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침에 눈을 뜨니 병실 침대에는 호은 혼자였다. 도인호가 자리를 떠난 지 제법 된 건지 빈자리가 싸늘하기만 하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해 준 후 호은은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도인호를 기다렸다 식당에 갈지 혼자 먼저 갈지 고민하던 순간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인턴 동기인 김세희와 류윤재가 꽃과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
두 사람의 목에는 노란색 사원증이 아닌 파란색 사원증이 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어서 와요.”
호은이 웃으며 반겨 주자 한참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던 두 사람은 꽃과 과일 바구니를 떨어트리더니 돌진하듯 뛰어와 안겼다. 김세희와 류윤재 둘 다 호은의 어깨를 한쪽씩 빌려 울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정이 들어서 그런 걸까? 어쩐지 호은도 울컥 뭔가 올라오려는 기분이다.
“왜 그렇게 무모해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인턴은 해당 임무에서 제외였는데…….”
“하하.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눈물겨운 재회가 끝나고 세 사람은 과일 바구니에서 과일을 꺼내 입에 물며 호은이 쓰러지고 나서 이후의 협회 일들을 알려 줬다.
사건 이후 반정부는 특별한 낌새를 보이지 않았으며 반정부 협회가 전쟁을 시도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도 없다고 한다.
대신 호수는 이번 일에 총책임자로 인턴 가이드가 해당 현장에 개입한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내용으로 징계받고 있다고 하였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사실에 호은은 먹던 과일을 잠시 내려놓았다.
“괜히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본 것 같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자연스럽게 세 사람 옆에 서 있는 호수는 언제 집어 든 건지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깃털 모양 귀걸이가 반짝거리는 걸 보아하니 이능력을 사용한 게 분명하다.
“가이드 워치에 모든 기록이 다 남아 발뺌할 수도 없어서 결국 나까지 징계받았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너도 징계 대상이거든.”
병실의 공기는 싸늘해졌으나 해당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사과의 아삭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소리의 주인공을 시선으로 좇을 때 드디어 사과를 다 먹은 호수가 입을 열었다.
“인턴사원이 사고를 치면 과연 어떤 징계를 받을까. 일반 회사라면 사직서 내고 끝이었겠지만.”
과일 바구니에 손을 뻗은 호수가 이번엔 바나나를 꺼내 들었다.
“우리에게 퇴사 개념은 없는 거 알지? 그래서 짜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주게 됐다.”
“…….”
“정직원이 된 걸 축하한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은의 목에 사원증이 걸렸다. 파란색 사원증은 아니었다. 그것이 의아해 호수를 쳐다보자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초록색 사원증은 정부에서 특수한 일을 시키는 부서다.”
“가이드도 에스퍼도 저 사원증 차면 회사 생활 끝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김세희가 무언가 아는 듯 중얼거렸다. 호수는 입으로 딩동댕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왜 이렇게 얄밉게 들리는지 호은은 흔들리는 눈으로 초록색 사원증을 매만졌다.
“63 스퀘어에서 구한 인질의 기억은 지웠지만, 현재 시민들 반응이 매우 안 좋아. 각 나라에서 진행됐던 쇼만큼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나라도 있거든. 살얼음판이지. 대한민국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거기다 일반 시민들은 에스퍼랑 가이드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김세희에 말에 호은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에 합격하고 나서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한국은 철저하게 언론 노출을 규제하고 있었다. 백지상태의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극적인 정보가 입력된다면 다들 두렵고 불안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래서 이번에 에스퍼와 가이드 인식 개선을 위한 홍보부가 신설되었다.”
“홍보부요?”
“그래. 홍보부. 앞에 말한 것처럼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업무를 하는 곳이지. 하지만 사실 그건 대외적인 업무고.”
“…….”
“대외적인 의미를 없애면. 홍보부는 반정부 소탕 업무를 하는 곳이다.”
“반정부 소탕이요?”
“그래. 반정부 소탕팀. 인원 구성은 징계 대상들로 문제아들 집합소라 생각하면 되겠네.”
“징계 대상이라면…….”
병실 문이 열리더니 도인호가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에 달라진 점을 서둘러 찾자 도인호 또한 호은과 같은 사원증을 차고 있었다.
“같은 팀이니까 가이딩 하긴 좋겠네.”
인턴사원끼리 청춘 드라마를 찍으려던 병실에 폭탄이 던져졌다. 전쟁 영화로 만든 호수는 멘붕하고 있는 제자들을 내버려 두고 오렌지를 챙긴 채 사라졌다.
“반정부 소탕이라니. 너무 위험한 일을 하는 거 아니에요?”
김세희의 말에 류윤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정직원이 될 때 내근직, 외근직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강요 아닌가요?”
“맞아요. 그리고 인턴 기간에 일주일씩 돌아가며 경험해 봤는데 왜 가이드들이 내근직으로 일하고 싶은지 알겠더라고요.”
김세희가 도인호를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호은에게 말했다. 호은은 김세희에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내근직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 경험하지 못하고 정직원이 되어 버린 건 아쉽지만.
“괜찮습니다. 각오했던 일이고 어차피 외근직을 선택했을 거예요.”
“왜요?”
“글쎄요……. 사람을 구하는 건 에스퍼고. 에스퍼를 구하는 건 가이드니까……. 현장으로 나가야 더 많은 에스퍼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호은은 그렇게 말하며 도인호를 쳐다봤다.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도인호는 호은의 말에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기라도 하듯 김세희가 류윤재의 어깨를 툭 치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우리는 내근직이니까 여기서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한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
“가끔 보면 세희 씨는 성인보다 더 어른스럽네요.”
호은이 말하자 세희가 씩 웃는다. 네 사람은 조금 더 이야기하다 이내 동기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병실에는 호은과 도인호 두 사람만이 남았다.
“퇴원하면 바빠진다던데.”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인호의 모습에 호은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불렀다.
“인호야, 바빠지기 전에 놀러 가자. 지난번에 못 갔잖아.”
생각에 잠겨 있던 도인호는 잊어버린 줄 알았던 이야기를 꺼내 속으로 놀랐다. 호은은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자 가라앉아 가던 도인호의 기분을 다시 띄워 놓았다.
호은은 도인호가 가져온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분명 아무거나 좋다고 말할 줄 알았던 도인호가 걸음을 멈췄다.
“도, 돈가스요.”
***
도인호를 처음 만났던 돈가스 집에 서자 호은의 머릿속에 우산이 떠올랐다. 우산이 제 주인을 못 찾아간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너 우산 두고 간 거 기억 안 나지? 비 내리는 날에 우리 마주쳤잖아.”
자신만 도인호를 기억하는 거 같자 호은은 억울함이 밀려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호은은 메뉴판을 보고 놀란 신음을 뱉었다. 이제 보니 어렸을 때 자주 왔던 돈가스 집이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 학교를 들어가면서 발걸음이 뜸해졌으나 주변 가게들이 다 바뀌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나 보다.
“나 여기 자주 오던 가게인데. 오죽하면 크리스마스 때도 혼자서 먹으러 왔다니까?”
도인호는 호은의 말에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이상하게 심장이 저릿하고 손끝이 따끔거렸다.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하나 맞춰져 완벽한 그림이 되었다. 호은이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과거를 회상한 도인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머릿속에 있던 모든 안개가 걷혔다.
“기억나요…….”
메뉴를 주문하느라 시선이 팔린 호은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도인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
호은이 퇴원하기 전까지 도인호 또한 일을 쉬었다. 프리 소속이 아닌 홍보부 소속이기에 개인 현장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퇴원하는 날 전까지 두 사람 지난번 같은 데이트를 자주 하게 되었다.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한 호은은 익숙한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일주일 동안 본가도 들렀다 오고 정리할 건 다 정리했지만 앞으로 인턴이 아닌 정직원으로서 일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들었다.
정직원으로서 첫 출근. 불안과 기대가 섞여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 호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가이드 권호은이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음날 몸에 불편한 정장을 입은 호은이 이제는 혼자가 아닌 도인호와 함께 출근길을 나섰다. 중앙에 있는 본관 건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호수가 알려 준 회의실로 들어갔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회의실 테이블에 노트북과 캠코더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당황한 두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 있자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도인호 씨와 권호은 씨 맞으시죠?”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은 여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다. 두 사람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어오게 한 여자는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홍보부를 도와줄 기획부 지니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 캠코더는……?”
“홍보부 일하실 때 필요할 것 같아 준비해 드렸어요.”
“캠코더 쓸 일이 있나요?”
“혹시 못 들으셨나요? 이번에 에스퍼, 가이드 홍보를 위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했는데. 현재 두 명씩 팀을 맺어 영상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 중에 이미 촬영을 끝내고 편집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두 분이 늦게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어 제가 필요한 것을 우선으로 챙겨 뒀습니다!”
“홍보 영상이요?”
현장 임무를 생각한 도인호는 호은의 뒤에서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호은은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팀원들이 제작한 홍보 영상 중 하나를 채택하고 채택된 팀원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있다고 하니 열심히 해 보세요! 기안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 여섯 시입니다.”
지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도인호가 캠코더를 보며 정말 홍보를 하라는 말일까요? 중얼거리는 사이 호은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더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히 차려 준 밥상이잖아? 인호야, 형만 믿어.”
호은은 책상에 놓인 캠코더를 잡았다.
‘아. 그리웠다. 이 그립감.’
호은이 캠코더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해맑게 웃었다.
“형 너튜버야!”
호은은 캠코더에 담기는 도인호를 감상했다. 피지컬 합격. 그냥 서 있기만 해도 10만 뷰는 찍을 것 같다. 어떻게 영상을 구성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호은이었다.
“…….”
도인호는 캠코더를 테스트하기 바쁜 호은을 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건 함정이다. 홍보부는 반정부 소탕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의 목적은 뻔하다. 반정부 도발 영상을 제작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영상이 채택되면 안 된다. 보상이라고 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채택된 영상은 반정부의 타깃이 될 확률이 높다.
한 명은 잘 찍고 싶단 열정에 불타올랐고 다른 한 명은 소화기를 들고 불 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 속 동상이몽을 꾸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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