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연분홍색 재킷과 같은 색의 바지를 입은 차림의 호수였다. 그의 시선이 아픈 곳 하나 없어 보이는 호은의 몸에 머문다. 머리부터 천천히 내려가는 집요한 눈길과 함께 호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호은의 뺨 위로 손을 올린 호수는 평소의 조소가 아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네.”
호수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에 호은이 놀라려는 순간 왼쪽 볼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으에……?”
“얀마. 가이딩 조절 잘했어야지.”
“아파여.”
“가이드가 현장에서 가장 잘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가이딩!”
호은의 오른쪽 볼도 마저 꼬집으며 호수는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너 이론 시간에 뭐 했냐? 바로 타이밍이다.”
도인호가 불안한 시선을 호은에게 던졌다. 날려 버릴까요? 도인호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타이밍에도 중요한 순서가 있어. 첫 번째 도망칠 타이밍을 아는 것. 두 번째 가이딩 타이밍을 아는 것.”
“제성함니다.”
꼬집힌 볼에 어눌한 말투로 호은이 대답했다. 호수는 그제야 꼬집고 있던 볼을 놔주었다.
“넌 도망칠 타이밍도 놓쳤고 가이딩할 타이밍도 제대로 못 잡아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야.”
호수는 가지고 온 가이드 워치와 핸드폰을 탁자 옆에 뒀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이번에 네 판단이 옳았네.”
호수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았다. 8월 16일. 도인호 폭주 예정일이 지난 상태이다. 도인호의 폭주를 막은 건가?
“2차 가이딩 측정 결과에서 두 사람 파장 90% 일치했어. 그 정도 일치면 네가 도인호 폭주를 계속 막아 줄 수 있겠지.”
호은은 눈을 감았다. 도인호를 처음 만난 날, 그에게 살려 주겠다며 무례한 말을 했던 날,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었던 날, 입을 맞췄던 현장.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는 무수한 기억에 호은은 벅찬 감정을 느꼈다.
도인호가 조심스럽게 호은의 앞에 마주 섰다. 호은이 눈을 뜨자 호박 같은 눈동자는 삶에 대한 의지가 담긴 이채를 띠었다.
“이것들이 아까부터 사람 있는 걸 까먹는 것 같네.”
타박하듯 말하는 호수였지만 목소리는 장난스러운 톤이다.
“가이딩 소모된다. 그만 떨어져.”
호수가 말리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안고 있을 두 사람은 그제야 어색한 동작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권호은, 넌 한 달 만에 일어난 게 기적인 줄 알아. 검사받아 봐야 정확하겠지만.”
“괜찮은데요?”
“그건 네놈 생각이고. 위에서는 수치를 봐야지만 믿으니까.”
호수의 손길로 호은은 얼떨결에 침대에 다시 앉게 되었다. 병실 문이 다시 열리고 의료진이 진찰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병원 전체를 둘러보기라도 하듯 각종 검진실에 들어가 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가 끝나니 이번엔 가이딩 검사다.
“저 밥은 언제…….”
“공복 검사입니다.”
-꼬르륵. 호은이 뭉크의 절규 포즈를 지으며 축 처진 걸음으로 가이딩 검사실로 들어가자 이동할 때마다 계속 같이 다니던 도인호가 검사실 앞에 놓인 대기 의자에 앉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온 호수가 한 자리 간격을 두고 옆에 앉았다.
“네가 권호은 자식새끼야? 뭐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냐.”
“…….”
“이래서 에스퍼한테 잘해 주면 안 되는데. 도인호. 너도 알겠지만 권호은은 정의로운 녀석이다. 가이드 중에서 저런 녀석을 보긴 어렵지.”
“압니다.”
“그래? 그럼 네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어도 권호은은 몸을 던져 가이딩했을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네?”
“…….”
“앞으로 권호은이 구할 에스퍼 중 넌 한 명일 뿐이야.”
주먹을 쥔 도인호의 손등에 핏줄이 잡힌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가 터져 나오지 않게 꾸역꾸역 삼키며 도인호는 무던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누구를 구하던 마지막까지 옆에 있는 건 저일 겁니다.”
“뭐?”
도인호는 호은이 검사받는 검사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호은은 정의롭다. 그리고 책임감도 무척 강하다. 이기적이란 소리 들을지 몰라도 도인호는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래서 에스퍼한테 잘해 주면 안 돼. 이 새끼 눈깔 돌아간 거 봐. 너 한 달 사이에 뭐 사이비 종교 같은데 다니는 거 아니지? 하여간 넌 나랑 한 계약이나 지켜.”
호수는 도인호를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USB였다.
“63 스퀘어 CCTV는 조작 완료했어. 원본 영상은 그게 마지막이다. 그 녀석들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딴 짓을 하는 건지.”
호수는 목소리 톤을 낮췄다. USB 안에는 타이거에게 피를 채취당한 호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처음 도인호에게 해당 사실을 전해 듣고 호수는 CCTV 영상 전체를 확인했다.
이상한 점은 S1 가이드가 타이거 멤버에게 서명받는 순간부터였다. 서명 직전까진 직접 가이딩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서명 직후 타이거는 S1 가이드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나 잠시 후 타이거는 S1 가이드를 던져 버렸다. 소리가 담겨 있지 않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가이드는 타이거와 거리가 생겨 바로 도망칠 수 있었다.
예상컨대 S1의 가이딩은 S급 수준이 아니었고 호은의 가이딩은 S급이라 판단해 채취는 호은이 당한 거 같았다.
“상부에 들키지 않게 조사할 예정이라 시간은 걸릴 거야.”
호수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 자리를 떠났다.
***
불 꺼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한 남자의 구슬픈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거기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까지 들리니 이곳이 병실인지 학생들이 모여 있는 4교시 끝나기 직전 교실인지 알 수가 없다.
“삼겹살, 떡볶이, 초밥, 골벵이 무침, 족발, 닭발, 라면, 조개구이, 장어, 육회, 소고기, 우동, 햄버거…….”
불 하나 켜지지 않아 더 음침해 보이는 병실. 호은은 다시 주문을 외우듯 음식 이름을 나열했다.
“호은 형.”
문이 열리고 복도 조명이 어두컴컴한 병실을 밝힌다.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에 누워 있던 호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먹을 거!”
모든 검사를 끝내고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호은은 드디어 식사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도인호가 가져온 죽을 음료라도 마시듯 순식간에 해치운 호은은 적당히 불러오는 배를 두드렸다.
“응?”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도인호에 호은은 볼을 긁적였다. 처음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도인호는 막 태어난 오리처럼 호은의 주변을 맴돌았다. 경황이 없어 그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저런 시선을 계속 받으니 무시하기도 곤란했다.
호은은 한 달 동안 혼수상태였다. 가이딩 강화제 약 부작용과 더불어 도인호의 폭주를 막느라 가이딩을 소모한 것이 크다고 했다.
도인호의 폭주 자체로도 가이딩 소모량이 많았을 텐데 에스퍼 강화제를 먹은 도인호는 그야말로 두 번 폭주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호은의 외적 상처는 치유계 에스퍼 덕에 금방 나았지만 가이딩 회복은 이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호수의 말처럼 한 달 안에 깨어난 것이 기적이라고 할만했다. 오늘 한 가이딩 검사를 통해 호은의 가이딩 회복력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도인호의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호은이 서서히 손을 내렸다.
“너는 괜찮아?”
에스퍼는 자가 치유가 된다는 걸 안다. 그 사실을 알면서 호은은 도인호에게 물어봤다.
“……안 괜찮으면. 어, 어떻게 위……로해 줄 거예요?”
“……!”
평소와 같은 목소리지만 어쩐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처럼 들렸다.
“푸흐… .”
그것이 제법 재미있어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과 달라진 도인호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호은은 어린아이에게 묻듯 다정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어깨를 토닥여 줄까.”
“…….”
도인호는 여태 자신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오해였다. 그저 감정을 느낄 만한 무언가가 없었을 뿐이다. 늘 같은 일상. 죽는 날만 바라던 일상 속 호은이 나타났다. 흑백 세상에 호은이 물감을 던진다.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처음 보는 색들이 칠해진다. 그 색은 감정이었다.
호은이 타이거에게 당했을 때 느낀 건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호은이 의식을 잃었을 땐 슬픔으로 마음이 잠식되어 멀쩡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고통은 자가 치유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나 너덜너덜해져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호은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도인호는 멈출 수 없었다.
“안아 주세요.”
“……그래.”
호은은 도인호를 품에 안았다. 체격의 차이가 있어 마치 도인호가 안은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도인호는 품 안에 안긴 호은의 숨결과 심장 박동을 느끼며 안도감을 느꼈다. 호은을 안고 있으면 그의 모든 걸 갖게 된 듯 착각이 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것. 검은색으로 칠해지는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다.
“늦었지만,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호은은 두 팔을 벌려 도인호를 꽉 껴안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진다. 도인호가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오늘따라 평소와 다른 도인호에 어색함도 느꼈으나 이제는 그게 곧 도인호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도인호는 이런 모습이구나.’
죽음만을 바라던 도인호가 살아 있는 송장 같았다면 지금 도인호는 열 살짜리 아이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관심받고 싶어 했다. 호은은 자연스럽게 어리광을 받아 줬다.
호은은 자신이 한 행동이 100% 정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먼 훗날에 자신을 왜 살게 만들었냐는 말을 도인호에게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따듯하다. 온기가 느껴진다. 그 사소한 사실로 미래의 일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같이 잘래?”
마치 어린 동생과 한 침대에 자듯 침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 도인호는 머뭇거리다 이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호은은 도인호를 품에 안아 토닥거렸다. 덩치만 자라고 관심과 애정이 결핍됐을 도인호는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다. 책임진다고 말한 만큼 호은은 도인호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줄 생각이다.
커다란 침대. 다 큰 성인 두 명이 똑바로 누워도 자리가 남는 침대였지만 두 사람은 꼭 붙었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려던 호은은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새벽바람이 추운지 도인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잘 자요.”
도인호의 목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호은은 깊은 수마에 빠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이 흔들린다. 도인호는 머리에 팔을 괸 채 호은이 얼굴을 내려다봤다.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호은을 보자 그제야 한 달간의 걱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호은 형, 또 길게 잠들면 안 돼요.”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던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어두워진 병실은 마치 두 사람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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