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숙소로 돌아가 피자를 먹으며 두 사람은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도인호는 현재 남운수와 함께 에스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조사하고 있다 알려 줬다.
“에스퍼 의심자가 정확히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야?”
“정식 에스퍼로 등록이 안 된 사람 중 1차 발현이 끝나고 2차 발현이 진행되려는 자를 의심자라고 부릅니다. 2차 발현이 끝나면 에스퍼 등록해야 하거든요.”
“발현?”
“일반인보다 신체적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1차 발현자라고 합니다. 물론 정말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일반인일 수도 있지만 기이할 만큼 상처 회복과 강한 신체 능력을 갖춘 자들이기에 1차 발현자는 곧 2차 발현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2차 발현은 뭔데?”
“이능력 각성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에스퍼는 자신의 이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데 2차 발현은 의지와 상관없이 능력이 써진다고 하네요.”
같은 에스퍼면서 마치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듯 도인호는 말했다.
“2차 발현 예정인 사람들 추리고 나면 그때 인사부와 같이 협력할 것 같습니다.”
“홍보부 일을 하면서 여러 부서를 만나는 것 같네.”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호은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손을 닦고 노트북을 가져왔다.
“오늘 배운 거 해야지. 에스퍼 체크 리스트.”
체크 리스트 양식을 열어 놓은 호은은 가이드워치를 확인했다.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를 적어 놓고 빈칸을 차곡차곡 채워 나갔다.
[의존 상태]
마지막 칸에 있는 단어를 보고 호은은 잠시 멈췄다. 1부터 5 사이의 숫자를 입력하면 되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의존증이 심하단 뜻이었다. 망설이는 손가락은 자판을 입력하지 못해 어정쩡하게 키보드 공중으로 부양하고 있었다. 입력하는 걸 멈춘 호은은 노트북을 닫았다.
“……?”
뒷정리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도인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건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눈동자가 호은에게 닿는다. 미세하게 살짝 올라간 눈썹은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호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뒷정리를 도왔다.
***
오랜만에 몸을 써서 그런지 여기저기 쑤셔 오는 몸에 호은은 가볍게 샤워를 하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욕실에 갖춰진 화장대를 열자 도인호가 산 건지 입욕제로 보이는 것도 있어 물에 풀자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하아.”
탕에 들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신음이 나왔다. 호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수도꼭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시야를 가렸다는 이유 하나로 크게 들려왔다.
“……의존증이라.”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욕실 조명이 눈을 자극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조명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호은은 물장난을 쳤다. 가득 찬 욕조의 물이 움직이는 손으로 인해 출렁거린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존재는 어떤 걸까?’
한때 호은은 자신이 가이드란 이유로 신처럼 행동하려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정말 이불 발차기 킥을 몇 년은 더 해야 할 것 같다.
가이드는 결단코 신이 아니다. 고통받는 에스퍼를 도와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신적인 영역은 아닌 거다. 그걸 알려 준 건 다름 아닌 도인호였다.
‘저는 죽고 싶습니다.’
저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가고 마치 그 장소에 다시 간 듯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결정체를 남겨야만 가치가 있다고 도인호는 미련없는 얼굴로 말했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도인호는 가이드에 대한 의존증 같은 걸 느낄 에스퍼가 아니었다. 가이딩 연습을 위해 붙어 있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똑똑
“호은 형.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어어. 잠깐 반신욕 중이야!”
평소보다 욕실에 오래 있자 문 너머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은은 재빨리 대답했다. 1초라도 늦게 대답했으면 문을 열려고 했던 건지 아래로 내려간 손잡이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건 역시.”
과보호 느낌이 살짝 있는 것 같은데. 단계로 치면 2단계 정도 되려나. 이 기준을 일반인이 아닌 에스퍼의 시점으로 봐야 하다 보니 기준이 불명확하다.
호은의 경우 그냥 가이드도 아니고 폭주로 죽을 위기인 에스퍼를 구해 준 가이드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도인호의 닫혔던 마음은 열렸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려고 하는 건지는 몰라도 스스로 폭주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의 우중충한 도인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삶의 의지가 확고해 보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정체가 아닌 자신은 가치가 없다고 했던 도인호에게 다른 가치가 생긴 걸까
“슬슬 나가 볼까.”
어느새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은 숨쉬기 버거운 느낌을 주었다. 반신욕을 마무리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이미 잘 준비를 마친 도인호가 수건을 들고 반겨 줬다.
“그냥 내버려 둬도 마르는데.”
평소처럼 머리를 말리지 않은 상태로 호은이 나오자 도인호는 자신의 커다란 품에 호은을 가둬 버렸다.
“이제 밤공기 쌀쌀해서 안 돼요. 감기 걸려요.”
괜찮다고 하는 호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인호는 고집스레 손을 움직였다.
물기를 대충 닦은 수건을 치우고 온 도인호는 드라이기를 들고 와 호은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게 말려 주었다.
“너 나중에 연인 생기면 되게 잘하겠다.”
“연인이요?”
부드러운 손길로 호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도인호의 손짓이 멈추었다.
“응. 되게 다정하잖아.”
“글쎄요.”
드라이기 소리가 뚝 멈췄다. 호은은 따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은 다음 침대로 누웠다. 드라이기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온 도인호 또한 호은의 옆으로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연인 이야기는 왜…….”
“아. 오늘 각인 관련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보통 연인관계인 에스퍼와 가이드가 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주황빛 조명을 제외하고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천장이 따듯한 색감으로 물든 걸 감상하며 호은은 생각을 정리했다.
도인호의 폭주를 막아 주고 몇 차례 그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책임이라는 것은 가이드로서 또 파트너의 의미였다. 연인이나 각인이라는 건 호은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자리였다.
“좋은 사람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마음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호은은 당장이라도 손으로 열어젖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오늘 도인호가 자신을 뺏길까 봐 투정 부리는 모습에 한순간 기분이 좋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난번 한층 더 농도 깊은 가이딩을 한 뒤로 이상하게 자꾸만 도인호가 신경이 쓰였다.
도인호를 책임져주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호은은 최선을 다해 가이드 역할에 충실할 거다. 그동안은 시한폭탄이라는 위험한 별명 때문에 도인호에게 다가가는 가이드가 없었겠지만 호은이 꾸준히 가이딩을 안정시키다 보면 안 좋은 인식도 분명 바뀔 거다.
그렇게 되면 도인호의 옆은 D등급 가이드인 권호은이 아닌 더 좋은 등급의 가이드가 차지할 것 같았다. 에스퍼는 아무래도 등급 높은 가이드를 더 선호할 테니 말이다.
“필요 없어요.”
“응?”
“형 말고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
천장을 보고 있는 호은을 자신의 품에 끌어다 안은 도인호가 당장이라도 한기가 나올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갑하게 도인호의 품에 갇힌 호은이 몸을 틀어 불안해 보이는 노란색 눈을 마주 보았다. 불안정하게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래.”
지금은 그럴 수 있어.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호은은 단단한 가슴에 이마를 갖다 댔다. 폭주를 막아준 가이드가 호은이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여러 가이드를 만나보면 도인호는 아마 이런 말을 한 것도 잊어 버릴 거다.
“평생 필요 없어요.”
눅눅한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 들려온다. 호은은 피식 웃었다. 겨우 스무 살인 녀석이 평생을 운운하다니. 그것이 귀엽기도 하고 또 듣고 싶었던 말인지 만족스러웠다. 이중적인 마음에 치가 떨렸다.
손을 뻗어 도인호의 등을 두드리며 알겠다고 대답한 호은은 노곤한 몸에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아. 일어나서 의존증상 2단계로 입력해야 하는데.’
몸이 시트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며 호은은 깊은 수마에 빠졌다.
“형.”
잠이 든 건지 일정한 호흡을 내뱉는 호은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누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게 만들어 놨으면서.
“거짓말쟁이.”
질척거리고 음울한 목소리는 배신감으로 인하여 살짝 떨려 왔다.
“책임진다면서요.”
손을 들어 두툼한 호은의 입술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여린 살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다칠 것 같아 건들기 무서웠다.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권호은이라는 인간 자체가 그러했다. 잘 못 만지면 깨질까 봐 도인호는 항상 조심스럽게 그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
“나 놓아주는 척하면서 버리지 마요.”
점점 짙어가는 밤 아래 도인호는 마치 사랑 고백하듯 절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볼이 불그스름했고 호은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그러했다.
“나는 권호은만 있으면 되는데.”
창가를 통해 들어온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춘다. 도인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포근한 향기가 진해진다. 숙였던 고개는 어느 시점에서 멈췄다. 은밀하게 잠든 호은의 입술을 훔치자 머릿속이 몽롱해진다.
***
코끝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신호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호은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떴다.
어제 아무리 몸을 굴렸다 치더라도 평소의 호은이라면 이 정도로 몸이 무겁지는 않았을 거다. 터져 나오는 하품을 내뱉으며 느린 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종아리 알이 배인 건지 다리가 묵직하다. 아직 25살인데 나이를 먹었다는 게 이런 걸까. 어제 받았던 데미지가 하루 만에 사라지지 않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호은은 종아리를 번갈아 가며 주물러 주었다.
“형. 일어났어요?”
문이 열리더니 말끔한 모습의 도인호가 호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호은은 종아리를 마저 주무르며 답했다.
“응. 주말이 왜 이렇게 먼지 모르겠다. 피곤해.”
“다리 아파요?”
“어제 좀 무리했더니 그런가 봐. 괜찮아지겠지.”
종아리를 주물이던 걸 멈추고 호은이 일어나려 하자 도인호가 성큼 걸어와 호은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졸지에 아침부터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린 호은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도인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상대방은 얼굴에 철판이 깔린 건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식탁 의자에 호은을 내려 주었다.
“뭐, 뭐야?”
“다리 아프다면서요.”
“이렇게 안길 정도는 아닌데.”
에스퍼 체크 리스트에 과보호 상태 칸이 있다면 5단계를 입력했을 거다. 호은이 당황으로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도인호는 그런 호은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도인호의 눈과 입까지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쿵, 쿵. 심장에 해로운 미소에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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