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호은은 벌서는 학생처럼 허리를 세워 앉고 두 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 뒀다. 배연우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한숨을 내쉬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간 상태였다.
“뭐야.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매캐한 니코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솜사탕같이 달콤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졌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냄새를 풍기는 배연우에게 호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로봇처럼 팔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했다.
“수첩이랑 펜 가져와.”
“넵.”
호은은 자리로 돌아가 수첩과 볼펜을 챙겼다. 도대체 이놈의 가이드 공단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직급이 높거나 나이가 많으면 바로 반말부터 했다.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의문은 현재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 먼저 회사 사이트 들어가.”
호은은 인턴 시절 알려 줬던 회사 내부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할 거 없으면 사이트나 둘러보고 있으란 말이야. 공지부터 시작해서 현장 기록도 열람할 수 있으니까.”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한 소리 들을 거로 생각한 호은의 예상과는 다르게 배연우는 제법 선배의 모습으로 그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호은은 그제야 테이블 한편에 놓아진 커피를 배연우에게 건넸다.
“저 대리님. 이거 드세요.”
“흥.”
콧방귀 소리를 낸 배연우는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한 모금 쭉 빨았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좀 살 것 같은지 구겨져 있던 얼굴이 펴졌다.
“업무 지시 내려올 때 가장 먼저 홈페이지에 등록되고 이후에 사내 메신저로 다시 알리는 거니까 수시로 확인해. 업무 보고서도 종이로 뽑는 게 아니라 여기 메뉴 보면 보고서 올리는 메뉴 있지.”
“아…….”
“회의 참석할 때 뽑아서 가더라도 여기에다가 차장님이랑 나랑 다른 팀원들 같이 선택해서 보고서 첨부하면 다 확인할 수 있어.”
호은은 볼펜을 들어 해당 메뉴를 들어가는 법부터 차근차근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고서 작성 개판으로 했더라.”
“네?”
배연우는 호은이 썼던 보고서를 건넸다. 빨간색으로 첨삭이 되어 있던 부분은 어떤 내용이 추가로 필요한지 빼야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보고서는 일기처럼 나열하는 게 아니야. 물론 현장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야 하는 건 맞아.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느꼈던 문제점과 해결 방안 등을 제시해야지. 보고만 하고 끝내면 뭐 어쩌자는 거냐? 현장 가이드 사무 업무는 대부분 보고서 작성이니까 제대로 배워 둬.”
말을 끝낸 배연우는 파일 여러 개를 선택하여 호은에게 발송했다. 가이드 워치에 파일이 수신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잘 쓴 보고서 보내줄 테니까 확인하고 비슷하게 써서 다시 제출해.”
“넵!”
생선 가시로 막혀 있던 목구멍이 시원하게 뚫린 기분이 들었다. 손에 힘을 많이 준 탓인지 수첩에 잉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이 쓰는 건 팀원 체크 리스트다. 뭐 지금은 팀 가이드여도 도인호 전담이라 도인호에 관한 체크 리스트만 작성하면 되겠지만, 나중에 팀원이 늘어나면 해당 에스퍼의 건강, 이능력, 가이딩 상태와 관련된 체크 리스트를 매일 작성해야 한다.”
“팀 가이드 되고 나서 한 번도 안 했는데.”
무식한 발언을 들은 사람처럼 배연우는 답답하다는 듯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속에서 불타는 마음을 한 박자 가라앉혔다.
누구한테 일을 배웠길래 이렇게 개판으로 일하고도 남은 거냐 따지고 싶은 배연우였지만, 정황상 자신이 존경하고 있는 호수 차장님밖에 없기에 해당 질문은 조용히 가슴속으로 묻기로 했다.
호은은 자리로 돌아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항상 근무 시간만 되면 연락이 자주 오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뜸해지는 인턴 동기 방은 역시나 근무 시간이라 그런지 연락이 쌓여 있었다.
[인턴 동기 김세희 : 졸려서 커피 믹스만 2잔째 ㅋㅋㅋㅋ 이러다 잘 듯요 ㅠ]
[인턴 동기 류윤재 : 전 오늘따라 사람 터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다 녹았슴다 ㅠㅠ]
밀려 있던 연락을 쭉 확인하자 각자 맡은 곳에서 고생하는 동기들의 모습이 이미지 되어 그려졌다. 잠깐 입을 가려 쿡쿡 웃던 호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은 지 1초 만에 딴짓하고 있는 자신에 놀랐다. 왜 동기들이 업무 시간에 메신저 답장이 빠른지 알 것 같았다.
점심시간까지 보고서를 마무리해 배연우에게 컨펌받은 호은은 드디어 끝난 업무에 기지개를 켰다.
“밥 먹으러 가자.”
“네에!”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내 식당이 있는 건물로 가는 줄 알았으나 배연우는 자연스럽게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리님 저희 밖에서 밥 먹나요?”
“국밥은 밖에서 먹어야 제맛이지.”
“아……. 국밥 먹으러 가는 건가요?”
“왜. 싫냐?”
“아니요. 좋습니다!”
차 키를 든 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배연우에게 호은은 손뼉을 치며 국밥 찬양론을 펼쳤다. 가을이 오고 있다고 하더라도 점심시간에는 제법 더운 탓에 국밥보다는 다른 게 먹고 싶었던 호은은 오늘만 참자는 생각으로 조수석에 탔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국밥 종류가 그렇게 다양하고, 5일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말이다.
“너는 왜 현장직에 왔냐?”
차를 타고 도착한 국밥집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하고 컵에 물을 따르고 있자 배연우가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호은은 물 한 모금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도인호 따라서 어쩌다 보니 온 이유가 컸지만, 꼭 그 이유만이 다는 아니었다.
“가장 일한 보람이 날 것 같아서요.”
“순댓국밥 나왔습니다.”
주문한 지 5분도 안 되어서 국밥이 나왔다. 한국인의 패스트푸드란 역시 국밥인 걸까. 호은은 순대를 접시에 던 다음 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너 보니까 63 스퀘어 현장 뛴 것도 몰래 들어간 거라며.”
“크흠, 넵.”
열심히 우물거리며 밥을 먹던 호은은 계속해 말을 걸어오는 배연우에 조용히 수저를 내렸다. 지금 먹다간 체할 게 분명했다.
“너 가이드 사이에서 유명해. 결정체 이식한 에스퍼 폭주 막고 팀 가이드까지 맡고 있다고.”
“제가……. 유명 인사였군요. 하하.”
“그럼. 유명하지. 호구 가이드로.”
호구(虎口)란 무엇인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하는 단어이다. 호은은 살면서 호구라는 명사로 지칭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호…… 호구요?”
밥이 넘어가지 않는 호은의 속은 모르는지 배연우는 뜨거운 국밥을 한 큰술 뜨며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가이드 중에서 각인할 에스퍼가 아니면 보통 전담으로는 안 맡으려고 하거든. 계속 에스퍼를 교체하거나 아니면 팀원들로 여러 명 맡아야지.”
“왜요?”
“에스퍼는 자연스럽게 가이드에게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드는 성향이 있으니까. 전담 가이드 대부분이 사내 연애고 그건 각인까지 해 준다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너 그건 아니잖냐.”
“각인…… 아니긴 하죠.”
“그러니까 호구지. 각인할 정도로 좋아하는 에스퍼도 아닌데. 가이딩 소모도 큰 녀석을 맡아서 기력을 쪽쪽 빨고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를 눈앞에 두고 수저를 가만히 들고 있다가 다시 내려놓은 호은은 애꿎은 국밥만 휘휘 저었다.
각인이라. 과거에 이론 시간에 배웠다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 날려 버렸던 단어였다. 각인이란 유일하게 에스퍼를 안정시킬 수 있는 행위다. 가이드는 한 명의 에스퍼에게 각인할 수 있다고 했다.
각인을 하게 되면 해당 에스퍼는 폭주가 안정되고 가이딩 소모량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고 했다. 앞에 나열된 이야기만 보면 각인을 할 수 있으면 꼭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속과도 같은 거다.
각인을 한 가이드는 해당 에스퍼가 아닌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 파장이 떨어져 가이딩의 질이 낮아진다고 했다. 결국, 가이드의 가치가 떨어져 각인한 에스퍼에게 꽁꽁 묶긴 것과 다름없다.
“현장직 맡은 가이드들 거창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사실은 돈 때문이야. 여기는 현장 수당도 나오고 그러니까.”
그냥 가이드 월급만 해도 세금 떼고 팔백만 원이 들어온다. 지난번 63 스퀘어의 현장 수당으로 천만 원이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돈 때문에 현장직을 맡는다고 하는 것이 이해됐다.
“그런데 다들 연차가 쌓이다 보면 사무직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게 된다. 왜인 줄 알아? 자기 몸이 나빠지는 게 점점 느껴지거든.”
국밥집에서 나누기에는 사골 국물만큼 농도 깊은 이야기였다. 호은은 국물만 살짝 떠 삼켰다.
“보람찰 것 같다고? 푸핫,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너 최근에 가이딩할 때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이상한 점이요? 오히려 처음에 가이딩할 때 찌릿한 정전기 같은 게 느껴졌지. 지금은 그런 것도 많이 줄고 괜찮은데요.”
배연우는 깍두기를 들어 호은의 밥 위에 얹어 줬다.
“그래. 그 점이 문제야. 가이딩할 때 몸에 자극이 안 오니까. 호구처럼 자기 몸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퍼부을 수 있다는 점.”
먹기 딱 좋은 온도가 된 국밥을 천천히 입에 넣기 시작하는 호은을 보며 배연우는 턱을 괴었다. 이렇게 말해 줘도 신입 가이드는 엉뚱한 사명감이 있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것이 분명하다.
배연우는 일주일 전에 봤던 권호은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가이딩 측정 결과 D등급. 그러나 체력 검정은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확실히 체력으로 봤을 때는 현장이 딱 맞지만, 등급이 낮아도 너무 낮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기회만 된다면 배연우는 호수 차장님의 머리를 열어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도인호의 가이딩 소모량은 S급 에스퍼 두 명을 케어하는 것과 같다. 지난번 호수 차장님을 도와주기 위해 도인호에게 직접 가이딩을 시도하다 피를 토했던 걸 떠올리며 배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후는 몸 움직일 거니까 많이 먹어 둬라.”
“많이요? 이모! 여기 곱빼기 하나 더 추가요.”
배연우의 궁금증은 오후가 되면 해결될 터였다. 뚝배기를 사선으로 두고 국물까지 싹싹 먹던 호은은 이제야 입맛이 돈 건지 2차 주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사도 안 하는 재수 없는 신입이라는 모습이 강했는데 아직 초반이지만 아예 예의가 없는 건 아닌지 제법 싹싹하게 구는 호은을 보니 그간 안 좋았던 이미지가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런데 대리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뭐.”
“홍보 영상 때 왜 그런 식으로 기획하신 거예요?”
호은은 1팀의 홍보 영상을 떠올렸다. 오늘 배연우가 일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가 기획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대충인 영상이다.
“반정부를 잡아야 하니까.”
호은의 질문에 배연우는 담백하게 말했다.
“미끼는 너 같은 신입이 하는 거고. 이번에는 잡아야지. 타이거.”
결의에 찬 단단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그러니까 보조 역할 잘하라고.”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 반정부를 만나면 지난번처럼 맞고만 있진 않을 거라 다짐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