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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6화 (46/129)

46화

백우경의 말에 싸늘했던 공기가 한층 더 내려갔다. 호은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 믿고 싶었다.

“D급 가이드니까 죽어도 된다.”

호수는 백우경의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붉은빛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거린다. 호수의 태도에 백우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는 행동이 마치 지난번 권호은의 가이드 등급을 다시 측정하자고 말했던 그때와 오버랩 된다.

“하. 그래서였구먼.”

호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촬영 내용과 일자는 직원 통해서 알려 드릴게요.”

“아? 네.”

“타이거가 물 수밖에 없는 미끼가 되어 보자고요.”

백우경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호은은 얼떨결에 그의 미소를 따라 지었다.

***

홍보부 영상을 열심히 촬영한 사람 누구야? 권호은이다. 홍보 영상 뽑히길 바랐던 사람은? 그것 또한 권호은이다. 마지막으로 너튜브 영상 안 지우고 온 사람은? 역시나 권호은이다.

모든 것은 호은이 초래한 결과였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탓할 거면 자신을 탓해야 하는 상황에 호은은 요즘 따라 여러 번 찾는 신을 불렀다.

“유언장……을, 먼저 작성할까요.”

“그래. 언제 뒈져도 안 이상하니까 써 놔라.”

호은은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회의실에 앉아 반성문을 적는 학생처럼 유언장을 적었다. 이번에는 대충 적지 않았다. 통장 계좌 비밀번호 또한 친절히 남겨 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정부 대비 훈련이라도 해야겠네.”

호수의 말에 서명하던 호은이 고개를 들었다. 호은에게 강아지 귀가 있었다면 축 처졌던 귀가 쫑긋 세워졌을 게 분명했다.

쯧. 호수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훈련받는 게 좋냐?”

“네! 뭔가 생산적인 일을 배우는 것 같아서요.”

호수는 호은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확실히 중학교 시절까지는 운동을 배워서 그런지 몸으로 하는 거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같은 팀의 배연우 가이드와는 통성명했어?”

“배연우 가이드…… 아니요.”

“3팀은 기존 반정부 전담팀으로 남운수 팀장과 배연우 대리를 주축으로 운영되던 부서지.”

“남운수 에스퍼님이 팀장이요?”

호은은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이던 남운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굉장히 덤벙대는 스타일이던데 현장에서는 다른 건지 의아했다.

“반정부 측에서 움직이기 전까지 시간 있으니 훈련 스케줄은 내가 배연우에게 전달하마.”

“네 알겠습니다.”

호은은 회의실 문을 닫고 나왔다. 영상 올리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어쩐지 묵직하다. 저 핸드폰 안에 쌓인 연락 때문인 걸까.

‘인호한테는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상상 속 도인호가 지을 표정이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화난 표정? 호은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움직이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나마 바로 얼굴 보지 않아서 다행이네.”

도인호는 혼자서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 건지 아침마다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에 일을 처리해야 밤에 같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도인호에게 호은은 자세한 내용을 캐묻지 못했다.

“어? 홍보부 영상에 나오신 G 가이드 맞으시죠!”

호은이 생각에 빠진 채 길을 걷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사람이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네?”

“맞네. 영상에서 들었던 목소리랑 어쩜 이렇게 똑같으세요?”

호은의 앞에 있는 사람은 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일반인인지 상의에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아……. 하하. 제가 목소리가 조금 그런가 봅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얼굴이 안 나와서 아쉽네요.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네? 아니에요. 어디서 일하세요. 뭐라도 사야겠네.”

“어머. 빈말 아니에요. 그럼 저 혹시 사진이라도.”

핸드폰을 내미는 직원에 호은이 머뭇거렸다. 홍보 영상이 유명해지고 현재 사람들은 너튜버 호켓과 홍보부 G 가이드를 동일 인물로 추측하고 있다. 영상의 인기만큼 영상에 나온 인물들의 관심도 또한 높았다.

‘그래도 핸드폰으로 촬영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데.’

곤란해하는 호은의 앞에 누군가 보호하듯 끼어들었다.

“이능력자 협회 내에서 사진 촬영 금지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뒤에서 들리는 낮은 저음에 호은의 심장이 빨라졌다. 이 목소리를 이렇게 빨리 들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호은은 뒤돌기 무서웠다. 공포 영화 속 이런 상황에서 뒤를 돌면 항상 깜짝 놀라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도인호의 존재는 호은을 공포 영화 주인공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호은 형 괜찮아요?”

“헉! 어? 으응.”

호은이 뒤를 돌고 있지 않자 도인호가 호은의 앞으로 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시선을 피하던 호은이 마지못해 도인호를 쳐다봤다.

그는 분노하고 있지도 당황스러워하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호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상 소식을 지금 들었습니다. 미리 옆에 있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나야말로……. 영상 미리 삭제 안 해서 일 크게 만들고.”

도인호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어디에 갔는지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이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왔다.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 괜찮다고 말하는 도인호에 선선한 바람이 호은의 마음에 불어온다.

바람과 함께 꽃 내음이 타고 오는 건지 달콤함에 취할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나갈 때 같이 다녀야겠네요.”

“아니야. 시간 지나면 홍보부 영상 같은 건 다들 까먹을걸?”

“그래도 형을 내버려 두는 건 제가 내키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 아.”

대화 도중 또 추가 촬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말을 꺼내면 훈훈했던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지난번 너튜브 영상 보여 줄 때도 반응이 안 좋았던 걸 생각하면 도인호는 같은 팀인 가이드에게 문제가 생겨 자신까지 피해 볼까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음……. 혹시라도 홍보부 영상을 더 찍으라고 하시면 어떡하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막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어……. 그래.”

역시. 저렇게까지 싫어하다니. 호은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백우경에게 제안받은 일을 입으로 꺼내기 어려워졌다. 도인호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편이니까 호은을 막다가 백우경에게 찍힐지도 모른다.

‘분명 그 사람 가이드 공단 이사장이었지. 괜히 밉보여서 도인호에게 이상한 현장을 맡길지도 몰라.’

“혹시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을 한 건가요.”

시시각각 변하는 호은의 표정에 도인호가 침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호은은 화들짝 놀라며 도인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니야. 너무, 고, 고마워서. 그렇지. 이야. 내가 그, 정말 인복이 좋아.”

마주 잡은 두 손에 도인호는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일은 잘 해결하고 왔어? 아침밥만 먹고 바로 나갔잖아.”

호은은 잡았던 손을 자연스럽게 놓았다. 가이딩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손을 계속 잡고 있으면 도인호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생각보다 진전이 없네요.”

꽤 까다로운 일을 하는 건지 올려다본 도인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내가 도와줄 거 정말 없어?”

“없습니다……. 아, 하나 있네요.”

도인호가 손을 들어 호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좁혀진 거리만큼 도인호의 체향이 짙게 느껴졌다.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동할 때는 어디로 간다고 문자 한 통 주세요.”

중요한 부탁을 하는 듯 도인호는 느리게 한 글자씩 속삭이며 호은에게 말했다.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도인호의 목소리에 호은의 귓불이 점점 붉어졌다.

“어어! 알았어.”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귀를 손으로 감싸며 멀찍이 떨어졌다. 눅진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도인호는 도대체 이런 스킬을 어디서 배워 오는 걸까? 분명 10년 가까이 무념무상으로 살았다는 사람치고 스킨십에 능숙해 보였다. 호은이 여자였다면 방금 행동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숙소 들어가려고?”

호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평소의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줄에 감긴 목각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호은은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형은요? 따라가도 돼요?”

순식간에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기껏 거리를 벌려 놓은 게 무색하게 바로 도인호가 옆으로 따라 걸어온다.

서로의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에 호은은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도인호는 무슨 일인지 가방에 매달린 키링이 된 것처럼 자꾸만 달라붙는다. 마치 지난번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같은 숙소니까. 안 될 리 있나.”

“그런 뜻이 아니라.”

초록색 잎사귀의 색이 바래는 계절이 오고 있다.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던 햇빛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 열기를 감췄다. 자신의 앞에 우뚝 선 도인호의 모습에 호은은 왜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위치도 비슷했다. 도인호를 이능력자 협회에 와서 처음 만났던 장소가 여기였다.

그때의 도인호는 큰 체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소해 보였다. 굽혀진 어깨와 땅에 닿을 듯한 시선 처리. 자신은 도인호를 보며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계절이 변하듯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도인호부터 두 사람의 관계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호은은 도인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듯 웃음을 머금었다.

“약속했잖아.”

조바심으로 일렁거리던 도인호의 눈동자는 마치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 같았다. 호은은 도인호의 질문에 더 묻지 않고 대답했다.

“책임지기로.”

일렁거리던 파도가 멈췄다. 도인호는 입꼬리 한쪽을 당겼다. 호은이 기억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로 오후부터 올라왔던 불안감과 불쾌함 그리고 질투심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호은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도인호의 기분은 순식간에 형편없이 뭉그러져 끝내 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장 호은을 만나기 위해 숙소로 갔지만, 텅 빈 숙소만이 자신을 반겨 허탈감을 느꼈었다.

“고마워요.”

도인호는 자연스럽게 호은을 껴안으며 오랜 시간 호은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가이드 공단 직원만 확인할 수 있는 위치 추적 목걸이다.

“뭐해?”

“선물 주려고요.”

도인호는 순식간에 기존 목걸이를 불태웠다. 팀 에스퍼에게 가이드 위치를 알려 주지 않는 목걸이는 필요 없다. 주머니에서 꺼낸 푸른색 원석이 박힌 목걸이를 다시 채워 주며 도인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난 아무것도 못 준비했는데.”

긴장감으로 팽팽하던 줄은 가위로 싹둑 자르기라도 한 듯 목걸이로 인하여 사라졌다. 호은은 푸른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잘 어울리네요.”

덫을 놓고 기다리는 짐승처럼 도인호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호은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덫은 신중하고 조용해서 이미 눈치챘을 땐 덫에 걸리고 나서일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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