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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53화 (53/129)

53화

“일단 머리 좀 식히고 들어와라.”

배연우는 기분이 가라앉은 호은을 한번 보고는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호은은 잔디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숲속과 다르게 우거진 나무가 없어 하늘이 잘 보였다.

푸른 하늘과 선명한 햇빛을 똑바로 바라보던 호은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엄마 보고 싶네.”

스물다섯이나 먹어 놓고 엄마가 보고 싶다니. 제가 말하고도 웃겼다.

호은은 팔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회사 생활 더럽게 하기 싫다. 분명 언젠가는 해야 했던 일이었겠지만 그 선택지에 가이드는 없었다.

시야를 가렸던 팔을 하늘로 뻗다 손가락 사이로 햇살이 비춘다. 아침에 붕 떴던 마음이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새로운 감정에 혼란스러워한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보다 지금 있는 공동묘지에 어울리는 죽음이라는 공포라는 것부터 느껴야 했던 건데.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한 달이나 의식불명 상태로 있어서 경각심이 사라졌던 걸까.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 또 내가 아닌 가족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제해 버렸다.

죽음을 감당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뻗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자 배연우가 물고 있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분명 주머니에 넣는 걸 봤는데 안 들어갔나 보다.

호기심에 담배를 입에 물자 불을 붙이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바스락.

잔디 밟히는 소리에 호은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숲속 길에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진 인영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도인호였다.

“…….”

어떻게 알고 왔는지 궁금증이 들었지만,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코앞까지 걸어온 도인호는 가만히 잔디에 앉아 있는 호은과 시야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혔다.

그는 마치 예술 작품이라도 감상하듯 호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시선은 점점 내려가 마침내 입술에 물린 담배에 닿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피우려고요?”

질문의 의도는 순수했다. 책망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했다. 호은은 여전히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과 생각 전환용이었다.

도인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턱 바로 아래에 위치한 손바닥에 호은은 망설이다 입술을 열었다.

툭, 하고 잇자국이 난 담배가 떨어졌다. 괜히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변명이 먼저 나왔다.

“답답해서 한번 물어봤어. 피우면 생각이 좀 날아갈까 싶어서.”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답을 듣고 호은은 비소를 지었다. 이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의 문제를 어느 누가 대신 풀어 준단 말인가.

괜찮다며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호은은 도인호의 입술에 삼켜 말을 잇지 못했다.

“읏.”

호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도인호가 담배가 물려 있었던 예쁜 입술을 가볍게 삼켰다. 부드러운 촉감의 입술을 짓이기다시피 이빨로 깨물다 이번엔 입 안에 숨어 있는 혀를 꺼내 물기 어린 소리를 만들어 낸다.

호은은 마음마저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한 시선을 보내는 도인호의 눈을 피해 자신의 두 눈을 감았다. 답답한 걸 해소하게 해 주는 줄 알았더니 무한한 생각을 멈추게 해 주는 걸 도와준단 소리였나 보다. 머릿속에 도인호의 키스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묘지에서 키스라. 조금 전까지 죽음을 떠올리던 호은에게 딱 맞는 오싹한 키스였다.

틈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달라붙어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두 사람은 결국 호은이 숨에 차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호은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도인호의 입술은 침으로 번들거렸다.

“갑, 갑자기 키스하면 놀라잖아.”

부끄러움이 물밀듯 쏟아지자 호은은 자기 입술도 똑같이 젖어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고 서둘러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담배보다는 낫잖아요.”

“뭐?”

“건강 나빠지지도 않고. 생각도 날아가고. 형을 위해서 한 건데……. 죄송해요. 제가 생각한 방법이 고작 이런 거라…….”

“윽…….”

오랜만에 보는 우울 모드 ON이었다. 스위치를 켜듯 갑자기 땅굴을 파려고 하는 도인호의 모습에 호은은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다가오는 도인호의 키스를 피하지도 않고 허락한 자신도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울듯 물기가 차오르는 도인호에 자책보단 그를 달래 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호은은 결국 도인호의 등을 껴안아 쓰다듬었다.

“아니야. 고마워.”

“정말요?”

“응. 정말로. 그래도 키, 키스는 가이딩할 때만 하자.”

안심한 듯 표정을 풀던 도인호가 다시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도인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기겁할 모양새였다. 밖에서는 무표정만 짓는 그가 호은의 앞에서만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했다.

“죄송해요.”

안아준 걸로 우울 모드는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도인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혼자서 10년이란 시간을 버티다 보니까……. 남을 위로하는 방법도 잘 모르고.”

호은은 도인호를 품에서 살짝 떨어트렸다. 보이지 않았던 얼굴을 보자 눈가가 발갛다. 도인호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에 가득 차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난 형이 키스해 주면 기분 좋아져서 위로해 주려고 한 건데.”

“아…….”

“형은 싫었어요?”

“그건 아닌데.”

정말로 싫었다고 하더라도 호은은 울기 직전인 도인호의 앞에서 부정적인 말을 내뱉지 못했을 거다. 가이딩이 아닌 스킨십에 혼란스러웠다. 에스퍼는 어떨지 몰라도 가이드인 호은에게 스킨십이란 기분 전환 용도로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 미워하지 마요.”

호은은 숨을 멈췄다. 도인호의 볼 한쪽에 툭 떨어진 그건 눈물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자던 다짐이 파도에 부딪힌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지만, 도인호의 눈물을 본 순간 누군가 천벌 받을 거라 윽박지르는 환청이 들렸다.

지금의 도인호는 호은보다 신체적으로 클진 몰라도 그 속은 작았다. 평소에 무심한 성격도 이 순간만큼은 연약하기 짝이 없어 당장 보듬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호은은 허둥거리는 몸짓으로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부산스러운 손짓은 도인호의 얼굴을 감싸는 거로 멈췄다. 호은은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여전히 물기로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 너 안 미워해.”

“……이건 가이딩이에요?”

“으음, 나도 너 위로하려고.”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호은은 금방 떼어 냈던 방금과 다르게 이번에는 제법 길게 도인호의 입술을 포갰다 뗐다. 자신의 혼란보단 역시 도인호의 상처받는 마음이 중요했다.

“이제 가자. 너무 오래 농땡이 피웠어.”

후끈거리는 열기에 호은이 잔디 묻은 바지를 털며 자리에 일어섰다. 도인호는 말캉한 것이 닿았던 입술을 매만지며 비틀린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그런데 여기 어떻게 왔어?”

숲을 빠져나가며 도인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을 던지자 옆에 나란히 걷던 도인호가 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다 봤어요. 형이 숲속 들어가는 거.”

도인호의 시선이 호은의 목으로 향했다. 대답을 끝낸 도인호는 언제 멈췄냐는 듯 긴 다리를 성큼 움직여 호은의 옆자리로 찾아갔다.

“우연이네.”

호은은 걷는 와중에도 옷에 흙이나 잔디가 묻지 않았는지 살피느라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궁금했던 감정은 우연이라는 요소에 사그라들었다. 인천 지사가 크긴 하지만 숲속은 공원 쪽에 있다 보니 지나가다 충분히 마주칠 수 있는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본관으로 이동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호은이 의아하다는 듯 도인호를 보며 오늘은 여기서 근무하냐 묻자 도인호는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외근 중에 잠깐 들른 거라 다시 나가 봐야 해요.”

“아 정말? 미안하네.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뺏긴 것 같아서.”

“아니에요. 형이 우선이죠. 그러면 이따가 봐요.”

멀어져 가는 도인호에게 손을 흔들어 가며 배웅하던 호은은 무언가를 잊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아 맞다. 촬영…….”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진 도인호를 찾기 위해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던 호은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이 먹으니 치매가 오는 건가.’

도인호 얼굴을 보자마자 해야 했던 말을 새까맣게 잊어 먹고 말았다.

맑은 하늘과 다르게 우중충해지는 호은의 마음속 날씨는 오늘 하루 소나기와 벼락이 내리칠 거라 예보했다.

***

사무실로 복귀한 호은은 배연우가 안내해 준 대로 가족 신변 보호 요청 서류를 제출했다.

“기이드 가족이 피해 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긴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협회에서도 반정부 건이 끝날 때까지 24시간 보호 관찰할 거야.”

“네…….”

호은의 뒷자리를 서성이던 배연우는 헛기침을 뱉더니 책상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에는 과자부터 시작해서 소시지와 구운 달걀 또 달콤한 간식거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너 먹는 거 좋아한다면서. 워, 원래 있던 건데 난 안 먹으니까 주는 거야.”

원래 있던 거라고 하기엔 마치 슈퍼에서 방금 담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호은이 상자를 바라보고 있자 배연우도 덩달아 상자를 쳐다봤고 미처 빼지 못한 영수증을 발견하고 잽싸게 꺼냈다.

“D등급 가이드 중에서도 가장 싸움 잘하는 놈으로 훈련 시켜 줄 테니까. 각오해라.”

배연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빠르게 자리로 돌아갔다.

호은은 상자에 있던 막대사탕 껍질을 까 입 안에 넣었다. 상큼한 레몬 맛이 입안 가득 채운다. 우물우물 사탕을 입에 굴리던 호은은 조용히 웃었다.

배연우 대리는 호수와 말투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해 보였으나 알고 지내다 보니 전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수는 말투는 험한 주제에 얼굴은 선한 천사 같지만 배연우는 입과 표정 둘 다 험했다. 그리고 챙겨주는 것도 호수는 조금 더 자신을 찬양하라며 표현하는 반면 배연우는 그런 행동을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상자를 책상 안쪽에 놓자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급하게 나가느라 어지럽혀진 서류를 다시 정리한 호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짐한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하는 일종의 습관 같은 거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잠깐 미루고 오로지 권호은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반정부가 일반인을 공격하기 전에 잡으면 그만이다.

지금부터 최고의 미끼가 무엇인지 보여 줄 것이다. 호은은 비서실장에게 온 메신저에 답장을 보냈다.

메신저와 인수인계 사항을 다 검토한 호은은 배연우의 자리로 갔다. 타이밍 좋게 점심시간이었다.

“대리님 식사하러 갈까요!”

“그래. 오후에 몸 써야 하니까 고기 먹자. 수육 기가 막히게 하는 곳 있거든.”

원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호은을 보고 배연우는 남몰래 한숨을 뱉었다.

요즘 애들이라 그런지 정신이 해이한 것 같아 따끔하게 한마디 한 건데 생각보다 상심한 모습이 커 보였다. 저러다 이번 임무 끝나면 현장직 말고 다른 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말할까 괜스레 노심초사했다.

점심때 맛있는 걸로 잘 달래 줘서 현장직이 마냥 안 좋은 곳은 아니라 타일러야겠다고 생각하는 배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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