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호은과 도인호가 이장댁에 돌아오자 블랙이 두 사람을 반겨 줬다. 호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세호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 이장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
“그랬군요. 5초 이상 능력을 쓰시다니.”
호은은 하준이 왜 기절했는지 블랙에게 설명해 주며 반정부와 마주친 이야기를 전달해 줬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도인호는 한 발짝 멀어진 상태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아니 애초에 화염의 능력이 아니라 하준과 같은 염력이었다면…….’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 자책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도인호를 지배했다. 자신의 이능력이 사람을 다치기에는 최적화된 능력이지만 구하기에는 어려운 능력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인호야. 어디 안 좋아?”
“……괜찮습니다.”
블랙과 대화를 끝낸 건지 호은이 도인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도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희 일단 본사로 복귀할까요? 하준 팀장님은 검사도 받아야 할 것 같고.”
블랙이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하준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비게이션에 본사 주소를 입력한 블랙은 서둘러 이능력을 발동했다. 서울 본사의 좌표는 정확히 알고 있는 건지 낮과 다르게 블랙은 실수 없이 본사 앞에 차를 주차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 쪽 팀 가이드와 함께 가도록 할게요.”
차에서 내리자 블랙의 연락을 받고 온 건지 김미영이 집에서 나온 것 같은 복장으로 본사 앞에 서 있었다. 호은은 어쩐지 자신이 제대로 케어하지 못해 이런 사달이 나온 것 같아 불편한 마음으로 김미영을 쳐다봤다.
“이런 모습 처음 보네요.”
“네?”
“매번 간단한 현장만 나가서 다칠 일이 없었거든요.”
“아…….”
“이러면 내가 뭐가 돼.”
김미영은 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준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던 직원들은 그를 들것에 옮겨 놓고 이동했다. 김미영은 하준의 손을 잡은 채 같이 따라나섰다.
“나중에 일 마무리 되면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네. 블랙씨도 고생하셨습니다.”
민원부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 두 사람은 주차장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자연스럽게 도인호가 앉았다.
“운전해도 안 피곤하겠어? 내가 할까?”
“전 괜찮습니다. 형이야말로 물에 빠져서 고생하셨잖아요.”
“아니 뭐. 물에 빠지는 건 익숙하고.”
“…….”
아까도 생각했지만 도인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냇가에 나갔을 때부터 저 상태였지. 호은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살포시 감았다.
도인호가 왜 기분이 나쁜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도 다친 사람 없고 현장도 무사히 마무리했고. 답을 내리지 못한 호은은 결국 어색한 침묵을 없애기라도 하듯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재즈풍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가는 차 안에서 호은은 창밖을 쳐다봤다.
“인호야, 말 안 해 줄 거야?”
“…….”
“나는 인호가 왜 꼭 화난 것처럼 보이지.”
말없이 한참을 달리던 자동차는 어느새 인천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프 능력이 있는 신호등을 지나가기만 하면 인천 지사에 도착이었다.
“화라……. 네 화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형이 다칠 뻔했잖아요.”
“어?”
“형을 구한 건 하준 팀장님이잖아요. 제가 아니라. 그게 너무 화납니다.”
“무슨 말이야. 네가 반정부랑 싸워 준 덕에 하준 팀장님도 나한테 집중할 수 있었던 거지.”
빨간불로 멈춰있던 자동차는 파란불이 되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능력품인 신호등 앞으로 지나가자 자동차는 어느새 인천 지사 앞에 있는 도롯가를 달리고 있었다.
“형한테 아무 도움 안 된 제가 너무 화가 나요.”
도인호는 분노를 표출할 곳이 없다는 듯 애꿎은 핸들만 꽉 잡았다. 호은은 그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기 전 도인호의 뺨에 흐르는 물줄기에 입을 벌렸다.
“왜, 왜 울어.”
길 한복판에 차를 멈춰 세운 후 도인호는 고개를 숙였다.
“저 이제 싫어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화염으로는 형을 구하지 못하잖아요. 형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요.”
호은은 손을 들어 도인호의 오른쪽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만지며 물기를 닦아 주자 도인호는 고양이처럼 호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내가 왜 너를 싫어해.”
“그러면요?”
“어……. 동료로서 좋아하지. 우리 파, 파트너잖아.”
“나 좋아해요?”
인천도 비가 왔던 건지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해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호은의 앞에 있는 도인호의 노란 눈은 유난히 반짝거려 달이 도인호의 눈동자 안에 숨었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응.”
도인호는 좋은 사람이다. 자기 능력으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눈물을 흘릴 정도니. 호은이 생각하는 착한 사람의 범주에 어느새 도인호도 들어간 셈이었다.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 그러니까 나는 그런 도인호를 좋아한다.
눈앞에 남자가 말한 의미와 다른 의미였지만, 호은이 다정스럽게 도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고생했어. 인호야.”
도인호는 호은의 그 한마디에 안심한 듯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호은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 사실에 추락하고 있던 기분이 다시 하늘 위를 올라간다. 도인호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걸 호은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정한 손길은 계속 이어졌다.
그 손길에 도인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 내가 울면 호은 형이 이렇게 나만 바라보게 되는구나.’
도인호의 새카만 속내를 모른 채 호은은 눈물을 멈춘 도인호에 안심한 듯 웃었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이능력을 쓴 도인호에게 호은은 손만 잡던 평소와 다르게 도인호를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신체가 닿는 면이 많을수록 직접 가이딩 양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두 사람은 잠들었다.
***
촬영된 캠코더를 들고 두 사람은 홍보부 회의실로 들어갔다. 호은이 캠코더에서 메모리 카드를 뽑아 노트북에 연결하자 촬영한 영상 파일이 화면에 떴다.
“사용하실 컷 부분의 재생 시간과 안에 들어갈 텍스트 내용이나 참고 자료가 있다면 여기에 적어 주시면 됩니다.”
회의실에는 호은과 도인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지니가 두 사람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 종이에 적은 내용대로 영상 편집이 된다는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편집한 최종본은 두 분에게 먼저 확인받은 뒤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상 편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호은은 지니의 말에 안도했다. 다행히 영상 편집은 기획부 직원이 해 주는 거구나.
도인호에게 자신만만하게 ‘나 너튜버야.’라고 말했지만, 편집 부분에서는 컷 편집과 음악을 넣는 게 다였던 호은이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촬영한 영상을 보며 어느 부분을 넣을지 고민하며 지니가 나눠 준 종이에 영상 시간대를 적었다.
“이 부분도 빼는 게 좋겠습니다.”
“응? 이거 가이드 소개하는 부분에서 다 같이 인사하는 장면이라 넣고 싶은데.”
“형 얼굴이 나와서 안 됩니다.”
“어……. 여기 인턴 동기들이랑 나랑 그리고 센터 직원들까지 있어서 열 명이 넘는데 괜찮지 않을까?”
호은의 말에 도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는 의사 표명이다. 호은은 어쩔 수 없이 도인호가 말한 부분을 종이에 적었다.
컷 분할과 영상 흐름을 어떻게 가져갈 건지 콘셉트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5시가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카페도 가고 밥도 먹고 왔다지만 정말 오랜 시간을 회의했구나 싶어 호은은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끝이다.”
시간을 할애한 만큼 좋은 결과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호은은 메모리칩과 지니가 준 종이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회의실을 나와 홍보부 사무실에 남아 있는 직원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기 위해 걷던 와중 호은은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바라봤다.
“인호야. 저거 초록색 사원증…….”
자신들과 같은 초록색 사원증을 찬 흑발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철푸덕
남자는 잘만 걷다가 풀어진 운동화 끈을 밟고 넘어졌다. 남자는 넘어진 게 익숙하다는 듯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어……. 저기 핸드폰.”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넘어지면서 같이 바닥에 떨어졌고 데구루루 굴러 호은의 앞에 떨어졌다.
핸드폰을 돌려주기 위해 호은이 자신의 앞에 놓인 핸드폰을 들자 양 모서리마다 스크래치가 나고 금이 가 있는 액정이 호은을 반겨 줬다. 몇 번을 떨구면 이 정도로 핸드폰을 망가트릴 수 있는 거지?
“감사합니다.”
호은의 앞으로 온 남자는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남자는 다시 두 사람을 지나쳐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남운수.’
호은은 남자의 사원증 이름을 되뇌었다. 방금 본 남운수는 내민 손부터 얼굴까지 멍과 생채기로 가득했다. 맞은 상처는 아니고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생긴 상처 같은데.
“신경 쓰여요?”
“응? 아니야. 상처가 많길래.”
“에스퍼니까. 금방 나을 겁니다.”
도인호의 말에 호은은 남운수가 에스퍼인 걸 알아차렸다. 초록색 사원증이면 홍보부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저 사람이 못 봤던 두 명 중 하나인가.
일단은 서류제출이 먼저라 호은은 생각하던 걸 멈추고 홍보부로 걸음을 뗐다.
***
-안녕하세요. 이제 막 정직원이 된 권호은입니다. 제 회사 생활 영상을 찍어 보려고 하는데요.
어두컴컴한 방. 노트북 화면에 익숙한 호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영상 속에는 호은의 모습이 아닌 이능력자 협회 인천 지사 건물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은 에스퍼만 공개하나 보네.”
호수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칙대로라면 도인호같은 결정체 이식자 또한 얼굴이 나오면 안 됐다. 그러나 모든 에스퍼 중 그만 나오지 않는다면 이상하다고 판단한 건지 꽁꽁 숨겼던 도인호의 얼굴이 모자이크 없이 나오고 있었다.
“뭐예요. 이번 홍보부 영상?”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우경이 방에서 나왔다. 호수는 백우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영상을 빠르게 넘겼다.
“볼일 다 봤으면 꺼지지.”
“아직 가이딩 부족하거든요. 풋풋한 신입 가이드가 그러는 것처럼 꼭 안아 주고 같이 자 주세용.”
“미친 새끼.”
호수는 신경질적으로 백우경을 쳐다보고 그의 맨몸에 인상을 구겼다. 히죽 웃은 백우경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대충 주워 입고 호수의 옆에 앉았다.
“꺼지라고.”
“일 얘기 하려고 앉은 거예요.”
“뭔데.”
“권호은……. 가이드 등급 검사 다시 하죠.”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백우경이 진지한 얼굴로 호수를 쳐다봤다.
“D등급이 맞다면 도인호랑 붙여 놓을 수 없죠. 급이 안 맞는데. 어떻게 D가 S를 가이딩하나요.”
“파장이 높다고 말했잖아.”
“아무리 파장이 높아도 D급이 S급 폭주를 막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한 달 혼수상태가 말해 주잖아요. 뭐 늙은이들은 속였을지 몰라도 저는 못 속여요.”
“입 아프게 몇 번을 말하는지. 그날은 도인호가 에스퍼 강화제 먹어서 소모량이 많았던 거고.”
백우경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호수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백우경의 목덜미를 잡았다.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같이 코 자요. 재검사 부분은 일단은 속아 넘어가 줄 테니.”
호수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주며 노트북을 닫았다.
“비켜.”
“흐응. 성질도 참.”
자리를 벗어나려는 호수의 뒤를 백우경이 졸졸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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