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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38화 (38/129)

38화

가만히 대화를 듣던 김미영은 호은이 들고 있는 캠코더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잠깐만. 권호은 가이드? 캠코더 내려놓으세요.”

“……? 저는 찍히는 거 괜찮습니다만. 김미영 팀장님은 모자이크 처리해 달라고 할까요?”

“하준 팀장님은 조용히 있으세요. 현장 촬영은 허락할지 몰라도 민원부 에스퍼 전원이 나오는 건 안 되죠! 그 거지 같은 콘셉트! 아니, 신상 문제가 될 수도 있고요.”

김미영의 단호한 말에 호은은 시무룩해져 캠코더를 내려놓았다. 반정부에는 전통 탈을 쓴 콘셉트였다면 이능력자 협회에는 컬러풀 레인저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호은이 캠코더를 만지작거리자 도인호가 어깨를 토닥여 준다.

김미영은 두 사람의 모습에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쟤네 뭐야? 사내 커플이야? 어디서 가이드와 에스퍼가 저리 다정한 그림을 만들고 있냐는 말인가.

김미영은 민원부를 떠올렸다. 무미건조한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옆에 앉아 있는 하준이 자기 어깨를 두드려 준다 생각하니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외모는 괜찮을지 몰라도 같은 부서의 사람이랑 사내 연애? 차라리 한강에 빠지는 게 나을 정도로 싫었다.

“오늘 저희가 갈 현장은 어떤 건가요?”

“사실 평소에는 대통령 엄호나 한국을 파괴하려고 작당한 녀석들을 대상으로 암살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만. 흠흠, 저희가 비수기라 하나 들어온 일이 이거네요.”

호은은 하준이 내민 의뢰서를 확인했다. 현장 지역은 상주로 장마철 농작물 피해로 인한 농작물 구제 업무였다.

회의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팔 굽혀 펴기를 하는 직원부터 이제는 칼을 휘두르며 게임 스킬 같은 이름을 중얼거리기까지 하니 말이다.

호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사람들이 보고 싶은 자극적인 모습은 컬러풀 레인저의 모습이다. 실제로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모습들이 영상으로 보였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화제성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소재였다.

하지만 이번 홍보부의 목적은 에스퍼와 가이드의 인식 개선이다. 자극적인 영상이 아니라.

“마음에 드네요.”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해 정적만 감돌던 회의실. 도인호가 턱을 괴며 말했다. 창피함에 목까지 피부가 붉어져 있던 하준은 죄인처럼 숙였던 고개를 들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도인호를 쳐다봤다.

“저도 좋아요. 에스퍼라는 존재를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호은마저 긍정적으로 말하자 하준의 눈이 촉촉해졌다. 나이를 먹었더니 감성적으로 변한 걸까? 저들은 의뢰를 긍정한 거지만 하준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가이드에게 치이고 같은 에스퍼들에게 무시당하고. 민원부 에스퍼들끼리 컬러풀 레인저라는 팀명을 만들고 코드 네임을 정했던 이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실에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퍼라 오감이 예민해져 고통스러운 건 같은데 능력은 보잘것없다. 왜 에스퍼로 태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 이런 능력이 정말 에스퍼가 맞는지.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과 자기혐오는 민원부 팀원들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매일매일 쳇바퀴 돌아가는 일상을 버텨봐도 인정받을 수 없다. 그 사실이 모든 의욕을 앗아갔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 같다. 아니 다르다.

“좋은 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은의 감사 인사에 하준은 운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다며 눈을 비볐다. 하준은 얼굴을 쓸던 손을 내리고 호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다정한 미소를 지어 준다.

순간 따라 웃을 뻔한 하준은 큼큼 목을 다듬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카리스마 넘치는 팀장의 역할을 하고 싶었기에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현장에 필요한 것들은 준비하겠습니다.”

하준이 회의실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미영이 한숨을 뱉었다.

“민원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오신 것 같은데. 저희가 잡무부라고 불린다는 거 알고 있나요?”

끼어들 타이밍이 있었다면 진작에 끼어들려고 했던 김미영이지만 하준이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아 그가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난 C급 가이드에 저기 있는 에스퍼들도 D에서 C 사이의 등급이에요. 이런 등급이 대통령 엄호는 무슨. 그냥 잡다한 민원 업무 처리합니다. 돈만 많이 주면 부자들이 잃어버린 반려동물을 찾아 주기도 하는데 뭐.”

김미영은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환하게 웃고 있는 하준과 팀원들을 바라봤다. 민원부에 발령 난 지 7년째.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여긴 낙오자 팀이에요. 만약 나한테 촬영 협조를 부탁했다면 거절했을 거예요. 시골 내려가서 농사일 도와주는 모습이 남는다니. 쪽팔리게.”

“……저 확실히 현장은 김미영 팀장님보다 잘 모르지만, 그래도 팀원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네?”

“낙오자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마시라고요.”

하준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호은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팀 가이드가 스스로 팀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걸 알면 다들 상처받지 않을까요.”

김미영은 호은의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신입이니까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녀는 민원부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신입 시절 자신도 호은처럼 팀원을 아꼈던가? 7년 전이라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만 그녀는 더 이상 이 팀에 소속감이 없었다. 3년 전 숙소 생활도 나온 상태라 팀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녀였다. 컬러풀 레인저니 뭐니. 이상한 팀명에 사무실에서는 서로 코드 네임으로 부른다. 그런 식으로 자기 위로해 봤자 낙오자는 낙오자일 뿐인데.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김미영은 형광등에 비쳐 유난히 빛나 보이는 호은의 눈을 마주 보다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뭘 알겠어요. S급의 에스퍼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

“…….”

“오늘 현장 가면 알 겁니다. 왜 낙오자라는지. 왜 잡무부라 불리는지.”

김미영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 하루 민원부를 본 호은보다 7년을 민원부에서 일한 자신이 더 잘 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말을 갖다 붙여도 민원부는 잡무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호은 같은 열혈맨 스타일이랑은 안 맞는다. 김미영은 자기 말에 대꾸도 없이 회의실을 나가 하준에게 도와줄 건 없냐 묻는 호은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회의실은 도인호와 김미영 두 사람만 남았다. 김미영은 가이드이지만 도구 에스퍼라 불리는 결정체 이식자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이능력자 협회 본부에서 일하는 자신과 마주칠 존재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도구라면 사원증이 없어야 하는 게 맞는데.’

작은 의문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지만 이내 귀찮은 것에 말려들기 싫어 질문하진 않았다. 나이를 먹고 팀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나니 책임감은 무슨 귀찮음만 늘어 최대한 나서지 않게 되었다. 민원부는 팀장도 두 명이니 오늘 현장은 하준이 책임질 거고 말이다.

“오늘 현장은 안 나가시는 건가 봅니다.”

“네. 뭐. 사무실에도 할 일이 많아서.”

차마 도인호에 대답에 귀찮아서라고 답할 순 없던 김미영은 딴짓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김미영 팀장님이 현장을 안 나가서 다행입니다.”

“……?!”

김미영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싸늘했던 사무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화산의 안에 들어온 것처럼 뜨거운 열기에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능력을 쓴 건가? 잘 떠지지 않은 눈으로 도인호를 훑었지만, 그 어디에도 푸른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서까지 따라와 호은 형 김빠지게 하면 안 되거든요. 귀엽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현장 임무를.”

김미영은 회의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무너져가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숨을 못 쉬어 머리가 어지럽다. 이제는 귀에서 이명 소리가 들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 책상을 부여잡지 않으면 바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인호야. 컬러풀 레인저 옷 있다는데 너도 입을래?”

회의실 문이 열리자 김미영이 느꼈던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무겁게 폐부를 찌르고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말이다.

숨을 거칠게 뱉으며 김미영은 비틀비틀 걷다 벽에 기댔다. 의아한 호은이 김미영에게 시선을 던지려고 하자 자연스럽게 도인호가 호은의 앞을 막았다.

“저는 컬러풀 레인저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네! 팀장님! 컬러풀 레인저 팀복은 다음에 빌려주세요.”

호은이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갔다. 김미영은 회의실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방금 건 이능력이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방사 가이딩을 받고 있지 않던 도인호가 조금 전 김미영의 방사 가이딩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C급인 나도 이렇게 버거운데 어떻게 D급인 권호은 가이드가 그 옆에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는 거지?’

도인호는 떨고 있는 김미영을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 쳐다보며 회의실을 나갔다.

주르륵 벽에 기대앉은 김미영은 공포로 인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쉽사리 밖에 나오지 못했다.

현장에 나갈 인원을 꾸리느라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평소라면 네가 가라. 아니다 팀장님이나 가라. 서로에게 떠밀기 바빴던 현장이다. 하지만 오늘은 같은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도인호가 있다는 사실에 서로 너도나도 가겠다며 지원하고 있었다.

“각자 이능력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가진 분이 가는 게 어떤가 싶어서요!”

“네!! 저 레드 먼저 어필해 보겠습니다. 사실 현장에서는 실제 칼은 무서우니, 아니 위험하니까 이걸 사용하긴 하는데.”

칼을 손질하던 레드는 주춤거리더니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 목도를 들고 왔다. 목도를 크게 휘두르자 불꽃이 목도를 감쌌다.

“화염의 능력입니다!”

“가이드님. 이런 시기에 화염 에스퍼가 능력 한번 잘못 쓰면 오히려 농작물에 불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대지의 능력으로 농사 관련 현장에는 항상 출동했습니다! 죽은 땅도 살린다는 신의 손!”

파란색 머리를 한 코드 네임 블루는 파란색 장갑을 끼며 사랑과 정의 평화를 나타내는 피스 손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의 블랙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저는 순간 이동이에요. 상주 왕복 네 시간인데 저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블랙의 말에 여기저기 탄식과 분하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럼 블랙과 팀장인 제가 가면 되겠네요. 제 능력은 염력이라 반드시 도움 될 것 같습니다.”

슬슬 정해지는 분위기에 못을 박듯 하준이 말하자 민원부 팀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다음에는 멤버 바꿔서 가는 거라며 자리를 물러났다. 호은은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C급 이하의 에스퍼 수준이 어떤지.

그렇게 호은의 첫 공식적인 현장 업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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