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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50화 (50/129)

50화

-쾅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맞고 있지 않겠다 다짐하던 호은은 어디에 있는지 그는 열심히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웃.”

“다시 하겠습니다.”

검은색 바지가 여기저기 부딪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호은은 지난번 체력 검정을 봤던 인공 잔디가 깔린 넓게 트인 운동장에서 볼링공처럼 배연우의 손짓에 굴러다녔다.

훈련복을 친절하게 챙겨줬던 인턴 생활과는 다르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배연우는 호은에게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뛰어야지?’

그 말 한마디를 기폭제로 호은은 정장을 입은 채 열심히 뛰어다녔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린애들이 장난치는 술래잡기 같았지만, 실상은 잡히면 날라차기를 당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위험한 레이스였다.

“헉헉, 왜 이렇게 빠르신 거예요.”

“네가 느린 거겠지.”

두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달린 호은이었지만 이번에도 배연우에게 잡혀 버렸다. 붙잡힌 팔은 악력으로 인하여 맷집이 좋은 호은마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이었으면 팔 잘렸다.”

배연우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오전 사무 업무를 가르쳐 준 다음 오후는 현장 실전 업무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현장직 가이드는 안전한 곳에 배치되어 있다고 하지만 완전한 세이프존은 아니다. 반정부 같이 생각하고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녀석을 상대하면 세이프존에 있어도 발각되면 그만이다.

그러면 이때 가이드가 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바로 도망치는 거다.

“다시.”

“후우.”

크게 숨을 들이켠 호은은 다시 배연우를 벗어나 빠르게 달렸다. 확실히 호은의 움직임은 육상 선수라 해도 믿을 만큼 빨랐다. 하지만 상대는 에스퍼다. 이 정도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실제로 같은 가이드인 배연우에게도 이렇게 간단히 잡히고 있지 않은가.

호은은 화가 나는지 인공 잔디를 쥐어 잡으며 분함을 참았다. 종아리 터지라 뛰어도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아도 계속 붙잡힌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호은의 머리에 딱딱한 구두 굽의 촉감이 느껴진다. 지그시 밟힌 머리의 위화감을 느끼며 호은은 거친 숨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이러면 머리 날아가는 거지.”

구두를 치운 배연우가 멱살을 잡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호은은 뛸 준비를 했다.

“어깨에 힘 빼. 호흡에 정신 팔려서 뛰니까 집중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숨 쉬는 데 힘쓰지 마. 배연우가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호은은 크게 들이마셨던 숨을 최소한으로 들이마셨다. 내쉬는 것도 짧게.

발바닥이 잔디를 밟고 공중에 뜨는 순간 호은은 깃털처럼 가볍다는 문장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몸이 가벼웠다. 다리와 팔에 힘을 줘 가며 뛰었던 자기와는 다르게 적은 동작으로 가볍게 뛰던 배연우와 엇비슷했다.

뒤를 쫓아오는 걸음 소리와 동시에 뒤통수 사이로 손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빠르게 움직인 호은이 뒤를 돌자 손을 뻗은 배연우가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허억, 허억.”

뛰는 걸 멈추자마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오히려 계속 뜀박질했을 때보다 많은 숨을 요구했다.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폐를 손바닥으로 연신 두드리며 기침을 토해낸 호은이 한쪽 다리를 바닥에 꿇으며 허리를 굽혔다.

“이러면 또 죽는 거지 뭐.”

드디어 도망쳤다고 생각하자마자 서늘한 온기가 뒷덜미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움찔 몸을 떨며 호은은 나머지 한쪽 다리도 굽히며 무릎을 꿇었다.

배연우의 뛰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얼마나 가볍게 뛰길래 소리도 안 나는 걸까.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호은은 힘겹게 물을 찾았다.

배연우는 구석에 뒀던 생수를 집어 호은에게 건넸다. 급하게 물을 마시느라 입가와 목덜미에 흘리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보던 배연우는 속으로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체력이 일반인보다 좋은 걸 알고 있었지만 보통 저 정도로 호흡을 갈무리하고 뛰는 건 가이드 중에서도 몇 안 되었다. 한번 성공했으니 이제는 지속 시간을 늘리기만 하면 됐다.

확실히 이 정도 체력이라면 D등급이어도 도인호를 가이딩하는 게 완전히 말이 안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체력적 한계가 아니더라도 가이딩적 한계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에스퍼 따돌리려면 몇 초가 아니라 몇 분은 그렇게 뛰어야 해.”

“하아…….”

“나 때는 지금 여기서 자동차 타이어 허리에 묶고 뛰었어. 뭘 한숨이야.”

“아닙니다.”

칭찬을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배연우는 매몰차게 호은을 절벽 아래로 다시 떨어트릴 뿐이었다.

‘이게 사자의 훈육법 그런 건가.’

근육통으로 소리를 지르는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며 호은은 몇 시간을 뛰어다녔다.

***

“일 끝났어?”

저녁노을이 마치 노릇노릇 잘 구운 페퍼로니처럼 보이는 시간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저분해진 호은이 대충 옷을 털며 전화를 걸었다.

-네. 전 끝났어요. 형은요?

수화기를 통해서 듣는 도인호의 목소리는 어쩐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감과 낮은 저음 사이에 묻어 있는 다정함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향해있다.

“형. 여기요.”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뒤를 돌자 수화기 속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인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연스럽게 호은의 옆자리에 섰다.

먼지투성이인 호은과 다르게 도인호의 모습은 아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핏 좋은 정장 매무새는 당장 화보를 찍으라 해도 무리 없어 보였다.

“하하. 나 좀 지저분하지.”

도인호를 빤히 쳐다보던 호은은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눈동자를 올렸다. 도인호 또한 호은을 쳐다보고 있던 건지 시선이 부딪혔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꼴인지 깨달은 호은이 뒤늦게 머리를 정돈하려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아요.”

정수리 위에 올라온 크고 두꺼운 손바닥이 뒤통수를 매만진다. 제법 진지해 보이는 얼굴은 빗 말 따위는 모른다고 쓰여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하늘을 보는데 해가 괜히 피자처럼 보이는 거야. 그래서 오늘 저녁은 피자라고 정한 거지. 괜찮아?”

이능력자 협회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하자면 출근이나 퇴근을 할 때 인파에 떠밀려 복잡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사를 돌아다니는 자동차가 많은 것도 아니니 잘 가꿔진 풍경을 보며 걷는 순간이 평화로웠다.

“네. 좋아요.”

“응?”

질문을 던져 놓고 주변을 보느라 도인호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한 호은이 새초롬한 눈을 위로 뜨며 도인호를 바라봤다.

“좋아한다고요.”

“……아 피자! 그 피자를 좋아하는지 몰랐네.”

걸을 때마다 스치는 손등이 정전기가 나는 것처럼 찌릿찌릿하다. 호은은 유난히 환해 보이는 피자 가게의 간판 조명에 구세주를 만난 신도처럼 서둘러 뛰어갔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얼굴이지만 잘생긴 건 아무리 봐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구나.’

로맨스의 대명사라 불리는 웬만한 배우보다 도인호의 저 무표정한 얼굴로 좋아한다고 속삭인 게 더 자극적이다. 대상은 피자이건만 호은은 왜 자기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탄 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지 모르겠다.

-딸랑

도인호가 자연스럽게 가게 문을 열어주자 문에 달린 종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게 내부로 들어간 호은은 메뉴판을 보고 나서야 도인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뭐 먹을지 고르셨어요?”

“치즈랑 페퍼로니랑 하나는 뭐로 할래?”

“형 쉬림프 좋아하니까 쉬림프로 할까요.”

“좋다!”

호은이 들고 있던 메뉴판을 챙겨 카운터로 가자 도인호가 아르바이트생의 시야에서 호은을 가린 채 메뉴를 주문했다. 뒤에서 지갑을 꺼내는 호은 보다 먼저 카드를 꺼내 내미는 도인호였다.

“결제되었습니다. 혹시…….”

“호은 형. 나가서 기다려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도인호는 미련 없이 말을 끊고 뒤를 돌아 호은의 어깨에 팔을 올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영상에서도 그렇고 매서운 인상의 도인호는 혼자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었으나 호은은 이상하리만큼 하루살이가 꼬인다. 아마 영상에서 보여줬던 목소리나 행동들이 호감으로 느껴져 다가가기 쉬운 인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가을 오려나 봐. 해가 빨리 저문다.”

눈살을 찌푸렸던 도인호는 답을 구하는 호은에게 미처 바꾸지 못한 표정을 들키고 말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말해 봐.”

인천 지사는 숲속에 있다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밤이 되면 꽤 많은 별이 보였다. 도인호에게 있어 별이란 창문 열면 흔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밖에서 온 사람들은 별을 보고 감성에 젖기도 했다.

그냥 우주의 먼지 중 하나로 수소가 타고 있을 뿐인데 왜 감성적으로 변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보다 반짝이지 못했다.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면 별을 보고 감성적으로 변한다는 뜻은 몰라도 저 얼굴을 보면 감정이 요동쳐 자꾸만 솔직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함은 더럽고 추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꺼내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응?”

두 손을 꽉 잡아 오는 따듯한 온기와 함께 달콤한 가이딩이 들어온다. 도인호는 최대한 예쁜 포장지를 꺼내 자신의 진심을 꼭꼭 포장했다. 안에 있는 내용 따위 보이지 않게.

단어 하나하나 고르느라 시간이 걸린 도인호가 힘겹게 입을 뗐다.

“사람들이 형을 알아보는 게…….”

“알아보는 거?”

“형은 내 가이드인데.”

도인호의 말에 눈빛을 크게 들썩인 호은은 그가 문장을 마무리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줬다.

“뺏기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살짝 놀란 얼굴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잇, 그 사람들은 지금만 그러는 거고. 날 잘 아는 건 너잖아.”

“…….”

“그 사람들은 모르는 모습을 아는 걸로는 부족해?”

버터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로지른다. 눈썹을 까닥거리는 도인호의 모습은 부족하다고 대신 답변하는 것 같아 호은은 한 번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차가운 얼굴로 형은 내 가이드인데 라고 말하는 게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

“‘권호은은 도인호 전담 가이드입니다.’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닐까?”

“……네.”

“어어? 진짜야?”

호은의 동공이 커지며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인호는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점차 줄어들 거야. 괜찮아.”

도인호는 두 눈을 감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한편에 있는 욕망이 이걸로는 부족하다 속삭였다. 더럽게 꿈틀거리는 감정을 애써 마음 깊은 곳에 숨기며 도인호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진심을 꺼내는 건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고작 영상 하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힐 거다.

“피자 나왔나 보다.”

호은이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올라갔던 도인호의 입꼬리가 뚝 떨어졌다. 아르바이트생과 짧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길로 지켜보던 도인호는 이번에는 들키지 않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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