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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5화 (45/129)

45화

한 여자가 너튜브를 돌아다니며 영상을 살펴보고 있다. 딱히 보고 싶은 영상이 있는 게 아닌지라 의미 없이 스크롤만 내리고 있던 와중 시선을 끄는 한 영상을 발견했다.

[실존합니다! 신입 가이드의 에스퍼 관찰 일지.]

“이게 뭐야.”

제목 어그로가 가장 중요한 이곳에서 해당 영상의 제목은 어그로 그 자체였다. 실존합니다? 뭐가 실존한다는 거야. 그 바로 뒤에 있는 가이드라는 단어를 본 여자의 눈은 커졌다.

“가이드?”

가이드와 에스퍼. 그 단어를 떠올렸을 때 영화나 소설에서 그려지는 에스퍼와 가이드 모습은 실존하는 직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마디로 현실감 없다는 말이다.

“4시간 전에 올린 건데 조회 수 70만이네.”

보장된 재미라는 걸 알려 주는 조회 수에 여자는 망설임 없이 영상을 재생시켰다.

-하나둘 셋. 72기 인턴 파이팅!

-현장 지원 부서의 귀염둥이 K입니다. 안뇽 안뇽.

-가이딩 센터에 근, 근무 중인. 어흑 저 너무 떨려요. 다시 가, 가도 될까요.

-민원부 에스퍼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입니다! 컬러풀.

-치지직.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신입 가이드 G라고 합니다.”

장면이 빠르게 바뀌더니 노이즈와 함께 회의실로 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앉아 있는 남자는 초록색 사원증을 착용한 상태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긋한 목소리에 자상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E군도 인사할래요?”

테이블에 놓았던 카메라를 G가 잡은 건지 화면이 흔들린다.

“미친.”

여자는 G와 다르게 얼굴이 보이는 E에 잠시 재생을 멈췄다. 핸드폰 화면에는 와이셔츠로 가릴 수 없는 탄탄한 남자의 가슴이 보였다. 그 위로는 요즘 나오는 연예인들 뺨 다 후려갈기고도 남을 외모가 있었다.

에스퍼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건 얼굴 공개된 소수 에스퍼의 외모로 증명된 사실이었지만 새삼스럽게도 여자는 남자의 외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왜 안 알려 줘. 이거 덕질 각인데.”

E라는 호칭에 아쉬워하며 여자는 다시 영상을 재생시켰다. E는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은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G의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린다. 소개 영상은 여기까지인지 배경 음악이 바뀌더니 푸른 하늘이 보인다.

“여기는 가이드 공단이고요. 내근직 가이드는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G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이드는 사무실로 바로 들어갔고 거기에는 기다렸다는 듯 영상 초반에 나왔던 장면이다.

“현장 지원 부서의 귀염둥이 K입니다. 안뇽, 안뇽.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면.”

K는 사무실을 안내해 주듯 한 바퀴를 돌았다. 자리에 사람이 있으면 어떤 부서에 무슨 담당이라 설명해 주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부서인 현장 지원 부서를 설명했다.

가이드가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과 사무 업무를 보는 장면이 평소 가지고 있던 가이드의 궁금증과 오해를 자연스럽게 풀어 줬다. 거기엔 마치 시청자처럼 몰랐던 사실을 공감하는 G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제목을 <실존합니다>로 지었구나.”

다음 장소는 의료 센터였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 의료 센터를 보자 여자는 이해했다며 중얼거렸다. 학창 시절 필수 과목으로 학교에서 가이드와 에스퍼에 대해 교육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 가이드는 치유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의료 센터 안에 속한 가이딩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나 보다.

“치유하다가 사랑 싹트겠는데.”

가이딩을 하기 위해 손을 잡는 장면이 나오자 여자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첫 스킨십을 보기라도 하듯 히죽 웃었다. 이 드라마 재미있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가이드는 딱 봐도 몸이 좋아 보였고 여자 에스퍼의 얼굴은 너튜브가 아닌 극장 스크린 화면으로 봐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이드 얼굴도 궁금한데.”

가이드는 얼굴 부분이 스티커로 가려져 있거나 상반신 부분만 노출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실 에스퍼 현장인데요.”

잘생긴 외모로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 에스퍼가 다시 화면에 등장했다. 카메라 촬영은 주로 G가 하는 건지 화면에 나오는 건 E였다. 민원부라 쓰여 있는 문을 열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여기서 잠깐, 민원부란?

갑자기 아이들 학습 영상처럼 이능력자 협회 마스코트가 화면에 등장하더니 직접 녹음한 건지 G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원부가 어떤 업무를 하는지 알려 주고 맑고 청아한 짧은 소리와 함께 화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원부 현장은 앞에서 봤던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방송용 모습인가 싶은 민원부 에스퍼의 캐릭터부터 예능을 보는 것만 같은 전개. 여자는 자기 잇몸이 말라 가는 걸 느끼고 서둘러 입술을 닫았다.

“앞으로 가이드 공단과 이능력자 협회는 여러분과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클로즈 영상이 나오고 쿠키 영상으로 시골 밥상에서 밥 먹으며 웃는 에스퍼의 모습이 짤막하게 나갔다.

“뭐야? 왜 이렇게 짧아!”

여자는 진한 아쉬움이 남은 상태로 2편 나올 때까지 숨을 참는다는 댓글을 쓰려고 댓글 창을 열었다.

[봄이왔나봄 ▶나레이션 하는 가이드 목소리 무슨 일이야. ASMR 채널 하나 파 주세요 ㅠㅠ]

[고미 ▶아니 에스퍼들 외모 무슨 일이야. 여태까지 자기네들만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고?]

[그저넋을놓고감상 ▶????? 그냥 적당히 홍보 영상인가 찍먹이나 해 봐야지 했는데 15분이 지나 있었다... 실화냐]

[파블루 ▶중학생 때부터 저도 가이드나 에스퍼가 되고 싶었어요. 이제는 30대가 되었지만 이번 영상을 보니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저기서 일하는 분들은 어떻게 들어간 건지 얼굴 복지 부럽네요...]

[빵돌이 ▶가이드 공단에 취업한 거였네요.]

여자는 자신과 비슷한 주접 반응에 웃으며 댓글을 정독하다 익숙한 닉네임을 발견했다.

“어? 빵돌이. 어디서 봤는데.”

여자는 기억을 더듬다 구독 중인 채널을 확인했다.

호켓 (HOKET) 별말 없이 음식만 먹는 해당 너튜버는 마지막 영상을 올린 채 두 달 넘게 새로운 영상을 올리지 않았다. 여자는 마지막 영상을 들어가 댓글 창을 확인했다.

[빵돌이▶취업 축하드립니다 ^^. 영상 보면서 많이 위안받고 있었는데 아쉽네요. 일 익숙해지고 나면 가끔 찾아와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같은 사람이잖아.”

-오늘은 조금 색다른 영상을 찍어 봤는데요. 일상 브이로그입니다.

여자가 댓글을 확인하고 있을 때 자동으로 재생된 영상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잠, 깐만.”

여자는 호켓의 목소리를 한번. 그리고 조금 전 봤던 영상을 다시 틀었다.

***

호은은 아침부터 호수에게 호출당한 상태였다. 회의실은 분명 싸늘하기 짝이 없는데 호은의 등 뒤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지금 난리 난 영상 속 가이드 정체. 바로 먹방 너튜버 호켓!]

“이거 뭐냐.”

어제 회의가 끝나고 레오와 최유빈을 데리고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참 재미있었지. 술 못 마시는 두 사람 대신해 술도 제법 마셨고. 혹시 내가 아직 술에서 덜 깬 건가.

호은은 호수가 던진 종이 쪼가리를 봤다.

인터넷 기사를 인쇄한 종이에는 저화질의 호은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캡처할 거면 720p로 해 주지 360p로 했다.

“대답.”

“저…… 입니다.”

“본인이라 이거지.”

“네…….”

쾅! 호수는 책상을 내리쳤다. 호은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은 것과 반대로 심박수는 빠르게 올라갔다.

과거의 자신을 여기다 데려오고 싶었다. 잘못은 과거의 내가 했는데. 왜 혼나는 건 현재의 나일까. 호켓의 모든 영상을 삭제하지 않은 자신을 욕하며 호은은 고개를 숙였다.

“네 신상 다 까였어. 목소리부터 상체 나온 거 호켓인지 포켓인지 거기 나온 남자랑 비교한 영상까지 돌아다니고 있더라.”

잘 익은 벼처럼 호은의 고개는 계속 숙여졌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메신저 연락이 온 거 보고 기겁했다. 친하지 않은 사람부터 친척들까지. 300+ 이라는 숫자를 난생처음 봤다.

“이번 영상 반정부에서도 분명 봤을 텐데. 어떡할래. 스티커랑 가명 쓴 보람도 없이 신상 노출됐는데.”

“죄송합니다.”

호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죄송하다는 사과를 제외하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호수에게도 미안했지만 호은은 이 사실을 알게 될 도인호가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홍보부 영상 촬영할 때부터 호은의 얼굴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이놈의 영상 반응은 또 왜 이렇게 좋은 건지.”

호수는 벌써 백만이 넘은 영상 조회 수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영상의 반응이 좋았다. 지난번 63 스퀘어로 사람들에게 나빠진 인식을 개선한 수준이 아니라 해당 멤버들로 연예계 데뷔라도 해야 하는 판이었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호은과 에스퍼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시간이 지난다고 잠잠해질 수준이 아니다.

“에스퍼는 신변이 공개되어도 스스로 지킬 힘이 있지만, 너는?”

“저도 어릴 때 운동 좀 배웠습니다만…….”

“하. 운동. 그럼 그 운동 실력으로 반정부 때려눕히지, 그랬어. 왜 맞고만 있었냐?”

“죄송합니다.”

“한 달 동안 혼수상태였던 놈이. 그걸 까먹고 있어?”

호은은 반정부에게 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확실히 일반인인 자신은 에스퍼와 싸우게 되면 10분도 안 되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래도 운동한 게 있으니까 30분은 버티려나?

“약한 가이드는 단련시켜 주면 되고. 타깃이 된 건 역으로 이용하면 되지 않나요?”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호은이 뒤를 돌자 은발 머리카락의 남자가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었다.

“어? 백우경 에스퍼?”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호은이 손바닥을 쳤다. 미디어에 노출된 에스퍼 중 한 사람이다.

한국 에스퍼를 대표하는 자리에는 항상 백우경이 있다. 잘생긴 외모로 에스퍼와 전혀 관련 없는 CF 촬영도 했으며 그의 인기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도 견줄 수 있는 수준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이드 공단 이사장 백우경입니다.”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백우경이 손을 내밀었다. 호은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어느새 일어났는지 호수가 호은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낚아챘다.

“이사장이라는 놈이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네. 왜 왔어?”

“사적으로 온 마음도 있지만 일하려고 온 거예요.”

백우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권호은 가이드 인기가 많아졌던데.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말이죠.”

“뭐?”

“권호은 가이드. 얼굴 공개하고 영상 하나 더 찍읍시다.”

“네?”

“다음 달부터 우리 정부도 공식적인 가이드 검진을 실행할 예정입니다. 언제까지 국민 몰래 혈액 검사로 헤모글로빈 수치만 볼 수 없는 법이니까요.”

호수는 백우경의 말에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거절하려는 건지 앞으로 나와 백우경의 가슴팍을 밀었다.

“이놈은 안 해 줄 거니까 나가.”

“이사장으로서 업무 지시입니다. 홍보부의 목적은 반정부 소탕. 미끼를 키워야 반정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미…… 미끼요?”

“네. 권호은 가이드. S급 가이드라면 우리 측에서도 대우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D급 가이드라면─”

백우경의 말에 뭔가 떠올랐는지 호수의 눈썹이 까닥였다.

“미끼 역할로 최고네요. 일에 휘말려도 그 정도 등급은 아깝지 않고. 반정부에서도 망설임 없이.”

“…….”

“당신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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