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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4화 (44/129)

44화

새벽 공기는 서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도인호는 자신의 품에 들어와 있는 이의 몸을 더욱더 끌어안았다.

따듯한 피부의 체온. 호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호은은 모를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입술을 뭉개듯 목덜미에 비비던 행위를 멈추고 도인호는 호은이 깰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호은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 이 시간이 도인호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도인호는 침실에서 나와 간단하게 씻고 익숙하다는 듯 부엌으로 향했다. 구역질 날 정도로 맡기 싫었던 음식의 냄새를 매일 아침 맡게 될 거라 과거의 자신은 전혀 생각 못 했을 거다.

전문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정도로 일정한 속도와 굵기로 채소를 써는 도인호는 어제 주의 깊게 봤던 레시피를 떠올리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냄비에 참기름 적당량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아 준다. 달걀을 풀어 달걀물을 만들어 순서대로 요리를 진행하자 그럴싸한 고깃국의 모양새가 나왔다.

-지이잉

뒷주머니에 울리는 진동에 도인호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도인호입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던 도인호는 호은이 잠들어 있는 침실을 살짝 쳐다봤다. 침실 안은 조용했다. 호은이 자는 걸 확인한 도인호는 반찬을 식탁에 내려놓고 거실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이어받았다.

-네. 도인호 사원. 정보부입니다. 요청하셨던 문의 답변으로 연락드립니다. 반정부 타이거에 메인 멤버는 현재 다섯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인호 사원이 말한 바람 에스퍼에 관한 정보는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몰라 다섯 명의 반정부 프로필 관련 자료 메일로 보내 드리니 참고 부탁합니다.

“네.”

도인호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만히 쥐었다.

“이런 건 좋네.”

사원증이 없었을 때는 다른 부서에 직접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도인호라는 이름 세 글자에는 어느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원증이 생기고 담당 부서가 생기니 권한 또한 달라졌다.

에스퍼로 10년 동안 살면서 사원증을 어디에다 쓰는지 몰랐다. 본사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지, 업무 요청을 할 때 부서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했는지, 팀 가이드를 배정받으려면 팀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그 무엇도 몰랐기 때문이다.

난관에 팔을 기댄 도인호는 고요한 인천 지사를 내려다봤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잘 잤어?”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부터 베란다로 향하는 걸음 소리까지 다 들렸지만 도인호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호은이 아직 졸린 건지 눈을 비비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네. 형은요?”

“어제 잠을 설쳐서 못 자나 했더니.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

영상을 보내고 이틀이 지났다. 어제 최종본을 받아 든 호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다가도 심사에 떨어지면 어쩌지 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응 괜찮아.”

도인호는 베란다 문을 닫았다.

지난번 마주쳤던 반정부 월랑의 뒤를 좀 밟아 보려고 했으나 수확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63 스퀘어 현장에 월랑은 없었으며 호은을 처음 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63 스퀘어때 최유빈 대신으로 들어간 호은은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다. 월랑의 반응은 반정부 내부에서 혈액을 채취한 가이드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도인호는 호은의 목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주삿바늘은 없어진 지 오래다. 오히려 호은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도인호가 만든 흔적만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도인호의 심기가 뒤틀렸다.

“인호야, 왜?”

“……아닙니다.”

수저를 든 채 호은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호은이 갸웃거린다.

도인호는 반찬을 들어 호은의 입에 넣어 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양 볼이 가득 찬 호은이 음식을 우물거리는 모습이 꼭 다람쥐 같다.

식사를 끝내고 호은은 뒷정리한 뒤 평소의 루틴을 끝내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도인호와 다르게 정말 아무런 일이 없는 호은은 숙소에 남아 있는 게 눈치 보여 사무실로 출근했다.

지난 이틀 동안 호은이 느낀 건 사무실 사람 중 초록색 사원증을 찬 홍보부 직원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거다.

신설되었다는 홍보부는 호수가 알려 줬던 6명의 멤버를 제외하고 지니나 다른 에스퍼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기획부로 홍보부 영상 건이 해결될 때까지 이 사무실에 있는 거라 했다.

“저 지니 씨. 도와드릴 일 있을까요.”

호은은 그나마 친근감이 생긴 지니에게 다가가 일을 요청해 간단한 사무 보조 업무를 맡았다.

“호은 씨도 사무실 출근 안 하셔도 되는데. 나중에 반정부 소탕 현장 업무 때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시는 게 낫지 않나요?”

“준비요?”

“이런 건 사실 담당 사수가 알려 줘야 하는데.”

“제가 담당 사수가 있나요?”

“네. 홍보부 배연우 대리님이요.”

“네? 처음 들어 보는데.”

호은은 담당 사수라는 말에 놀란 눈이 되었다. 안 그래도 다른 직장인들 보면 사수가 업무를 알려 주고 업무도 나눠 주던데. 나는 왜 회사원 같은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거지? 라는 의문을 가졌던 참이다.

사수가 생기면 이제 의미 없이 눈치 보며 지뢰 찾기 하는 이 사무실도 끝이라는 건가. 상기된 호은의 볼에 지니가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오늘 회의하시면서 홍보부 전체 직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3시에 회의 있다고 하셨죠. 기획부도 가나요?”

“아니요. 회의는 홍보부만 참여합니다.”

지니는 말을 끝내고 엑셀 파일이 열려 있는 호은의 모니터를 봤다.

“기획부 일은 그만 도와주시고 회의 시간까지 휴식 시간이라 생각하고 있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도. 도와드리던 거는 마저…….”

“괜찮습니다.”

지니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단호하게 느껴졌다. 호은은 지니의 태도에 할 수 없이 컴퓨터를 껐다. 출근한 지 아직 한 시간밖에 안 되어 남은 시간 동안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만만한 건 카페인가.’

호은은 사무실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좋네.”

가을이 오려는지 푸르던 나무 잎사귀가 단풍으로 물들여 간다. 이능력자 협회에도 붕어빵을 팔려나.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호은은 카페에 들어갔다.

“아이스 고구마라테 하나 주세요.”

주문후 음료를 받은 호은이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협회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대로 물경력이 되어도 괜찮은 건가 호은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뒤쪽이 소란스러워진다.

“헉 괜찮으세요.”

“네……. 뭐 익숙하니까요.”

커피를 받은 남자가 그 자리에서 쏟은 건지 비어 있는 잔을 든 채 허망하게 서 있었다. 보고 있으면 힘이 빠질 정도로 굽은 허리와 맥없어 보이는 남자는 지난번 복도에서 마주쳤던 사람이다.

“그러게. 내가 주문한다고 했잖아. 멍청아.”

“미안…….”

남자를 책망하는 듯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다시 카운터에 주문을 넣었다.

“초록색…….”

호은은 셔츠 깃 안에 보이는 초록색 줄에 혼잣말을 뱉었다. 저 사람이 그럼 배연우라는 사람인가?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어깨 정도 내려와 반묶음 한 남자를 힐끔 쳐다보던 호은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저 사람이 내 사수라고 치면 인사를 건네야 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고……. 내가 아는 척 다가가는 게 이상하지 않나.’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던 호은은 숙였던 고개를 조심히 들었다. 두 사람은 테이크아웃 하러 온 건지 커피를 받고 바로 나갔다. 다행히 자신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아 호은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수그렸던 몸을 폈다.

“조금 무서워 보이네.”

호은은 좋지 못한 배연우의 첫인상에 달콤한 고구마라테로 위로하듯 음료를 마셨다.

점심이 되자 연락이 온 도인호의 전화를 받은 호은은 같이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갔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도인호이기에 도서관은 두 사람이 시간 보내기 안성맞춤이었다. 세 시가 되기 전 읽던 책을 정리하고 두 사람은 대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호은과 도인호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레오와 최유빈이 두 사람을 반겨 줬다. 3시 정각이 되자 복도 문이 열리고 남운수와 배연우가 들어왔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남운수에게만 답인사가 돌아왔다.

-쿵

남운수가 의자에 앉자 휠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의자가 미끄러지며 남운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 번 마주쳤는데 저 사람 정말 운이 없네.’

괜찮다고 말하는 남운수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과 반대로 배연우는 콧방귀를 뀌고 자리가 앉았다.

“다들 왔네.”

10분쯤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호수가 등장했다. 여전히 혼자 조명을 독차지라도 하는 건지 뽀얀 얼굴의 호수는 새로운 패션인지 스카프를 두르고 회의실 상석에 앉았다.

“다들 기다렸던 심사 결과를 알려 주도록 하지. 해당 영상이 내일 6시 이능력자 협회 공식 너튜브에 올라갈 영상이다.”

호수가 빔프로젝터 전원을 켜자 대기 중인 영상 화면이 보였다.

[신입 가이드 G의 Vlog] - 실존합니다! 신입 가이드의 에스퍼 관찰 일지.

-하나둘 셋. 72기 인턴 파이팅!

-현장 지원 부서의 귀염둥이 K입니다. 안뇽, 안뇽.

-가이딩 센터에 근, 근무 중인. 어흑 저 너무 떨려요. 다시 가, 가도 될까요.

-민원부 에스퍼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입니다! 컬러풀.

-지지직

통통 튀는 배경 음악과 함께 여태까지 호은이 촬영한 모습이 한 컷씩 빠르게 지나갔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여 주는 예고편 같은 편집이다.

호은의 요청대로 가이드 이름 부분은 묵음 처리되고 자막으로 알파벳만 표시됐다. 얼굴 또한 동물 스티커를 붙여 김세희와 류윤재 둘 다 신상이 유출되는 요소는 없어 보였다.

마지막 노이즈 화면과 함께 한동안 자주 들락거렸던 회의실의 모습이 보인다. 초록색 사원증을 걸친 호은의 모습이 얼굴을 제외한 상체로 화면을 채운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신입 가이드 G라고 합니다. 어……. 오랜만에 영상을 찍으니까 조금 떨리는데요. 저와 에스퍼 E와 함께 가이드와 에스퍼가 무슨 일을 하는지. 신입 사원의 입장으로 영상에 한 번 담아 보려고 합니다.”

호은이 여태까지 촬영한 것에 배경 음악과 자막 등 적절한 편집을 통해 15분의 짧은 시간 동안 영상이 알차게 담겼다. 영상이 나오는 동안 1팀과 2팀의 반응은 긍정적이라 호은의 가슴이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3팀. 축하한다.”

호수의 말에 호은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성취감이 들었다. 내가 드디어 이 회사에 와서 무언가를 했구나. 그 설렘으로 기분이 붕 뜬 것만 같았다.

“뭐. 내가 말 안 했지만. 다들 알고 있더라고? 이번 영상이 채택되면 요구 사항 하나 들어주기로 한 거. 3팀은 뭐 할지 정했나?”

호은과 도인호는 서로 시선을 맞췄다. 요구사항은 레오와 최유빈을 만난 순간부터 정했었다.

“2팀. 육아 휴직이요!”

“1팀이랑 3팀 둘이서 할 수 있겠어?”

“1팀 두 명으로도 충분합니다.”

호은이 답하기 전 배연우가 빈정거리며 대답을 채갔다. 호수는 1팀의 동의 아닌 동의를 들으며 2팀을 쳐다봤다. 당황한 표정의 두 사람이 호은과 도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런 가족 영화 같은 상황을 바란 적 없는데. 그래. 알겠다. 상부에는 내가 전하도록 하지.”

호수는 코끝을 매만졌다. 그의 말이 끝나자 레오는 도인호에게 와락 안기려 했다. 도인호가 팔을 뻗어 막지 않았다면 더 완벽한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고마워요. 호은 씨.”

“아니에요. 나중에 아기 태어나면 꼭 자랑해 주세요.”

훈훈한 공기를 못 견디기라도 하겠다는 듯 심통 난 표정으로 배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수는 나가는 배연우와 남운수를 내버려 둔 채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시선은 환하게 웃고 있는 호은에게 향했다.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의 말을 유일하게 공감하는 건 이 자리에서 도인호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당 영상은 대한민국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될 거라는 걸 호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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