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25화 (25/129)

25화

60층에 있던 반정부 중 한 명인지 냉랭한 목소리의 여자가 멱살을 잡은 상태로 호은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쿵!

벽에 닿은 충격으로 인하여 호은은 피를 쏟아 내며 배를 부여잡았다.

“감히 쓰레기 같은 계약서로 우리를 속여?”

호은과 다르게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여자가 다가올 때마다 바닥 지면이 얼어 갔다. 이런 불길 속에서 멀쩡할 수 있는 건 여자의 이능력 덕분인가 보다.

호은은 등에 메고 있던 우산으로 바닥을 간신히 짚은 채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어디 있어……. 도인호…….”

“도인호? 아. 저 괴물?”

여자가 돌린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가자 네모난 얼음 상자 안에 도인호가 있었다. 이능력을 쓸 때마다 얼음벽이 뚫려 밖으로 불이 새어 나오지만 금세 다시 얼음벽이 생겨 막아 낸다.

호은은 우산을 받침대 삼아 도인호가 있는 곳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려 했다.

“너 바보야? 저 녀석 조금 있으면 폭주해. 그렇게 가다 간 너 뒤진다고.”

“크윽….”

“빌런보다 더 빌런 같은 작전을 짠 주제에 동반 자살이라도 하겠다, 뭐 그거야?”

여자는 호은의 등을 짓밟았다. 앞으로 고꾸라진 호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온몸이 떨렸다. 여자의 주변에 있는 냉기 덕분인지 그나마 연기는 줄어든 기분이지만 손바닥도 아프고 등도 아팠다.

정부가 짠 작전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화난 걸 보면 아마도 도인호의 폭주와 관련된 게 분명했다. 폭주를 이용해 이들을 막으려고 한 걸까?

“가이드 부족해서 불렀는데 저딴 괴물 같은 녀석이나 오고 말이야.”

바닥으로 피가 투둑투둑 떨어진다. 힘겹게 고개를 올리니 여자의 턱에서 피가 떨어진다.

‘도인호를 가두느라 이능력을 많이 쓴 건가.’

그러게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안 벌렸으면 반정부도 다칠 일 없고 나도 이런 개고생 할 일 없고. 연기를 많이 마셨는지 정상적인 생각이 안 돌아간다.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오로지 하나의 단어만 떠다닌다. ‘도인호.’ 그래 가야 해. 호은은 기어서라도 가겠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끈질겨. 그만 죽어.”

여자가 호은의 배를 다시 거침없이 찼다.

-쾅!!

에스퍼의 신체 능력은 180이 넘는 호은을 간단하게 날리기 충분했다. 벽이 움푹 파일 정도의 파괴력을 보인 여자는 헝클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하아, 하아…”

호은은 힘겹게 손으로 바닥을 지탱하여 벽에 기대앉았다. 단단한 특수 헬멧이 반으로 갈라져 간신히 머리에 걸쳐 있었다. 헬멧 안 쓰고 있었으면 뇌진탕이었겠네.

극도의 공포와 죽음이 눈앞에 있자 자동으로 눈물이 고인다. 이 새벽의 끝이 있을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에 호은은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가이드는 나약하다. 가이드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 사실이 호은을 괴롭게 만들었다. 동반 자살하러 왔냐는 반정부의 말을 받아쳐 주지 못해 분했다.

권호은. 너 도대체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아 죽다 살았네. 어라? 아직 도망 안 간 가이드가 있었잖아.”

반쯤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뜨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이제야 좀 살겠네.”

멱살을 잡힌 호은은 강제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전통 탈을 써서 보이지 않는 얼굴을 제외하고 오른쪽 신체 전체가 화상을 입은 듯한 남자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남자는 쓰러질 것 같은 호은의 몸을 받쳐 안자 화상 입은 피부가 빠르게 재생됐다.

“심하게 당했는데 보스?”

“정부 녀석들 완전 구라는 아니었나 봐. 이 녀석 아까 그놈보다 등급 높은데? 그러면 우리도 완전 손해는 아니잖아.”

TV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협박하던 놈……. 손해가 아니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호은이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목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흘끔 내려보자 주사기가 꽂혀 있다.

“저 녀석 폭주하기 전에 빨리 채취하자.”

쾅. 쾅. 네모난 얼음 상자의 구멍 뚫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용량이 커 보이는 주사기 안으로 붉은 피가 점점 늘어난다. 호은은 도인호가 갇힌 얼음 상자를 멍하니 봤다.

얼음 상자는 도인호가 쓰는 이능력으로 인해 온통 연기로 가득하다.

“그만해…… 도인호.”

호은은 힘겹게 도인호의 이름을 불렀다. 능력 그만 써. 이 녀석들 어차피 곧 도망칠 것 같으니까. 조금이라도 폭주를 늦추게 그만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호은은 숨조차 겨우 쉬는 상태다. 입을 연 상태로 아무 말도 못 하자 호은은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호은의 뺨이 눈물로 젖어 갔다.

-콰앙!

그 순간 방금보다 더 강한 폭발음과 함께 지면이 울렸다. 산산조각이 나는 얼음 상자. 뜨거운 불길이 호은의 옆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툭. 호은은 자신의 옆에 떨어진 팔을 쳐다봤다. 주사를 놓고 있던 남자의 팔이 불에 닿아 잘려 나갔다.

“워후. 진짜 무섭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까.”

사라진 팔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보스라고 불린 반정부는 남은 손으로 호은의 목에서 주사기를 뺐다. 반 정도 찬 호은의 혈액을 챙긴 남자는 연달아 날아오는 불 폭탄을 피해 여자에게 다가갔다.

“슬슬 가자.”

“보스 저 가이드 안 죽여?”

“죽이기 전에 저놈 폭주가 먼저 터질걸.”

여자는 호은을 불만족스럽게 쳐다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이내 두 사람은 푸른 불꽃 사이로 사라졌다. 호은은 그제야 헬멧을 벗어 던지고 옆에 굴러져 있는 우산을 들어 힘겹게 도인호가 있는 곳으로 한걸음 씩 내디뎠다.

불이 타는 소리. 가이드 워치에서 위험 경고를 내는 소리. 이능력을 마구 쓰던 도인호는 반정부가 사라지는 걸 보고 이능력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호은을 쳐다봤다.

“왜…….”

현장에 돌아온 가이드에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가이딩에 호은이 아닐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호은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도인호는 이해 가지 않았다. 자신은 도구다. 죽음이 정해져 있는 도구. 어차피 혼자서 쓸쓸하게 폭주해 죽을 운명이다.

어린 시절 에스퍼 협회에 돈 주고 팔려 왔다는 것과 20살에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인호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심장이 자기 몸 안에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도인호는 이미 어릴 때 죽은 느낌이다. 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죽을 이유는 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도인호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디데이일 뿐이다.

그것이 편했다. 정해진 결말이 있다는 건 아등바등 살 필요 없다는 뜻이었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단 뜻이다.

도인호는 그것에 익숙해졌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 그것이 도인호 인생의 바다다. 그런 바다에 누군가 돌을 던진다. 이렇게 잔잔한 건 바다가 아니라는 듯.

“왜…… 왜 왔어요.”

호은이 힘겹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도인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쿨럭, 쿨럭. 야…… 그만 가.”

“제발…… 다가오지 마요.”

호은은 걷다가 멈추고 피를 토했다. 장기 안이 쿡쿡 찌르는 게 발로 맞았을 때 내상을 입은 모양이다. 도인호는 피를 토하는 호은의 모습에 손을 내밀다 이내 빠르게 감췄다.

이능력을 멈췄지만, 곳곳에 붙은 불길은 사라지지 않고 더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대로라면 호은이 산소 부족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도인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자신의 뒤에 있는 창문을 폭발했다.

두근. 심장이 크게 요동치고 관자놀이로 핏줄이 터질 것처럼 팽팽해진다. 이제 한계다. 곧 폭주할 게 분명하다.

우산으로 몸을 지탱해 힘겹게 도인호의 앞까지 온 호은은 쓰러지듯 도인호를 껴안았다.

“같이 가자…….”

“이미 늦었습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세요. 분명 지원팀이 받아 줄 겁니다.”

도인호가 입을 열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한계다. 이 상태로 가이딩을 받아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미지수다.

도인호는 심장부터 시작해 온몸이 열기로 뜨거워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능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제발……. 뛰어내려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도인호가 말했다. 호은은 도인호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걸 힘겹게 들어 올려 한 손으로 도인호의 뺨을 감쌌다.

“너 살려 주겠다고 자신만만했는데……. 현장은…… 내 생각보다 위험했고.”

나는 너무 약했어……. 호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혼자서는 못 견디겠더라…….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어.”

“도망가요.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아무도…… 나, 나조차도 당신 욕 안 해요. 아니 못 합니다.”

“푸흐흐. 하아. 인호야. 기억나? 생각해 보라 했잖아. 폭주해야만 사는 이유 말고……. 네가 생각하는 너로 살 수 있는 이유.”

“그런 거 없어요…….”

“그래……. 맞아. 그런 거 없어. 모두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하루를 버티진 않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지.”

“죽는 게 제 운명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요. 제발, 제발 좀!!!”

“운명…… 하하. 그거 다 미신이야…….”

호은이 실없이 웃었다. 도인호는 왼손부터 조금씩 나오는 불길에 힘으로라도 억지로 호은을 밖으로 던질 계획을 세웠다.

-두구구구.

멀리서 들려오던 헬리콥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에스퍼 협회 마크가 달린 헬리콥터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자 헬리콥터에 달린 조명이 도인호와 호은이 있는 곳에 스포트라이트를 내렸다. 도인호는 마지막 작별을 준비했다.

“호은 형. 미안해요.”

그렇게 호은이 불러 달라고 해도 불러 주지 않았던 호칭. 호은은 아픈 것도 잊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도인호는 이능력이 나오지 않는 오른손으로 호은의 옷 뒤를 잡았다. 그 상태로 전력을 다해 밖으로 던질 생각이었다.

“그래. 나도…….”

도인호가 팔에 힘을 주기 전 호은이 더 빨랐다.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 헬리콥터의 조명으로부터 두 사람을 가렸다.

우산을 펼치자 빌딩 안은 막혀 있는 천장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첫 키스라면 미안.”

호은은 도인호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도인호의 입을 열고는 혀를 감쌌다. 갑작스러운 진한 가이딩에 도인호는 들었던 오른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입술을 탐닉했다.

처음 가만히 멈춰 있던 도인호는 떨리는 손으로 호은의 뒷목을 감싸 더 깊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몸에서 새어 나오던 불꽃은 빗방울을 맞자 그 크기를 줄어들어 빠르게 소화되었다. 몸 안을 나가고 싶어 끓던 불길도 잦아들어 갔다. 대신 다른 욕망이 꿈틀거렸다.

젖은 소리가 두 사람 입에서 나오며 실타래가 가늘게 이어진다. 입술을 뗀 도인호가 자신도 모르게 호은의 목 주변을 입술로 지분거렸다. 흰 목에 붉은 자국이 남는 걸 보며 호은을 더 세게 껴안아 다시 입을 맞춘다.

“상황종료.”

헬리콥터 문 앞에 앉아 사다리를 타려고 준비하던 호수는 안정적으로 변하는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번 작전은 총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인질을 구하는 것. 두 번째는 가짜 계약서를 만들어 타이거의 뒤통수를 치는 것. 세 번째는 타이거가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도인호는 에스퍼 강화제 약을 먹는 거였다.

에스퍼 강화제는 에스퍼의 이능력을 강화하는 거지만 도인호처럼 가이딩 수치가 불완전한 에스퍼가 먹을 경우 폭주로 이어진다.

반정부와 싸움으로 인한 정부 에스퍼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도인호 하나로 끝을 내자는.

빌딩 밖으로는 도인호의 폭주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쉴드 이능력을 가진 에스퍼들로 배치했다.

‘하지만 오늘은 필요가 없겠네.’

비 내리는 건물 안으로 검은색 장우산이 두 사람을 가려 준다. 저기서 뭘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호수는 헬리콥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한…… 10분 뒤에 다시 오자고. 아 그 정도는 부족하려나.”

두 사람을 가려 주고 있던 장우산이 호은의 손에 힘이 빠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호은이 눈을 찌푸리며 도인호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묻었다. 호은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달래는 손과 다르게 도인호의 얼굴을 야차처럼 변해있었다.

도인호는 뒤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손을 뻗어 폭발을 일으켰다. 작은 폭발이긴 했지만, 헬리콥터가 휘청거리기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폭발에 저항하듯 흔들리던 헬리콥터가 건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그 행동에 호수가 미쳤냐며 소리 질렀지만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도인호는 조심스럽게 호은의 뺨을 잡고 조르듯 말했다.

“약속해 줘요…….”

“……뭐든.”

”날 살린 걸 후회하지 않겠다고.”

“응 후회 안 해.”

“…… 첫 키스 가져간 거 책임져 주세요.”

“그래. 약속이야.”

호은의 입술이 도인호의 입술 바로 앞에서 움직인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도인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 만일까. 이렇게 경계 없이 웃어 본 게.’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도인호는 호은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호은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 상냥한 허락에 심장이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듯 반응한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