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잘생긴 사람은 역시 위험하다. 집에서 나와 출근하기 위해 거리를 걷던 호은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나도 이 정도인데.”
시폭이라는 별명에서 멀어지고 민원부 직원이 도인호를 좋아했던 만큼 가이드들이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연애는 금방 할 것 같았다.
괜히 어제 각인이라는 단어를 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뒤숭숭하다. 분수에 맞지 않은 처지라 도인호를 상대로 각인을 생각하진 않지만, 호은 또한 가이드이니 다른 누군가와 각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내 연애인데. 여기서 눈 맞는 게 가능한가?”
당장 떠오르는 건 레오와 최유빈이었지만 그 둘을 제외하고는 에스퍼와 가이드인 커플을 마주치지 못했다. 인천 지사에 사내 커플이 적어서 그런 건지. 애초에 각인까지 가는 경우가 드문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어떤 이유든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에게 야릇한 감정을 가지는 건 멈춰야 할 것 같았다. 평생 책임져 달라 했지만. 그건 마치 다섯 살 아이가 ‘엄마랑 결혼할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30분이나 미리 일찍 온 호은은 숙소에서 입력하지 못한 체크 리스트를 마저 이어서 작업했다.
“일찍 왔네.”
“안녕하세요.”
호은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우렁찬 목소리에 배연우는 어딘가 질린 표정을 짓더니 귀를 막으며 자기 자리로 빠르게 걸어갔다.
“권호은.”
9시가 되자 배연우는 자리에서 호은을 호출했다. 어제보다 조금 덜 긴장한 상태의 호은이 수첩과 볼펜을 들고 배연우의 자리로 걸어갔다.
“정직원 계약서다. 형식적인 거긴 해도 내용 확인하고 서명 부분에 이름 써서 나한테 다시 줘.”
“넵.”
배연우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 다시 자리로 돌아간 호은은 빳빳한 재질의 종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정직원 전환 근로 계약서는 입사 때 받았던 계약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몇 가지 추가된 조항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틀은 하나였다. 가이드 공단에 속하여 이능력자 협회 에스퍼에게 협력한다.
“협력이라.”
호은은 볼펜을 들어 서명란에 이름을 기재했다. 두 번째 계약서는 처음과 다르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연봉이 오르면 그때는 좀 다르려나.
“대리님. 여기요.”
망설임 없이 서명을 다 채운 호은이 근로 계약서를 건넸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받은 배연우는 물물 교환하듯 다른 서류 뭉치를 호은에게 주었다.
“이건?”
“인수인계 사항이다. 초등학생도 이해하기 쉽게 해 놨으니까 머리에 입력해 놔.”
“넵.”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받아 온 서류 뭉치를 책상에 어질러 둔 호은은 한숨을 뱉었다. 왜 이렇게 양이 많아.
“일하기 싫다.”
퇴사할 수 없는 회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격하게 퇴사하고 싶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서류 뭉치가 많은 인수인계 자료는 사내 홈페이지와 회사 자체 프로그램 이용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연월차부터 필요한 물품을 신청하는 것까지 제법 체계 잡힌 시스템에 호은은 기능을 하나씩 따라 해 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선생님 이거 해 주세요! 한마디만 하면 됐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 직장인이 되니 문서의 연속이다.
-지이잉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서류와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보던 호은은 핸드폰 진동과 동시에 화면에 메신저 알람이 뜨는 걸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가이드 공간 이사장님 직속 비서 실장입니다. 가이드 검진 홍보 촬영 관련으로 연락드립니다…….]
“아.”
미리보기로 메시지의 내용을 읽은 호은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가이드 공단 이사장과 촬영을 약속했던 게 뒤늦게 생각이 났다. 그렇단 말은 다시 한번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형을 알아보는 게……. 뺏기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도인호의 목소리에 호은은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큰일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다며 달래 주었는데 검진 촬영하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권호은의 얼굴이 팔리는 거다.
그 영상을 보고 도인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조차 안 됐다. 미리 언급도 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화를 낼지도 모른다.
“너튜브 영상도 참아 줬는데, 제가 이것도 참아 줘야 하나요? 실망입니다. 거짓말쟁이인 권호은 씨와 더 이상 같이 일 못 하겠네요!”
망상 속 도인호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간다. 아니야! 일부러 말 안 한 게 아니야! 변명하고 싶어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도인호에게 호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조상님들의 옛말이 틀릴 거 하나 없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촬영 제안을 받은 당일 말했으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을 거다.
‘아니 적어도 어제라도 말했다면…….’
아무리 후회를 해 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호은은 자책하는 걸 멈추고 메시지를 열었다.
[안녕하세요. 가이드 공간 이사장님 직속 비서 실장입니다. 가이드 검진 홍보 촬영 관련으로 연락 드립니다. 촬영 일자는 x월 x일 진행 예정입니다. 촬영 콘셉트안과 대본은 첨부 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추가 문의 사항이 있다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대본?”
첨부 파일을 내려받자 촬영 콘셉트, 스타일링, 멘트가 있었다. 길지 않은 문장이라 굳이 미리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업무 중 딴짓?”
“헉, 대리님.”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은이 고개를 들었다. 꾸짖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단순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연우였다.
“대리님……. 저 상담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싫어.”
“홍보부랑도 관련 있습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호은이 쳐다보았다. 저 얼굴을 거절할 수 있는 건 냉혈한이라도 무리였을 거다. 배연우는 짜증이 묻어난 얼굴로 어쩔 수 없다며 의자를 가져와 호은의 옆에 앉았다.
“홍보 영상 연장선으로 백우경 이사장님이 가이드 검진 촬영 제안을 주셨는데요.”
“그거 보고 반정부가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네.”
“그렇죠. 빨리 찾아오면…… 이 아니라. 도인호 에스퍼한테 촬영한다고 말을 못 했어요.”
“그게 뭐.”
“사실 지난번 홍보 영상에서도 제 얼굴 안 나오길 바랐는데. 어쩌다 보니 정체가 들켰고.”
“…….”
“이번에 촬영하는 걸 알면. 아니 이미 찍기로 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뭐야 너.”
배연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너희 둘이 사귀냐? 그래서 애인 눈치 보는 거야?”
“네? 아니요. 그런 관계 아닌데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회사에서 까라고 하면 까는 건데. 연인도 아닌데 그런 거 하나하나 미리 말해 줘야 해?”
“파, 파트너니까. 의사소통은 당연히 해야죠.”
“야 인마. 파트너다 뭐다 보다 같은 부서 대리한테 먼저 이 사항을 알려 줬어야 했던 거 아니냐?”
“아.”
어리바리한 목소리를 뱉으며 호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도인호뿐만 아니라 팀원들한테도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호수와 같이 있었던 자리라 무의식중에 팀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빠트린 것 같다.
“저 그런데. 대리님은 혹시 남연우 팀장님이랑.”
“뒈질래.”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사귀냐고 물어보려고 한 거잖아.”
“크흠. 그렇긴 한데요.”
“우린 그런 거 아니야. 뭐 가이드랑 에스퍼랑 연애하는 게 아예 없는 일은 아니긴 하지만.”
배연우는 탐탁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현실을 보면 안 만나는 게 현명해. 다른 회사는 헤어지면 퇴사라도 하지. 여긴 부서 이동밖에 답이 없고.”
“그렇죠. 헤어지면…….”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단 가족들 신변 보호 신청부터 해.”
“신변 보호요?”
“지금은 호켓이라는 너튜버랑 동일 인물이다 아니다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얼굴까지 까고 나오면 네가 권호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잖아. 반정부가 바보도 아니고. 뒷조사 들어가겠지.”
배연우의 말을 정리하면 가족의 정보가 유출되어 그들이 위협당할 수도 있다는 걸로 해석됐다. 입사하고 나서 한반도 가족에 대해 걱정을 해 본 적 없어 해당 맥락을 이해하자마자 호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현장이 그 정도로 위험다고요?”
“너 도대체 현장직을 뭐라고 생각한 거냐.”
배연우는 험악한 표정으로 권호은의 넥타이를 끌어당긴 채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까지 수다 떨었던 사람이라고 생각 못 할 반응이었다.
느리게 따라가다간 넥타이에 목이 졸라질까 봐 호은은 배연우의 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
인천 지사 공원의 가장 안쪽에는 숲속 길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입구 쪽부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해당 공간은 술 먹고 정신없는 상태에서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느낌이 가득했다.
발이 무거워져 여기서부터는 정말 따라가고 싶지 않았던 호은이었지만 배연우의 굳은 옆태에 군말 없이 숲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얼마나 오래 산 건지 높기도 높고 나뭇잎 또한 우거져 햇볕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숲길에 처음 느꼈던 두려움은 어디 갔는지 호은은 풀 내음을 만끽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
얼마나 걸었을까. 팽팽하게 잡혔던 넥타이가 힘없이 툭 떨어진다.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을 앞으로 돌린 호은은 뻥 뚫린 공간에 잠시 숨을 멈췄다.
“여기는…….”
넓은 들판에 숫자로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현장에서 죽은 가이드 무덤이다.”
“…!”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 잠깐 멈춰 서 있던 배연우는 중간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 사수 무덤이야.”
“아…….”
“생각보다 많이 죽었지. 괴물 같은 신체를 가진 에스퍼랑 다르게 가이드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죽기도 쉬워.”
배연우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차마 불을 붙일 수는 없었는지 필터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가이드가 귀하다 보니 회사에서도 어떻게든 가이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장은 언제 어떻게 뒈져도 이상하지 않거든. 네가 돈 때문에 현장직을 들어온 거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 상관없는데 말이다.”
배연우는 물고 있던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네가 말한 현장직 보람에 네가 죽고 네 가족이 죽는 희생도 포함되어 있냐?”
질문은 비수가 되어 호은의 심장을 꿰뚫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고자 입술을 달싹였지만, 단어는 퍼즐이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희생이라.’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는 건 도인호를 구하려던 순간 각오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가족이나 주변인에 대한 희생은 생각한 적 없는 호은이었다.
“여태까지 머리 꽃밭으로 살았구먼.”
“…….”
날이 선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호은은 떨리는 숨결을 애써 숨기고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이 불어왔다. 어딘가 공허하고 외롭다고 느껴졌다면 그건 착각이었을까.
“가족 신변 보호 어디서 신청하나요.”
호은이 내뱉을 수 있는 문장은 겨우 저게 다였다. 상처를 주는 배연우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다른 문장은 만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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