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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28화 (28/129)

28화

쓰러진 권호은을 본 헬리콥터가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호수와 같이 내린 치유계 에스퍼는 비상구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가 두 사람이 있는 장소로 도착했다.

새카만 잿더미가 흩날리는 공간 속 도인호가 호은을 안은 채 호수를 바라본다. 자신의 사냥감을 훔치러 온 낯선 이를 경계하는 듯 집요히 빛나는 노란 눈동자가 섬뜩하기 짝이 없다.

“얌전히 권호은 내려놔. 너 가이딩 하다가 걔 죽을 수도 있어.”

호수의 경고에도 도인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감싼다.

‘저 자식 눈이 돌았네.’

호수는 허리에 찬 마취총의 위치를 파악하며 다시 도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는 어느새 바닥에 얌전히 누워 있는 권호은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뺏기지 않을 겁니다.”

음산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언제 온 거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감에 호수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허리에 차고 있는 마취총 잡을 타이밍을 찾던 순간이다.

-탕!

자신이 쏜 총이 아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마취총에 의해 도인호가 힘없이 쓰러졌다.

“제가 또 한 번 목숨을 구해 줬네요?”

바닥으로 쓰러진 도인호를 바라보다 호수가 뒤를 돌았다. 한 손에 마취총을 든 은발의 남자가 호수를 향해 윙크를 보낸다.

“백우경.”

“우리 차장님은 놀란 표정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몰라.”

현장에서 마주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백우경과의 만남이 달갑지 않은지 호수의 미간은 보기 좋게 구겨졌다.

가볍게 놀리는 세 치 혀를 당장 뽑고 싶었으나 백우경이 총을 쏘지 않았더라면 도인호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보통은 고맙다는 말이 먼저이지 아닐까 싶은데. 역시 차가운 도시 남자야.”

나 너무 추워! 어깨로 사람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은 크기를 자랑하는 백우경이 자기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떨었으나 호수는 철저히 무시했다.

“크흠, 가이드 공단 이사장이 여기 왜 왔겠어요?”

천천히 호수에게 다가오던 백우경은 대기 중인 치유계 에스퍼의 등을 쳤다. 쓰러져 있는 호은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치유계 에스퍼가 서둘러 호은에게 달려갔다.

호수가 대답하지 않자 백우경은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말을 이었다.

“일하러 왔겠죠.”

“네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뭐겠어요. 도인호 폭주에 대해 모두 찬성하고 밖에 쉴드 에스퍼도 대기 중인데. 폭주가 지연되잖아요.”

백우경이 쓰러진 도인호의 머리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래서 그냥 건물을 폭파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것도 지연.”

백우경이 도인호의 머리를 밟고 있는 다리에 힘을 주자 바닥이 움푹 팼다.

“뭐 때문에 그러냐고 했더니. S급 가이드가 빌딩 근처에 있어 폭파를 못 한대.”

“…….”

호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백우경의 가슴팍을 밀었다. 가이드의 힘으로 밀릴 몸이 아니건만 백우경은 호수의 손이 닿자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차장님. 폭주에 말려들 뻔한 거 알아요? 왜? 폭주에 휘말리면 죽을 줄 알았어?”

“내가 죽어 봤자 네가 또 살렸겠지.”

“그걸 알면서 왜 주변에서 얼쩡거릴까?”

“믿는 구석이 있었거든.”

“뭐?”

“저기 쓰러져 있는 가이드. 도인호랑 파장 90% 일치야.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바꿨거든.”

“하아…. 내 생각만 하라니까 조그만 머리로 또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백우경은 눈을 살포시 접은 채 호수를 쳐다봤다.

옛날부터 저 웃고 있는 낯짝이 꺼림칙했다. 호수는 백우경과의 질긴 연(緣)을 끊어 내고 싶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처럼 그와의 연을 자르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연(鳶)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호수는 백우경에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목숨을 끊어도 소용없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죽일 수 없다.

백우경의 그림자 안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똥을 밟아 같이 더러워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널 죽이기로 했거든.”

호수는 백우경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한기가 서린 듯한 낮은 목소리는 경고하는 것 같았다.

“네가 이능력을 쓰지도 못하게 묵사발을 만드는 거지.”

“내가 죽으면 차장님도 죽어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바람이 분다. 비단결 같은 호수의 금발 머리카락이 아스러질 듯 흩날린다. 개기 월식이 찾아오듯 붉은 달처럼 점차 어두워지는 호수의 눈동자에 백우경은 황홀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아. 그럼 우리 같이 죽는 건가요?”

“…….”

“같이 죽는다니 너무 로맨티스트다. 차장님은 가끔 보면 나보다 더 하다니까.”

백우경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하지만 차장님. 그건 그거고 오늘 일은 그냥 못 넘어가요.”

백우경이 멱살을 잡은 호수의 손을 두 손으로 포갰다. 달콤한 가이딩이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언제 받아도 사랑스러운 가이딩이다. 그야 당연했다. 호수와 백우경의 파장은 100%이기 때문이다.

“오늘 일에 대한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호수는 신경질적으로 백우경이 잡은 손을 쳐냈다. 입술을 내밀고 다가오기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마취총을 꺼냈다.

탕!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호수가 총을 쏠 줄은 몰랐는지 백우경의 몸은 너무나 쉽게 털썩 쓰러졌다.

호수는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손을 털고 호은을 치료하고 있는 에스퍼에게 갔다.

“상황은?”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다행히 폐를 찌르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얼굴에 피가 많이 묻어 있어 걱정했는데 머리 윗부분이 찢어진 것 같습니다. 나머진 타박상이라 금방 치료 끝날 것 같습니다.”

“반정부랑 부딪혔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네.”

몸 하나는 정말 타고났어. 호수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호은을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에스퍼면 몰라도 가이드가 죽는 꼴은 못 보지. 호수는 구부려 앉아 피에 젖은 호은의 앞머리를 넘겨줬다.

“잘 버텨 줬다.”

호수는 청염(靑炎)의 이능력 이식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모든 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태울 수 있는 화염 능력. 그중에서도 가장 공격이 센 청염이었다.

저 결정체로 만든 이능력품이라면 에스퍼를 빠르게 한 번에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호수에게 도인호는 백우경을 죽일 수 있는 도구였다. 하늘이 불쌍한 자신에게 내려 주는 희망의 한 줄기라 생각했다.

10년을 기다렸다. 도인호가 이식받은 그 순간부터. 그가 하루빨리 폭주해 결정체를 남기고 죽기를.

‘이번에는 뺏기지 않아.’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호수에게 달려든 도인호는 그렇게 말했다. 호수는 그의 처절함이, 다급함이, 절박함이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나 뺏지 마.”

호수는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내 자유를.”

호수는 도인호의 결정체를 회수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이능력품으로 직접 백우경을 죽이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에 쓰러진 남자의 정의론에 현혹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도인호를 도구로 보지 못했던 건 자신이었을까.

땀과 피로 뭉친 호은의 머리를 정돈해 주며 호수는 고개를 들었다. 뚫린 창 너머로 아침이 밝아왔다.

***

“배고파…….”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을 하며 호은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의 무늬가 호은을 반겨 준다. 익숙하지 않은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시선을 돌리자 심전도 기계가 보였고 창가에는 싱싱한 꽃들이 병 안에 담겨 햇살을 받고 있었다.

‘내 방이 저런 인테리어였나.’

무거운 몸을 뒤척이다 허리를 반 정도 일으키며 천천히 자신이 있는 곳을 살펴본 호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병원……?”

태어나서 입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호은은 병실이 낯설기만 하다. 링거를 뽑고 몸을 더듬더듬 만지다 천천히 침대에 나와 바닥에 서더니 팔 벌려 뛰기를 시작한다.

삼 세트 정도 했을까. 전혀 이상 없는 몸에 호은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나 여기 왜 있는 거야?

-툭.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수척해 보이는 얼굴의 도인호가 들고 있던 꽃을 떨어트렸다.

호은은 다행히 멀쩡히 살아 있는 도인호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려 했다. 그것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도인호의 왼쪽 뺨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진다. 처음에는 뭐가 묻었나 했지만 한 번 더 빠르게 뺨을 타고 내려가는 것에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인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호은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안는다.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났어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데.”

도인호의 입에서 걱정이라니. 지금 내가 걱정되어 우는 거야? 호은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 무미건조한 인간 도인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호은도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건 제법 충격이었지만 그것이 눈물이 날 정도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도인호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해 어색하게 팔을 올려 도인호의 등을 감싸 다독여 줬다.

“나 괜찮아!”

설마 키스 때문에 그런가? 호은의 마지막 기억은 도인호와 입을 맞추며 했던 직접 가이딩의 순간이다. 폭주를 막으려고 키스를 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이후 기억이 없다는 것이 호은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기억 안 나는 이후에 무언가를 했나?’

더 진한 무언가를 했고. 그래서 도인호가 나를 보면 울 정도의 관계로 발전한 건가? 호은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순수한 도인호의 순정을 가져가 버렸을까 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 물기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 달을 기다렸어요…….”

“어? 잠깐만. 한 달? 한 달이라니?”

“한 달 동안 의식불명이었어요.”

“……!”

호은은 도인호를 다독이던 팔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현장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해 우산 받쳐서 걸었지. 연기도 많이 맡았다. 멀쩡한 몸 탓에 다쳤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을 살리겠다고 온 사람이 한 달이나 의식불명이었다면 호은이라도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을 거다.

“인호야, 너는 괜찮아?”

호은이 도인호와 조금 떨어지더니 눈물 자국이 번진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촉촉해진 노란 눈동자와 붉어진 눈가를 보니 미남은 울어도 미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은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도인호는 어린아이처럼 호은의 품으로 안겼다. 180도 바뀐 도인호의 행동이 얼떨결 하면서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불안했을 테니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내가 너를 살리고 싶었던 것처럼 너도 내가 얼른 눈을 뜨길 바랐던 거구나.’

분명 눈 감기 전 마지막에 책임진다고 했는데, 이렇게 책임 없는 어른의 모습이라니. 도인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호은은 중얼거렸다.

“미안. 늦게 깨어나서.”

“……저, 저야말로 형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내가 더 미안.”

서로 사과를 주고받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들이. 사과할 사람 번지수를 잘못 찾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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