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어제와 다르게 배연우는 밥 먹는 호은에게 말을 걸기보다는 고기를 권유해 주는 등 조용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턱을 괴고 호은이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빠르게 음식을 비어가고 있었다.
월급에 반은 식비로 나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로 계속 밥을 추가하는 호은을 보던 배연우의 이마에 점점 사거리 마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정도 먹었으면 배부를 것 같은데.”
“오늘은 좀 배가 많이 고파서요.”
얼마 남지 않은 수육을 보고 배연우는 테이블 우측에 있는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했다. 수육 대자 하나 더 추가하고 애써 참을 인(忍)을 손바닥에 적어 나갔다.
인간이란 참 간사한 존재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문장을 만든 사람에게 ‘좋아요’ 버튼을 눌러 주고 싶은 배연우였다.
상처받은 말을 내뱉은 것도 본인이고 사과의 의미로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자 한 것도 본인이면서 야무지게 밥을 먹는 호은을 보니 괜한 걱정을 한 건 아닌가 허무하기까지 했다.
“넌 현장직 들어와서 다행이다.”
“네?”
“식비 장난 아니게 들겠어.”
호은은 입 안에 있는 걸 마저 삼키며 자신의 옆에 놓인 빈 그릇을 확인했다. 평소의 호은이라면 일반인과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적당히 먹었겠지만,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미처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했다.
마지막 한 숟가락을 야무지게 수저로 긁어모아 입에 넣은 호은은 마침내 수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대리님, 감사합니다.”
물을 마시던 배연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밥을 다 먹고 나서 하는 말이 감사 인사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꿍했던 표정을 풀며 배연우가 눈썹을 까닥였다.
“고기 먹으니까 힘이 납니다.”
“참 나, 어차피 법인 카드로 사는 거거든. 나한테 감사 인사하지 마.”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은 배연우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얼굴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호은은 대리님이 참 새침데기라고 생각했다.
***
인천 지사로 돌아온 배연우는 훈련장에 10분 뒤 오라고 명령했다.
어제와 다르게 주어진 쉬는 시간에 호은은 혹시 몰라 챙겨왔던 훈련복을 갈아입었다. 지난번 체력 검정에 나눠 줬던 옷으로 편안한 트레이닝복 세트에다 운동화를 신으니 버프를 받은 듯 잘 움직일 자신이 생겼다.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호은과 다르게 배연우는 출근했던 복장 그대로였다. 가진 자의 여유라는 것이 저런 모습일까.
“스피드 훈련은 이번 주 안에 마스터하자.”
“스피드 훈련 끝나고 나면 또 다른 훈련 하는 건가요?”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서 무기를 다루는 법과 체술은 필수야.”
“뭔가 특수 요원이 된 기분이에요.”
“비슷해.”
길쭉한 팔다리를 들어 스트레칭한 배연우는 준비됐다는 듯 호은을 쳐다봤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훑어 지나갔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호은은 호흡을 조절했다. 오전에 봤던 가이드의 무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위험한 현장을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죽는다.
현장직이 된 순간 원하지 않는 죽음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절교도 불가능한 친구라 알아서 따돌려야 했다.
잡생각을 멈추듯 호은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트레이닝복의 효과인지 오늘따라 몸이 가볍다.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에 호은은 이를 앙다물었다. 산소를 갈망하는 폐와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종아리를 애써 무시했다.
-펄럭
미세하게 와이셔츠 자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배연우가 뒤에 있는 듯했다. 손을 뻗어 뒷덜미를 잡으려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꼬리잡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달리기를 이어갔다.
바로 뒤까지 쫓아온 배연우는 손을 뻗었다. 확실히 호은은 어제보다 빨라졌지만, 여전히 속도로 비교하자면 배연우가 한 수 위였다.
일반인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정도의 체력소모로 페이스를 조절하던 배연우가 봐주는 것을 멈추려는 듯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어제는 자신이 방심해서 놓쳤을 뿐 오늘은 그런 실수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며 옷을 붙잡으려는 순간, 바로 뒤까지 쫓아온 기척을 느낀 호은이 순식간에 궤도를 이탈했다.
“!!!”
평지가 아닌 벽을 밟아 점프한 호은은 훈련장 외벽에 있던 담을 넘어 위로 도망쳤다.
놀란 표정의 배연우는 아래에서 호은을 올려다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호은이 그대로 달렸다면 분명 잡혔을 거다. 하지만 호은은 파크루를 통해 위치를 변경했다.
파크루란 주위 지형이나 건물, 사물을 이용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곡예 활동이다. 일반인 중에서도 지구력과 체력이 좋고 건물 지형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소수의 사람만 할 수 있는 스킬 중 하나다.
학교 다녔을 때조차 담을 넘어 본 적 없는 호은이 아슬아슬하게 담 위에 올라탔다. 훈련장 레일에서 담으로 경로를 이탈한 건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그대로 쭉 달렸으면 자신은 분명 배연우에게 잡혔을 거란 확신이 들었었다.
시원한 바람이 호은의 젖은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호은은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배연우를 내려다봤다.
‘성공했다!’
호선을 그리듯 호은의 입술이 올라갔다.
“내려와.”
“넵.”
“한번 성공한 거 가지고 실실 웃지 말아라. 그렇게 웃으면 현장에서는 바로 아웃이야.”
칭찬을 기대했던 호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담에서 내려왔다. 한 번 성공한 주제에 으쓱거린 모습이 배연우가 봤을 때는 한참 부족한 놈이 잘난 척 기고만장하게 보였나 보다.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뭐 그래도 제법…….”
호은이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배연우를 훔쳐보자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있던 배연우의 광대가 올라갔다 바로 내려왔다.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지자 웃고 있을 거로 예상했던 배연우가 무표정으로 호은을 쳐다봤다.
“제법 내가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난가 보네.”
“하하…….”
제법이라고 말하는 줄 알고 순간 기대했던 호은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어쩐지 머리카락도 축 처져 보인다. 그 모습에 괜히 바늘로 가슴이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은 배연우였지만 칭찬보다는 독설을 내뱉는 게 자신의 교육 방식이었다.
“정신 차려.”
호은은 이마 한가운데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배연우가 호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맞은 부위가 붉어짐과 동시에 부풀어 올랐다. 호은은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지금부터 속도 기록 단축하는 연습할 거니까 준비해.”
옷 안에 숨겨져 있던 호루라기를 꺼낸 배연우가 입에 물었다. 삑- 시끄럽게 공간을 채우는 호루라기 소리에 호은이 서둘러 스타트 지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시간 가까이 자신의 최단 시간을 단축하던 호은이 이제 더는 못 뛰겠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호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배연우는 가지고 왔던 탭에다가 호은의 기록을 정리하며 줄어든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단축하고 숨 참는 시간은 증감됐다. 하루 만에 이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은 처음 봤다. 배연우는 감탄이 나와 입이 절로 벌어졌다.
“대리님. 저 이제 못 뛰어요…….”
앓는 소리를 내는 호은을 본 배연우는 고민하는 척 허리에 손을 올렸다. 원래 같았다면 바로 휴식 시간을 줬을 텐데 자신이 말하기 전 힘들다고 말하는 호은에게 기분 좋게 주려던 게 망설여졌다.
과거의 자신은 불평불만을 속으로 삼키고 말았는데 요즘 애들은 바로 입 밖으로 내뱉는 것 같다.
“한 번 더.”
싸늘하게 명령하는 배연우에게 호은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 달려야 했다.
마지막 바퀴를 돌고 드디어 휴식을 얻어 낸 호은이 벤츠에 앉아 쉬고 있자 배연우가 카드를 내밀었다.
“인턴 동기들이랑 먹고 싶은 거 먹어.”
“네?”
“밥 사 먹으라고.”
평소 배연우가 내밀던 카드는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배연우가 내민 카드는 검은색 카드였다. 두 손으로 카드를 받은 호은이 이름 부분을 확인하자 영어로 배연우라 적혀 있었다.
법인 카드가 아닌 개인 카드였다.
“감사합니다.”
호은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배연우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을 신발로 쳤다.
저게 바로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걸까. 따듯한데 차갑다. 양면이 다른 색종이를 접는 것처럼 휙휙 태도를 바꾼다.
‘아니 태도 자체는 한결같은가.’
호은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인턴 동기들에게 연락했다.
안 그래도 홍보 영상에 협조해 줘서 밥을 한번 사야 했는데 카드를 받자 생각이 났다. 다들 바쁘지 않았던 건지 답장은 금방 왔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뭉친 목을 움직이던 배연우는 가이드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호은도 누웠던 몸을 일으킨 뒤 바지를 털었다.
가이드가 되어서 한 가지 좋은 점을 뽑자면 대체로 근무 시간이 여유롭다는 것이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을 때는 9시에 출근하긴 하지만 자율적으로 주 40시간만 채우면 되기에 큰일이 없을 땐 보통 이렇게 일찍 끝난다.
“아. 내일 오전에 나랑 남운수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너도 그 시간에 도인호 가이딩이나 하고 있어.”
훈련장을 벗어나며 가볍게 던진 배연우의 말에 호은은 걸음을 멈췄다. 도인호랑 단둘이…….
“너 갑자기 얼굴이 왜 빨개지냐.”
“네?”
호은은 손등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화끈한 열기가 피부에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말했어?”
“어떤…….”
“촬영하는 거 말이야.”
배연우는 얼빠진 얼굴의 호은을 감상하다 눈썹을 모았다. 아침에 상담할 때는 언제고 저 얼굴을 보아하니 새까맣게 잊었던 게 분명하다.
“아침에 제대로 답 못 해 준 것 같은데 파트너로서 의사소통이면 고민할 필요 없잖아.”
“그……렇죠?”
“그런데 네가 이렇게 고민할 정도면 도인호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거냐?”
호은은 대답을 망설였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배연우의 질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도인호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호은이 노출되면 당연히 파트너인 도인호 또한 위험도가 올라가니까. 그럼 호은은 폐를 끼치는 거나 다름없다.
“내가 늘 신입 가이드에게 하는 말이 있지. 에스퍼랑 선 제대로 지켜.”
“…….”
“안 그러면 오해하거든. 가이드도 자기랑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배연우의 말은 어려운 수학 시험 같았다. 1번 문제가 어려워 2번을 봤더니 이것 또한 풀지 못하는 문제였다. 안 그래도 수학을 가장 싫어해서 문과를 선택한 호은이었다.
배연우가 내뱉은 말은 한국어를 가장한 숫자일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한국인인 자신이 어째서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가자.”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생각 감옥에 빠져 있던 호은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다 빠르게 사라진 배연우의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덕분에 조금 전 올랐던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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