓았던 도인호를 떠올리자 다시 한번 충격이 느껴졌다.
같은 약을 계속 먹다 보면 효과가 미미해지는 것처럼 가이딩도 그러한 건지 어젯밤 방사 가이딩으로는 부족한 듯한 도인호에게 아침에는 접촉량과 시간을 늘려 가이딩했다.
가뜩이나 오후마다 이어진 체력 훈련에 피로가 쌓였던 호은은 피곤에 찌든 몰골로 인턴 동기들을 만나게 되었다.
“저는 센터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현장직과 비교할 수 없군요.”
류윤재는 들고 다니던 영양제를 기어코 호은에게 건네줌과 동시에 물컵을 내밀었다. 호은은 하는 수없이 영양제를 집어삼켰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에너지가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곳에서 밥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 호텔에서 밥 먹는 거 처음입니다.”
“괜찮아요. 대리님이 맛있는 거 먹으라고 했거든요.”
호은은 배연우가 줬던 카드를 집게손가락으로 잡은 채 흔들었다. 인턴 동기들과 점심 약속을 잡으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호은은 어젯밤 뜻밖의 인물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발신자는 배연우였다. 배연우는 링크 주소를 보냈다. 부연 설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아해하며 주소창을 열자 5성급 호텔 사이트가 열렸다. 점심 메뉴를 추천하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호은은 인천 지사에 직원들이 자유롭게 탈 수 있는 차를 대여한 뒤 인턴 동기들과 해당 호텔로 오게 된 거였다.
“와. 배 대리님 스케일이 크시네요.”
“부럽습니다. 저도 매일 이렇게 호텔에서 먹고 싶습니다.”
“아이고 매일이라니. 저도 평소에는 국밥만 먹는걸요.”
류윤재의 부럽다는 눈초리에 호은이 크게 손을 흔들며 온몸으로 아니라고 소리쳤다.
애피타이저부터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를 먹으며 세 사람은 연신 음식에 감탄했다. 점심을 여유롭게 보내기 위해 세 사람은 반차를 뺏다. 덕분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다 떨며 시간을 보냈다.
“너무 배부른데요.”
“처음에는 양이 적어서 배가 찰까 싶었는데 배부릅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디저트 먹을 배는 있으시죠?”
호은이 두 사람의 대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어 뒤에 있는 사람을 보자 단번에 은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 저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백우경 이사장님?”
“하하. 호은 씨 안녕하세요. 아, 두 분은 저를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 소개를 하자면 가이드 공단 이사장 백우경이라고 합니다.”
백우경의 이름을 부른 호은과 다르게 김세희와 류윤재는 벙찐 얼굴로 있다가 이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백우경을 처음 보는 두 사람은 이사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설마 합석할까 싶어 불안한 얼굴이었다.
가던 길 가시라고 외치는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자연스럽게 호은의 옆에 착석한 백우경은 웨이터를 불러 디저트류를 주문했다.
다 먹은 접시로 가득했던 테이블이 빠르게 정리되더니 어느새 디저트와 음료로 재배치되었다.
“이사장님이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그냥 단순한 우연입니다만.”
세 사람을 대표해 호은이 질문하자 백우경은 호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었다. 자리에 한 사람이 추가됐을 뿐인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썰렁해졌다. 당장이라도 옆에 펭귄이 있을 것만 같은 추위가 느껴졌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권호은 씨가 보낸 의상 콘셉트 확인했습니다.”
“아 네…….”
“어? 무슨 의상이요?”
백우경이 자연스럽게 호은에게 말을 건네자 해당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건지 김세희가 발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런. 동기들은 모르나 보네요? 가이드 검진 홍보 영상을 제작하기로 했거든요. 텔레비전에 나갈 광고용으로다가.”
“가이드 검진 말입니까?”
류윤재 또한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호은은 이상하게 흘러가는 대화 흐름에 찝찝한 표정으로 백우경을 쳐다봤다.
“네 맞아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검사를 받고 가이드가 되신 건 아니잖아요? 다른 검사를 하고 또 에스퍼를 만나 가이딩이 들어오나 안 오나 확인하고.”
“음. 확실히 번거롭기는 했어요. 처음에는 사기꾼들이 모인 사이비 회사인 줄 알았는데.”
김세희가 해맑게 가이드 공단을 욕하자 사람 좋은 얼굴을 짓고 있던 백우경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이비……?”
“아. 저는 다단계 회사인 줄 알았습니다. 마을 어르신들도 처음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류윤재가 이번에는 다단계설을 제시했다. 호은은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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