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7화 (47/129)

47화

호은은 다크서클 때문에 퀭해진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 아침에 있을 회의는 홍보부 전체 직원이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공지가 내려왔다. 해당 회의 주제는 반정부 소탕에 관련된 주제였다.

호은이 잠들려고 준비하던 밤 10시. 호수에게서 메시지로 내일 회의 자료에 참고하게 보고서를 올리라는 간단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밤늦게 연락을 주는 것에 1차 당황했으나 일까지 주어 2차 당황한 호은이었다. 그날 오후에 직접 만났을 때 연락을 줬으면 호은이 새벽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잠을 설치진 않았을 거다.

“인호야, 밥하지 마. 그 시간에 좀 더 자고 카페 가자.”

호은은 침대 시트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어젯밤 호은이 늦게 잔 걸 알고 있는 도인호는 햇빛이 들어오는 커튼을 쳐 주며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업무 보고서 다 썼어요?”

“응…….”

도인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호은은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도인호가 밤에 도와주겠다는 걸 간신히 막은 뒤 호은은 63 스퀘어 업무 보고서를 작성했다. 회사 양식이 있어 작성하는 건 쉬워 보였지만 막상 키보드를 두드리니 잘하는 게 맞나 걱정이 들었다.

그 누구도 보고서 작성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다. 원래 회사는 이런 걸까?

회의실에서 깨질 마음의 준비를 한 호은은 한참을 이불 안에서 뭉그적거리며 도인호의 뜨거운 온기를 즐기다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카페를 들려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신 두 사람은 늦지 않게 회의실에 도착했다. 그사이 호은은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프린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난번에 모였던 회의실과 같았지만 2팀의 육아 휴직이 확정되어 회의실의 빈공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호은과 도인호는 사이드 자리에 앉은 채 사람들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또 어디에 넘어진 건지 머리 중앙에 나뭇잎을 묻히고 들어오는 남운수를 본 호은은 반쯤 일어서서 인사했다. 남운수는 고갯짓으로 답인사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배연우가 들어왔지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호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끝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호은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배연우를 보며 호은은 자신의 볼을 살며시 만져 봤다. 첫인상이 좋은 편은 아닐지 몰라도 눈웃음 짓는 모습은 어르신들에게 호감형이라며 칭찬을 들었던 호은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처음 경험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조해진 회의실의 공기에 목이 따갑게 느껴진다. 지니가 세팅한 건지 테이블에 놓인 생수로 호은이 목을 축이고 있자 네이비 슈트를 입은 호수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여러 서류가 들려 있었다. 미리 호수의 자리에 보고서를 올려 두길 잘했다고 생각한 호은이다.

“두 명 빠졌더니 허전해 보이네.”

호수는 비어 있는 자리를 한번 보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나눠 줬다.

“자. 지난번에 해야 했는데 늦었군. 자기소개부터 할까.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팀원인데. 난 가이드 공단 총괄부 차장 호수다. 그리고 너희 소개해.”

호수의 시선은 남운수와 배연우에게 향했다. 배연우는 흐트러진 자세를 곧추세웠다.

“가이드 공단 배연우 대리입니다. 이쪽은 이능력자 협회 전(前)특수부 남운수 팀장.”

배연우는 두 사람에게 시선도 던지지 않은 채 빠르게 자기소개를 끝냈다.

“도인호 에스퍼입니다.”

“가이드 공단 신입 권호은입니다.”

호은은 애써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소개하였다.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실이 회의실 안 가득 채워져 있다. 실에 닿으면 언제 경보가 울릴지 모른다. 긴장감과 탐색이 난무한 공간 속 홀로 자유의 몸인 호수는 피식 웃으며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배연우 대리는 신입 잘 챙기고.”

호수의 말을 못 들은 척 배연우는 서류를 보며 딴청을 부렸다.

“서류 보면 알겠지만, 기존 특수부에서 반정부를 조사했던 내용 공유와 최근 추가된 내용을 짚기 위한 회의다.”

서류에는 다섯 명의 프로필 사진이 놓여 있었다. 전통 탈을 쓰고 있는 얼굴과 몇 명은 민얼굴 사진도 있었다.

“첫 번째 원신. 정확한 나이는 확인되지 않지만, 미성년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능력은 정신 지배. 눈이 마주치는 것이 이능력 발동 조건이지.”

호은은 지난번 63 스퀘어 현장을 떠올렸다. 원신이라. 키가 작고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소녀와 소년 중간에 있는 목소리였다. 갈색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빛나며 명령을 내렸던 모습이 떠올랐다.

[반정부 프로필 1]

-이름 : 원신

-신장 : 158cm

-나이 : 미성년자로 추정 중(12세~17세)

-이능력 : 정신 지배

“능력이 공격형은 아니다 보니 현장에 직접 등장하는 수가 극히 드뭅니다…….”

서류를 넘기다가 손이 베이기라도 한 건지 손가락에 피를 뚝뚝 흘리는 남운수가 입을 열었다. 옆에서 배연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반정부 프로필 2, 3]

-이름 : 최선율, 선악율

-신장 : 182cm, 179cm

-나이 : 27세, 26세

-이능력 : 빛과 그림자

“두 번째는 어떤 현장이든 같이 등장하는 율형제다.”

“율형제…….”

지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귓가에 들리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호은은 최선율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둘 다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둘이서 같이 협동해서 공격하면 가장 까다로운 녀석들이에요…….”

이번에도 역시나 남운수가 입을 열었다. 힘없는 목소리는 마치 책을 읽는 것 같으면서도 자장가를 부르는 건가 싶은 느낌을 주었다.

[반정부 프로필 4]

-이름 : 반설아

-신장 : 172cm

-나이 : 확인 중

-이능력 : 빙결

“세 번째는 반설아. 반정부 보스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 도인호 에스퍼와 전투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보고서로 보자면 등급은 S등급으로 추정. 반정부 내에서도 가장 높은 걸로 예상된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상자에 갇혔던 도인호는 확실히 해당 방벽을 한 번에 무너트리지 못했다. 나중에 에스퍼 강화제를 먹고 나서야 깨트렸던 걸 떠올렸다.

“후방에서 방어 위주로 보조하는 에스퍼입니다. 이능력도 최상이지만 정부에 대한 분노와 반감 또한 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가이드는 살려서 데려가려던 다른 반정부와 다르게 여자는 호은을 보자마자 죽이려고 했다. 이미 오래전 치료가 끝난 복부와 뒤통수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은 호은이었다.

[반정부 프로필 5]

-이름 : 확인 중 (보스)

-신장 : 188cm

-나이 : 확인 중

-이능력 : 확인 중

“마지막으로 보스라고 불리는 녀석. 신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한 녀석이다.”

-빠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에 동시에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도인호가 쥐고 있던 볼펜이 반으로 두 동강 나 있었다.

“…….”

호은과 눈이 마주친 도인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이능력을 써 망가진 볼펜을 태워 없앴다.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볼펜에 호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일반 현장에서 마주치기 어려운 녀석입니다. 전투가 생겼을 때 자신의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능력품을 사용하고 있기에 이능력 또한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회의실은 서류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호은은 마지막 장에 있는 프로필을 보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반정부 프로필 6]

-이름 : 월랑

-신장 : 167cm

-나이 : 확인 중

-이능력 : 바람

“오늘 모이라고 한 이유는 새로운 프로필이 생겼기 때문이다.”

“민원부 지원 업무로 상주에 갔다가 마주쳤습니다. 상주는 자신의 구역이라고 말하던데 기존 기록에서 해당 반정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도인호가 추가한 자료인지 이번 설명은 남운수가 아닌 도인호가 맡았다. 호은은 잘 정리된 월랑의 프로필을 한참을 바라봤다.

월랑과의 현장에는 호은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필을 작업해야 한다는 것과 그동안 현장에서의 업무를 보고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신입이라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아 몰랐다는 변명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는 걸까.

“월랑이라고 불리는 자 말고도 추가된 반정부 일원이 있는지 찾아봐야 하겠지만, 아마도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인사부에서 에스퍼 의심자를 만나러 갔을 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경우가 많은데 반정부로 빠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 방송에 반정부가 나왔던 게 역할이 큰 것 같군. 정부 에스퍼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에 반정부부터 인식하게 되었으니.”

“인사부요?”

인사부는 처음 들어 보는 부서였다. 거기다 에스퍼면 에스퍼지 에스퍼 의심자라니. 회의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건 호은뿐인지 인사부와 의심자에 관한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인사부는 에스퍼를 스카우트하는 업무를 하고 있고.”

“그 부분은 제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정중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배연우는 호수의 말을 끊었다. 예의는 호수 한정인지 흘긋 날아온 시선은 한심한 거를 본다며 얕잡아 보는 눈빛이었다. 정통으로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볼이 화끈거렸다.

‘아무도 안 알려 줬다고요! 전 신입이라고요!’

호은은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변명이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기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일단 반정부가 세력을 키우려는 거로 보이니 월랑 외에도 추가 인력이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일정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호수는 생각에 빠진 듯 서류를 한번 쭉 훑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인사부에 협조 요청을 해야 할 것 같아.”

“크흡.”

물을 마시던 남운수는 사레가 들린 건지 연신 기침을 뱉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배연우는 얼굴을 구기고는 더럽다며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운수에게 건넸다.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호은은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일단 인사부 건은 내가 해결할 테니 개인 정비하며 대기하고 있어.”

마무리 짓는 호수의 말에 회의는 대략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호수는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던 호은이 제출한 보고서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아, 에스퍼들은 잠깐 따라와.”

회의실 문이 열리고 호수의 뒤로 남운수와 도인호가 따라갔다.

호은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회의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문을 닫은 건 회의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배연우의 짓이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지?”

배연우의 공격적인 말투에 호은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 가이드 상사를 보면 대가리부터 박는 게 예의 아냐?”

당황스러움에 가만히 서 있는 호은에게 배연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손을 올려 호은의 머리 통수를 잡은 그가 힘을 줘 바닥에 내리꽂는다.

“이렇게 인사하라고. 새끼야.”

호은은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에 겨운 회사 생활을 해왔는지. 진짜 회사 생활은 지금부터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