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늘이 드리운 호은의 얼굴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진도가 안 나갈 것 같은 녀석들에게는 이런 위화감을 심어 줘야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호수였다.
“D등급이지만 넌 도인호를 가이딩할 수 있어. 파장이 잘 맞아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력하면 70%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는 호수였다. “가이딩 방법을 모르겠으면 나한테 알려 달라고 하던가.” 능글거리는 호수의 목소리에 사념에 빠졌던 호은이 인상을 찌푸린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찡그린 얼굴로 거절하는 호은의 목소리에 호수는 역시 넌 재미있다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화가 끝나자 호수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친히 문까지 열어 주는 모습은 다정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빨리 꺼지라는 말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몇 초간 응시하며 호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으로 온몸이 뻐근했다. 목 스트레칭을 하며 돌담길을 따라 걷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문 하나만 덜렁 있다. 들어올 때도 신기했으나 나갈 때도 신기하다.
문을 열고 나가자 회색 시멘트벽이 반겨 주는 가이드 공단으로 돌아왔다. 호은은 본사에 온 김에 가이드 공단에서 일한다고 말했던 세희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
김세희가 일하고 있는 층은 바로 아래층이었다. 비상구 계단을 통해 6층으로 내려간 호은은 사무실 입구에 서서 김세희를 기다렸다.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더니 김세희가 웃으며 호은을 반겨 줬다.
“사무실 직원들에게는 다 허락받았어요!”
“정말요? 세희 씨만 찍고 가려고 했는데.”
“제가 귀염둥이 막내다 보니까 모두 제 부탁이면 들어주시거든요.”
구김 없이 웃는 김세희를 보며 호은은 따라 웃었다. 어린 나이의 그녀가 회사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걱정과 다르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호은은 가이드 홍보 영상을 찍을 거라며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가지고 온 캠코더를 들고 카메라맨이 된 호은은 김세희의 안내와 함께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각 직원의 자리마다 야구공 크기의 볼이 있었다. 투명 볼 안으로는 푸른색 액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 가고 있는데 호수가 말한 방사 가이딩을 형상화해 누적시켜 가이딩 약으로 만드는 기계 같았다.
“자. 우선 가이드 공단 부서들 먼저 소개해 드릴까요?”
“네. 좋아요.”
김세희가 움직이며 부서마다 어떤 업무를 하는지 알려 줬다. 맨 처음 면접을 봤을 때 체험형 인턴에 속한 부서들은 실제 부서였다. 그 밖에도 넓은 사무실에는 다양한 부서가 존재했다.
김세희의 자리는 모니터 두 대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귀여운 느낌으로 꾸며져 있다. 키보드와 마우스도 새로 맞춘 건지 개나리꽃 색이 아주 예뻤다. 첫 장면은 김세희의 자리에서 시작했다.
“저는 현장 지원 부서로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제가 하는 일은 가이드들이 나갈 현장을 매칭해 주는 것과 등급별로 어떤 현장에 나갈 수 있는지 리스트를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등급은 어떤 등급이죠?”
“가이드들은 에스퍼를 자원해 주기 위해 가이딩이라는 능력이 있는데요. 가이딩 수치 측정해 D등급부터 S등급까지 정합니다. 임무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등급이 높은 가이드로 인력 배치하는 거죠!”
“나중에 제 현장도 세희 씨가 정해 주는 거네요?”
“아직은 신입이라 그 정도 권한은 없겠지만! 권한이 생긴다면 동기 버프로 안전하고 현장 수당이 쏠쏠한 곳으로 배치해 드릴게요.”
김세희가 카메라를 보며 윙크하자 호은이 작게 웃었다. 사무실을 돌고 나서 가이드 공단의 건물 곳곳을 소개해 주며 건물 투어를 하고 나자 오후 세 시쯤 되었다. 아직 학생 신분이기에 출퇴근 시간이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인지라 퇴근하는 김세희를 기다리며 호은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가이드 공단에서 사람들을 못 마주친 이유를 알겠다. 내부 시설이 잘되어 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 없이 자신이 근무하는 층에만 있으면 된다. 또한 가이드 공단의 크기보다 일하는 직원이 적었으니 더 마주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저 끝났어요!”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맛있는 거 사 주겠습니다.”
“음. 그러면 인천 지사로 가서 지난번에 먹었던 치킨집 갈까요?”
“인천 지사?”
“네. 어차피 류윤재 씨 보러 갈 거죠! 류윤재 씨 끝나면 같이 치킨 먹으러 가요.”
방사 가이딩을 택한 김세희는 가이드 공단 본사(경주)에서 일했고 내근직 직접 가이딩을 선택한 류윤재는 이능력자 협회 인천 지사 의료 센터에서 일한다고 했다.
호은의 숙소 또한 인천 지사이기에 류윤재는 편한 시간 아무 때나 보려고 했는데 김세희의 말을 들어보니 오늘 안에 가이드 영상은 다 촬영해 두는 게 나은 것 같다.
“좋아요. 그런데 류윤재 씨는 왜 직접 가이딩 쪽으로 빠졌을까요.”
“어머. 그것도 모르셨어요? 내근직이어도 직접 가이딩은 에스퍼를 보면서 일하잖아요.”
“그런데요……?”
“옛날에 가이딩 측정 파트너로 데려오셨던 에스퍼분 있잖아요. 김한슬 씨인가?”
호은은 지난번에 봤던 신체 강화 에스퍼를 떠올렸다.
“파장이 40% 이상 안 맞는 에스퍼와 가이드는 팀이 될 수 없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김한슬 씨 파장이 조금 특이하신 건지 아직 자신과 맞는 가이드를 못 찾았다고 하셨어요.”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아. 란 언니랑 김한슬 씨랑 친구여서 셋이서 단톡방 만든 게 있거든요. 여자들 단톡방인데 혹시 끼고 싶으세요?”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류윤재 씨는 김한슬 씨의 파트너 가이드가 되고 싶었던 건가 보네요.”
“검은색 긴 생머리에 순정 만화같이 생긴 순한 얼굴이 류윤재 씨 취향이라 하셨거든요.”
확실히 김한슬의 첫인상은 검은색 긴 생머리에 순한 눈매와 작지만 오뚝한 코 그리고 입꼬리 양쪽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순정 만화를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이미지를 그리라면 꼭 김한슬처럼 생겼을 것만 같아 호은은 납득했다. 완벽한 이상형 모습에 반했구나.
“그래서 제 생각에는 김한슬 씨 가이딩하고 싶어서 의료 센터 쪽으로 가신 것 같아요.”
김세희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김세희는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버튼 중 인천을 눌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호은은 엘리베이터 버튼에 지역 이름이 들어간 게 이상하다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엘리베이터 숫자판이 빠르게 움직였다. 8, 9, 10…. 가이드 공단의 층수보다 더 높은 숫자로 오르고 마침내 100에서 숫자가 멈추더니 인천이라는 텍스트로 변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인천 지사 본관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은 내렸다.
“엘리베이터 타고 지금 인천 지사에 온 거예요?”
“가이드 공단에서는 이능력자 협회를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거든요. 이능력자 협회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가이드 공단에 못 오지만 말이에요.”
“그렇구나…….”
가이드 공단에서 이능력자 협회 인천 지사까지 어떻게 갈지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에스퍼에게 도움이라도 청해야 하나 싶었는데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로 경주에서 인천까지 1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결정체로 만든 엘리베이터였구나.’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본관을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가기 직전 왼쪽에 응급 의료 센터가 있었다. 보통 현장에서 다치고 들어오는 에스퍼를 치료하거나 가이딩을 급하게 채울 때 이용하는 공간이라 두 사람은 와 본 적 없던 건물이다.
류윤재에게 미리 연락해 주었기에 의료 센터 로비로 들어가자 흰색 가운을 입은 류윤재가 두 사람을 반겨 줬다. 미리 카메라를 꺼내 영상 촬영 중이던 호은은 카메라 든 손은 고정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 인사를 건넸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게 어색한지 류윤재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졌다. 로봇이 된 것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의료 센터 1층 안쪽에 마련된 가이딩 센터는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 각 열 개씩 커튼이 쳐져 있어 공간 구분이 되어 있다.
총 20명의 가이드가 배치되는 곳인지 일반 병원의 입원실처럼 흰색 커튼으로 시야를 차단할 수 있었으며 커튼 안쪽에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의료용 베드가 있다.
소음이 차단되는 구조는 아닌지 큰 소리를 내면 소리가 들려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구조였다.
“가이딩 센터는 24시간 운영하다 보니 3교대 근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이드 안전을 첫 번째로 우선시해 자리마다 응급 호출이 가능한 벨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길 때 누르게 되면 보안팀으로 연락이 가 3분 안에 현장에 출동합니다.”
가이딩 센터 내부는 넓고 쾌적했다. 가이드들이 따로 쉴 수 있는 휴게실도 마련되어 있어 가이딩 업무가 없을 때는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안내했다. 텔레비전과 각종 게임기. 작은 카페테리아도 있어 휴식 취하기 좋아 보였다.
“그러면 에스퍼가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 예, 예시를 한번 보여 드리겠, 습니다.”
저기서 더 빨개질 수 있을까 싶었던 류윤재는 의료 센터 접수실로 가더니 누군가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저건 이제 불타는 고구마도 아닌 뭐랄까……. 터져 버린 화산……?’
류윤재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가 싶어 시선을 돌렸더니 김한슬 씨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호은이 드라마를 감상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 호은 씨가 영상 찍으러, 오신, 다고, 말, 말씀드렸더니.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옙. 그, 모시게 되었습니다.”
“홍보 잘 부탁드립니다.”
영상에서도 청순함이 잘 묻어 나오는 김한슬을 보며 호은은 핸드폰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가이딩 센터 접수는 접수실에서 접수원에게 직접 해도 되고 핸드폰 앱으로도 미리 접수할 수 있습니다. 두 접수의 차이는 앱 같은 경우는 가이드가 랜덤 지정이고, 접수원에게 접수하는 경우는 원하는 가이드를 지정할 수 있어요.”
접수대 위에 있는 텔레비전에 가이딩 센터에 대기 중인 가이드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류윤재 가이드로 지정 부탁드립니다.”
“네. 접수되셨습니다.”
김한슬이 접수를 끝내고 나자 류윤재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지정된 가이드는 이렇게 해당 에스퍼에 대한 정보가 옵니다. 현재 상태와 가이딩 퍼센트. 그리고 추후 임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서 어느 수치까지 가이딩을 올릴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가이딩 센터로 들어간 류윤재가 김한슬을 처음 보는 것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해를 돕기 위한 설정 장면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는데 그게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반쯤 처져 있는 커튼은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김한슬과 류윤재는 빈 공간으로 들어간 뒤 커튼을 완전히 쳐 시야를 가렸다.
의료용 베드에 반쯤 누운 김한슬과 그 옆에 보조 의자에 앉은 류윤재는 김한슬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가이딩을 진행하면 손목에 찬 가이드 워치에서 담당 에스퍼 가이딩 수치가 올라가는 게 보이고 미리 설정한 수치가 있으면 다 됐을 때 알람이 울립니다.”
“컷. 수고 많았어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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