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회의실 바닥이 어떤 재질이고 어떤 무늬가 있는지 호은에게는 딱히 궁금했던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개를 숙여 가며 바닥을 확인하는 이유는 정수리에 올려져 있는 손 때문이다.
“너 몇 기야?”
“72기입니다.”
“그래 72기. 나는 65기인데 나 때는 64기 선배들 눈도 못 쳐다봤는데 참, 회사가 이상해졌어.”
배연우가 말을 할 때마다 올려진 손에 힘이 거세진다. 호은은 이를 악물고 조금 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거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상황인데. 그것도 범죄나 이슈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대학교 군기 관련으로 나왔던 장면이다.
대학교에서도 호은은 군기라는 걸 당해 본 적이 없다. 예체능 계열이었으면 달랐을지 몰라도 경영학과는 조용히 굴러갔다. 선배라고 불리는 자들이 원하는 거라곤 존댓말과 인사를 먼저 하는 것 정도가 다였다.
“사수가 생기면 먼저 찾아와서 머리부터 박고 인사를 해야지. 그런 개념은 어따 밥 말아 먹었냐? 그리고 인사도 누가 그렇게 싹수없게 해. 세상이 참 좋아졌어.”
배연우는 손을 치웠다. 머리를 누르는 감각이 없어졌지만 호은은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마 여기서 바로 허리를 곧추세운다면 이번에는 머리가 아니라 다리를 걷어차 주저앉게 할 것만 같았다.
‘원래 사회생활에도 군기라는 게 있는 건가?’
호은은 김세희가 있었던 가이드 공단 사무실을 떠올렸다. 그곳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류윤재가 있던 가이딩 센터를 떠올렸다. 약간의 선후배 문화가 자리잡혀 있던 것 같긴 하지만 거기도 이런 식의 군기는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고 상황이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호은은 눈치껏 사과를 건넸다.
“그런데……. 대리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어디 계시는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호은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삐죽거리려는 입술을 애써 힘으로 일자로 만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호은이 배연우와 전쟁하자는 뜻은 아니었지만, 내용 정정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배연우를 첫날에 만났으면 분명 인사를 제대로 건넸을 거다. 하지만 1팀을 마주치긴 어려웠고 지난번엔 영상 회의에서는 소개하는 시간이 없었으니 정식으로 인사할 틈이 없었다.
호은은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려고 했던 거였지만 배연우에게는 건방진 말대답으로 들렸을 뿐이다.
“그래? 내가 바빠 뒈지겠는데 권호은 사원을 직접 찾아뵈러 왔어야 했구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진짜 요즘 애들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바로 이렇게 또박또박 말대답이나 하고 말이야.”
“…….”
“현장직에 왔으면 기수 제대로 챙겨야 할 거야. 여기는 일반 회사랑 다른 곳이고 현장은 무엇보다 경험이 많은 게 능력이야. 갓 들어온 72기의 현장 경험과 65기의 현장 경험.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니까 이렇게 재수가 없지.”
“죄송함다.”
사과해야지만 끝이 날 것 같은 상황에 호은은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전투 훈련부터 사무 업무까지 앞으로 내가 담당 사수니까 나한테 배우면 돼.”
“……넵.”
“회사가 학교도 아니고 배운다는 게 참……. 인턴 기간에 이런 거나 알려 주지.”
배연우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회의실 문 앞으로 향했다. 호은은 눈치껏 문을 열어 줬다.
“내일 10시. 내 자리로 와 있어.”
“넵.”
“너 담배는 피우냐?”
건물 나가는 길에 담배라도 같이 피우려는 건지 배연우가 담배를 꺼내며 입에 물었다.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새끼가. 사회생활 하는데 담배도 안 피우고 말이야.”
“아……. 제가 담배랑은 안 맞아서.”
“쯧, 그래도 라이터는 챙기고 다녀라.”
“넵……!”
입에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뒤지던 배연우는 라이터를 꺼내며 손을 휘저었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
“…….”
배연우가 나간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회사는 이런 건가? 몇 분 전만 해도 회의실에서 사무 업무 관련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호은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배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호수 차장도 뭐라 안 하는데. 왜 저래.”
마음속 본심이 튀어나왔다. 호은은 말을 해 놓고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호은은 배연우도 남운수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반정부를 소탕하기 전 자신이 먼저 소탕당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은 뭘까.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호은은 식은땀을 닦으며 카페에 들려 아이스 카페라테를 하나 시켰다.
“주문하신 아이스 카페라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단순에 커피를 들이마시며 호은은 플라스틱 컵에 힘을 주었다. 지구가 멸망하길 바라는 악당의 마음이 이런 걸까?
“벌써 출근하기 싫다.”
이미 출근한 상태이지만 더 격렬하게 출근하기 싫어졌다. 플라스틱 컵 표면에 잔뜩 묻어난 물기가 호은의 손바닥을 적셔온다. 미지근한 온도에 활활 타오르던 분노 게이지가 어중간해진다. 얼음 몇 개를 입안에 털어 넣은 호은은 와그작 얼음을 씹었다.
***
시간은 멈춰 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호은은 간만에 알람 시계보다 더 일찍 눈이 떠졌다. 미약한 한숨과 함께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푸르스름한 하늘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호은은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자는 도인호의 모습은 제법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아침잠이 많지 않은 호은임에도 불구하고 도인호는 더 빨리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기하네.”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고요한 얼굴은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보통은 자고 있으면 천사같이 예쁘다던데. 예쁜 건 모르겠지만 참 잘생기긴 했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보며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일정한 박동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는 안도감과 긴장감을 주었다.
‘결정체 이능력품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인호는 얼마나 탐나는 존재겠어.’
지난번 호수의 집에서 들었던 말이 마음에 걸리는 호은이었다. 도인호를 폭주 위험에서 구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구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도인호의 폭주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슴 부근을 만지자 흰색 면티의 부드러운 재질만 느껴진다. 티셔츠 안에 있을 결정체 이식으로 인한 흉터는 촉감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호은은 그 울퉁불퉁한 흉터를 꼭 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 잤어?”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우아하게 열린다. 자고 일어나 까치집이 생긴 호은과 다르게 도인호의 모습은 잠들기 전과 같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호은의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다 눈꼬리를 휘었다.
“…….”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인한 눈웃음이었다.
“……!”
잠깐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예쁘게 접힌 눈꼬리는 순식간에 그 모양새를 바꿨지만 호은의 눈에는 그 찰나가 천천히 흘러갔다. 호은의 뺨에 슬그머니 홍조가 올랐다. 입을 벌려 할 말을 찾던 호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한 호은은 자리를 피하려던 셈이었다. 아침부터 저런 얼굴을 보는 건 심장에 해로웠다. 만약 자신이 태교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3분마다 도인호의 얼굴을 쳐다봤겠지만. 아쉽게도 호은은 태교 중이 아니었다.
“오, 오늘은 내가 아침밥 할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싶었건만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던 목은 건조했고 덕분에 마지막 음이 삑사리를 터트렸다. 애꿎은 앞머리를 부여잡으며 호은은 목을 가다듬고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도인호는 샤워기 틀어지는 소리에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는 왜인지 모를 진한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온기마저 사라진 자신의 옆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같이 살아도 턱없이 권호은이 부족하다.
침대를 제외하고는 붙어 있지도 못 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밖으로 불러낸 호수는 지금부터 가이드 교육이 있을 거니 두 사람 간에 어떤 일이 있어도 에스퍼는 개입하지 말라는 말만 남겨 두고 떠났다.
“연우 대리 착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운수 팀장이 머뭇거리며 자신의 가이드를 두둔했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행동을 보였던지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도인호였다.
최대한 회사 업무를 느리게 알려줘 가능한 집에만 있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는 주변인들에게 호은은 그저 어리숙한 신입 가이드로 보였나 보다. 이렇게 나서서 지도까지 하는 걸 보니.
얼마나 사념에 빠져 있었을까. 어느새 다 씻었는지 부엌으로 걸어가는 호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신호로 도인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열려 있던 커튼을 끝까지 걷은 도인호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공기의 차가운 바람이 도인호를 스치고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조바심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영상으로 호은의 존재가 알려지고 인천 지사 내에서 직접적으로 호은에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도 생겼다. 자신이 계속 옆에 있지 않으면 이상한 게 꼬일 게 분명했다. 호은은 누구에게나 착하고 친절하니까. 그 관심을 쉽게 쳐내지도 못 하겠지.
“숙소 안에만 있으면 좋을 텐데.”
도인호는 음습한 목소리로 소원을 빌었다. 아무리 호은이 자신을 책임진다고 했지만, 말이라는 건 절대적이지 않다. 약속을 어긴다고 범죄자가 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물론 호은이 약속을 어긴다고 처벌을 줄 생각 따위 일절 없으나 만약 거기에 다른 누군가가 협조했다면 그 사람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할 것 같다.
도인호의 뺨이 순간 미세하게 경련했다. 얼굴도 모르는 녀석이 호은의 옆에 서 있는 걸 상상하기만 했을 뿐인데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호은의 발걸음에 청각을 집중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배우라도 그 정도로 빨리 얼굴을 바꾸지는 못할 터였다.
“밥 먹자!”
아까의 음습하고 질척거리던 감정은 어디로 숨긴 건지. 색으로 표현하면 여러 색이 섞여 혼탁한 까만색이었을 감정이 흰색 도화지를 앞세워 숨어 버렸다. 당연히 그 사실을 모를 호은은 아무렇지 않게 도인호의 손을 이끌고 식탁으로 향했다.
***
“후.”
호은은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드 워치를 확인했을 때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어제 밉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 준비면 아침부터 욕먹을 일은 없겠지.’
기대에 찬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간 호은은 연분홍색 머리통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10분보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나.’
먼저 도착한 배연우에게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자리에 간 호은은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지각?”
“네? 10분 일찍 왔는데요…….”
“상사보다 늦게 오면 그게 지각이지. 아니야? 너 뭐야. 신입이잖아.”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안 하면 좋으련만.”
호은은 더 이상 빈말도 내뱉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생선을 먹다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목구멍이 따끔했다.
아침 인사부터 삐걱거리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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