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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39화 (39/129)

39화

같이 참여하지 못하게 된 민원부 팀원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네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김미영 팀장님은 안 가시나요?”

“전 원래 현장에 안 따라가요. 오늘은 몸도 안 좋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김미영을 보며 호은은 걱정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등을 김미영의 이마에 갖다 대려는 순간 도인호가 부드럽게 호은의 손을 잡았다.

“병원이라도 가시는 게 좋겠네요.”

붙잡힌 손을 바라본 호은은 아차 싶었다. 평소 도인호를 만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김미영 팀장님께 불편한 행동을 할 뻔했네.’

도인호가 타이밍 좋게 잘 막아 줬다고 생각하며 호은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가 김미영 팀장 데려다줘.”

식은땀으로 머리가 젖어 있는 김미영을 유심히 바라본 하준이 레드에게 말했다. 레드는 김미영을 부축하려는 듯 다가갔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하며 혼자 사무실에서 나갔다.

“괜찮으시려나.”

“그러게요. 일단 이동할까요?”

호은의 말에 하준은 멀어지는 김미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화제를 돌렸다. 블랙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더니 출발하자고 외쳤다.

네 사람은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블랙은 SUV 검은색 벤츠의 운전석을 열었다. 검은색 부츠와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그녀와 잘 어울리는 터프한 느낌의 차였다. 차 안의 공간도 넓고 천장도 높은 편이라 도인호도 불편하지 않게 앉을 수 있었다.

“이능력으로 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뒷좌석에 탄 호은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네. 이 차가 제 이능력품입니다.”

“헉, 정말요?”

“순간 이동 이능력은 기본적으로 좌표에 대한 이해만 잘하면 쉽다고 하는데. 저는 어려워서요. 그래서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이능력을 넣어 조금 더 편하게 능력을 쓰고 있어요.”

블랙은 수줍게 웃으며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현장 주소를 입력했다.

“자 그럼 가 볼까요!”

시동이 걸리고 블랙은 액셀을 밟았다. 차가 움직인다 생각했을 때 빠른 속도로 주변이 지나갔다. 얼마나 빠르냐면 사물의 형태가 보이지 않고 검은색 배경에 형광등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하지 않은 순간 이동은 호은의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도인호가 호은을 자신의 품에 가둔 채 등을 두드려 줬다.

“도착했습니다.”

호은이 차 시트에 기대 축 늘어져 있을 때 어느새 내린 도인호가 호은이 앉은 좌석의 문을 열고 내리는 호은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으응.”

코끝으로 향긋한 풀 내음과 동시에 소똥 냄새가 난다. 사방이 논두렁인 길 한복판에 멈춘 것을 보며 네 사람은 주변을 둘러봤다. 높은 건물 하나 세워지지 않아 뻥 뚫려 있다.

‘상주 공성면 우하리.’

팻말을 확인하자 엇비슷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블랙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내비게이션이 오작동했나. 하하. 경치 구경할 겸 드라이브할까요?”

블랙의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동차는 다시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장 집을 찾는 건 쉬웠다. 파란색 지붕으로 단독 주택 형식으로 만들어진 집은 낮게 지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파란 지붕의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텔레비전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집 밖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였다.

“도착했습니다!”

블랙이 집 마당에 주차하자 하준이 조수석 밑에 있던 쇼핑백에서 유니폼을 건넸다. 혹시 컬러풀 레인저의 유니폼을 주나 싶었지만, 바람막이 재질의 연한 베이지색 점퍼가 호은을 반겨 줬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어 긴소매로 되어 있는 점퍼를 입으면 더운 거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기능성 소재였는데 땀을 흘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점퍼 뒷면은 Korea Esper Association 영문자가 원형 모양으로 쓰여 있고 원 안에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이장님! 이능력자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하준이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70살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으이. 서울 양반들 왔는감?”

“안녕하세요. 민원 요청하신 농작물 복구 작업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하준이 이장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피해 농작물은 산 앞마당에 있는 땅으로 장마철로 인하여 산사태가 있었고 현재 밭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호은은 캠코더를 들고 하준과 이장을 촬영했다. 이장은 목장갑과 짚으로 엮인 밀짚모자를 주었다. 블랙은 모자와 장갑을 익숙하게 착용하더니 마지막으로는 아웃도어 선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우아한 동작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씩 미소를 짓는 그녀가 영상에 제법 멋지게 담긴다.

“현장으로 가 볼까요?”

마지막으로 반뜩거리는 장화로 갈아신은 뒤 이장이 말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제가 촬영할까요? 팔 안 아파요?”

“응. 아직 괜찮아! 나중에 아프면 바꾸자.”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는 호은을 보며 도인호가 안절부절못한 채 말을 건다. 스튜디오 방송용 카메라도 아닌 작은 캠코더일 뿐인데도 호은이 계속 들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호은이 촬영하고 있으니 호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라 안심이 됐지만 역시 호은이 계속해서 저 캠코더를 들고 있다간 손목에 상처라도 입을 것 같아 걱정되는 도인호였다.

호은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배를 붙잡고 웃었을 거다.

“제법 심하네요.”

현장에 도착한 네 사람은 엉망이 된 밭을 봤다. 옥수수밭으로 보이는 곳은 산에서 떨어진 흙으로 덮여 쓰러져 있었다.

“여기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하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란색 커다란 천을 가져와 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펼치더니 하준은 옥수수밭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준이 흙에다 손을 가져다 대자 푸른색 빛이 흙을 감싼다.

“뛰어올라라 fly high.”

“크흡.”

호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게임 스킬명 같은 걸 외치는 에스퍼는 처음 봤다. 캐릭터가 확실해 재미있어 호은은 이 장면은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촬영에 집중했다.

-두둥실

흙과 돌이 한데 엉켜 하늘 위로 올라왔다. 저게 바로 염력이구나. 감탄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호은은 흙과 돌이 천천히 공중 위에서 움직이는 걸 바라봤다. 파란색 천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농작물은 철퍼덕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허억. 허억.”

하준은 땀을 훔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만. 타임.” 그렇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어디 안 좋으세요?!”

호은이 캠코더를 도인호에게 넘겨주고 하준에게 다가갔다. 현장에 들어가기 전 하준과 블랙의 정보는 가이드 워치에 연동하여 그들의 가이딩 수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가이딩이 부족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제가 사실 5초 이상 들지 못해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옮기면 될 것 같습니다.”

하준은 호은을 쳐다보기 민망하다는 듯 모자챙을 잡아 내렸다.

“아. 그럼 잠깐 쉴 겸 물 가져올게요.”

5초 이상 이능력을 못 쓴다, 호은은 에스퍼가 아니었기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지난번 반정부와 같은 현장에 하준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입술이 바싹 말랐다.

하준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호은과 도인호는 마을로 돌아갔다.

“인호야. 민원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위험하지 않은 현장을 찾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김미영 팀장이 말한 말도 사실이야? 잡무부라 불리는 거.”

도인호는 호은이 걷는 속도로 맞춰 걸었다. 매미 소리가 들리는 시골은 평화롭기 짝이 없다. 현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풍경이다.

“민원부 직원들이 각자 이능력품 가지고 있는 거 보셨나요.”

“이능력품? 그러고 보니 하준 팀장님 빼고는 다들 있었지.”

“이능력품은 에스퍼의 이능력을 담을 수도 있지만. 이능력 컨트롤을 못 하는 에스퍼를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도인호는 민원부에 들어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능력이 불완전한 자들의 집합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 몸이 이능력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잡무부라고 불리는 줄은 몰랐지만. 위험한 현장을 맡지 못할 정도로 약한 에스퍼로 구성된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호은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에스퍼는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 같을 줄 알았다. 눈으로 봤을 때 화려하고 커다란 능력을 쏟아 내는 그런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 처음에는 신기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어. 컬러풀 레인저니 뭐니. 코드 네임 맞춘 것도 그렇고. 방금 스킬명 말하던 것도 사실 웃을 뻔했다?”

도인호는 현장을 찾을 때 고민했다. 레벨이 낮은 현장이라 호은이 실망하지 않을까. 호은이 이번 영상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건 옆에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C급 에스퍼가 팀장으로 있는 현장이 아닌 A급 에스퍼가 팀장으로 있는 현장 정도는 가야지 호은이 원하는 영상을 촬영할 수 있었을 텐데.

호은의 웃는 모습을 볼 것인가. 아니면 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가. 도인호는 고민 끝에 호은의 안전을 택했다.

두 사람은 구멍가게 앞에 멈춰 섰다.

“물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 갈까?”

“?”

“방금 팀장님이 이능력 쓴 거 봤지? 그 많은 흙을 들던 거. 본인은 몇 초밖에 못 든다고 말씀하셨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하려고 했으면 몇 초가 뭐야, 몇 시간은 걸릴 작업이잖아.”

“…….”

“잡무부라고 깎아내려질지 몰라도. 일반인에겐 에스퍼가 필요해. 잡무부니 뭐니 해도 저들은 에스퍼야.”

호은은 창피함에 얼굴을 가리던 하준을 떠올렸다. 저들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했다. 그들은 누구와 비교하며 자신을 낮추고 있는 걸까.

“아이스크림 좋은데요.”

도인호가 답하자 호은이 샐쭉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도인호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표정을 굳혔다. 호은은 역시 상냥하다. 다른 사람이 호은의 따스한 눈길을 받고, 다정한 말을 듣는 걸 직접 경험하자 기분 나쁜 감각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시죠.”

도인호는 뒤에서 몰래 따라오던 민원부 두 사람을 저격하며 말했다.

“저도. 호은 형도 두 분의 이능력에 대해 뭐라 할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기척을 완벽하게 숨겼던 두 사람이지만 도인호에게 금방 들키고 말았다. 도인호는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경고한 뒤 호은이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블랙은 양손을 가슴에 얹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건 하준도 마찬가지인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고는 서로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대박! 아니 권호은 가이드님. 완전 엔젤 아니에요? 나 저런 가이드 처음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매정한 소리만 듣다가 이런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방금 도인호 에스퍼님 카리스마에 살짝 무서웠긴 했지만. 그래도 따라오길 잘했어요.”

“그렇군요. 일단 자리로 복귀할까요? 두 분이 돌아오시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능력을 보여 드리고 싶군요.”

“좋아요!”

호은이 했던 말을 되새김질하며 두 사람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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