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바닥을 구르는 B1의 헬멧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B1은 어딘가 넋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나랑 놀자!”
그러고는 이내 아이가 이끄는 곳으로 말없이 따라갔다.
“모두 헬멧 안 벗겨지게 조심합시다. 정신계 에스퍼로 보이네요. 눈이 마주치면 끝입니다.”
C1이 무리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호은은 슬며시 자기 헬멧을 손으로 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럼 저 사람들도?”
“아마도…….”
아직 해당 층에는 2명의 반정부가 더 있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번쩍하는 소음과 함께 해당 층의 불이 꺼졌다 켜졌다.
“진짜 방사 가이딩은 질이 다르다니까.”
“……흥. 그저 정부의 개일 뿐이야.”
또다시 호은의 앞으로 두 사람이 등장했다. 같은 키와 체구의 남성 두 명이었다. 전통 탈 뒤로 보이는 머리 스타일은 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를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어깨를 살짝 스치는 투톤의 단발머리였다. 위에는 흑발, 밑에는 백발. 다른 한 명은 윗부분이 백발이고 밑이 흑발이었다. 서로 색만 반전된 같은 머리다.
“우리도 기다리고 기다렸던 가이딩 좀 받아 볼까?”
“정부의 개는 짜증 나지만. 우린 제법 굶주렸으니까.”
다가오는 두 사람에 C등급들이 서둘러 앞을 막았다.
“우리는 너희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줬다. 인질 먼저 내보내.”
호은은 에스퍼와 반정부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뒤로한 채 조금씩 비상구 계단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인질은 줄에 묶인 거 빼고는 양호한 상태다. 반정부 에스퍼는 총 3명. 현재 가이드는 A2인 자신과 잡힌 B1을 제외하고 A1, B2, B3로 충분히 케어가 가능할 것이다.
가이드 워치는 도인호와 연동되어 있어 그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해 주었다. 아직은 가이딩 수치가 40%다. 가능하면 인질이 다 빠져나간 뒤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도인호가 능력을 쓰면 금방 가이딩 소모가 될 걸 아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 자꾸만 비상구 계단으로 의식이 쏠린다.
“어디 가?”
귓가에 들리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호은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느 순간에? 시선을 뗀 건 몇 초밖에 되지 않았다. 밑에 머리카락이 백발인 남자는 호은을 뒤에서 껴안은 상태로 손에 단도를 쥐여줬다.
“자. 그렇게 구하고 싶다면 서둘러야지?”
“…….”
“치사하다고 형. 혼자서 가이딩 받을 셈이야!”
“형이니까. 좋은 건 뭐든지 먼저인 게 당연하잖아?”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호은은 한 손으로 헬멧을 더욱 깊게 눌러썼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공간 속 단도를 쥔 손에서는 땀이 났다.
슬쩍 본 C1은 호은 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자세. 호은은 긴장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인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보였다. 아마도 맨 처음 등장한 에스퍼의 이능력 때문인 거 같다. 인질들의 손목에 묶인 줄을 단도로 전부 끊은 호은은 조심스럽게 뺨을 두드렸다.
“이봐요. 정신 차려 보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상태의 인질을 5명의 반정부를 피해 데려가는 건 무리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가만히 서서 레스토랑 내부를 훑었다. 현재 층에 있는 반정부는 총 세 명. 우리 쪽 가이드 중 한 명은 반정부에게 정신 조종을 당한 상태다. 인질은 어림잡아도 수십 명. 일반인이 있는 상태에서 정부 에스퍼가 쉽게 능력을 쓸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현재 59층에서의 상황은 딱 하나.
반정부 에스퍼들에게 정부 가이드들이 얌전히 가이딩을 하는 것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이다. 60층에서 계약 협상은 아직 안 된 건가?
“이능력을 풀고 인질을 당장 밖으로 보내!”
“그건 정부가 약속을 잘 이행했는지 확인부터 해야지?”
C1이 이능력이 담긴 총을 들고 자세를 잡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흑발의 남자가 밑으로 사라졌다.
그림자에 빨려 나가듯 훅 아래로 사라진 남자는 C1의 그림자 위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C1의 옆에 서게 된 반정부는 검은색 장갑을 낀 손으로 C1의 팔을 매만졌다.
“아. 기분 나빠. 네 놈 C등급이냐? 꽝이네.”
C1은 그림자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능력을 보니 알겠군. 흰 머리가 최선율, 검은 머리가 선악율. 빛의 이능력과 그림자의 이능력이라니. 정말 친형제였다면 놀라울 만큼 잘 맞는 상성이군.”
“우리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걸 보니 조사 좀 했나 보지? 그럼 더욱더 잘 알겠네. 우리를 풀네임으로 부를 정도니 말이야. 그럼 이것도 알지? 우리에게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말이야.”
“과연 그럴까?”
“건방지네. 형. C등급 하나 정도는 죽여도 되지? 응? 나 못 참을 것 같아.”
“율아. 그래도 가이딩은 받아야 하니 팔다리만 망가트려. 안 그러면 보스에게 혼날 거야.”
“쳇. 알겠다고.”
자아. 그럼 어떻게 요리해 줄까? 악율이 허리춤에 찬 총을 꺼내 C1에게 겨냥했다. 리볼버 종류로 보이는 권총은 장전 후 바로 쏘면 되는 방식이다. 그에 비해 C1이 들고 있는 총은 장총으로 자세를 잡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악율이 마치 어린아이 장난치듯 “어느 쪽에 맞출까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C1의 양팔과 양다리를 향해 총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딩. 동. 댕. 동. 전부 당첨!”
네 발의 총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무선 이어폰으로 S1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 완료.” 총알 소리에 묻혔지만, 확실히 계약 완료였다.
호은은 총소리와 함께 C1을 향해 뛰었다. C1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악율의 팔을 위로 올리기 위해서였다. 총구의 방향을 바꾸려는 호은의 뜀박질에도 불구하고 네 발의 총알은 빠르게 C1에 다가갔다. 하지만 C1의 앞에 막이라도 있는 듯 총알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확인.”
자신에게 날아오는 총알에도 아무렇지 않게 무전기를 들고 대답을 한 C1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멈춰 선 총알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율과 악율은 당황한 듯 에스퍼? 하고 중얼거렸다.
“이 자식들. 우리를 속인 거냐?!!!! 신아! 당장 인질들을!”
공간은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이유가 사라진 정부 에스퍼는 가이드 행세를 버리고 이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호은은 인질을 구하기 위해 다가온 정부 에스퍼를 도왔다.
가장 먼저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인질의 눈을 가리기 위해 들고 있는 단도로 식탁보를 잘라 천을 만들어 냈다. 흰색 천으로 눈을 가린 인질들은 시야가 차단되고 나자 허공을 바라보던 고개를 툭 하고 떨궜다. 일반인의 몸으로 에스퍼의 능력을 오래 받다 보니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다.
-치직. 첫 번째 작전 성공. 지원팀 응답 바란다.
-지원팀 준비 완료. 두 번째 작전 시작해라.
-확인.
인질 구조를 위해 빌딩 밖으로는 지원팀이 현장에 도착한 상태다. 호은에게 왔던 정부 에스퍼는 노란색 기다란 줄을 꺼냈다. 이능력품으로 확인된다. 원형으로 모아둔 인질을 줄로 감싸 묶은 다음 호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이동 에스퍼입니다. 먼저 현장 빠져나가죠.”
이능력으로 인하여 건물은 크게 진동을 울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정부 에스퍼들이 각자 능력을 써 반정부를 제압하는 모습. 어느새 다가왔는지 대량의 순간 이동을 해야 하는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가이드.
아수라장이 된 공간이 슬로 모션이 걸린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다. 처음으로 경험해 본 현장. 그곳은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C1이 선율과 악율이 다가오는 것을 이능력으로 막아 가며 B1이 있는 공간까지 서둘러 뛰어갔다.
C1을 엄호하는 에스퍼중 한 명이 총을 들어 신이라고 불리는 반정부에게 총을 쐈다.
빠르게 날아간 총알은 엄청난 바람을 몰고 왔고 빛처럼 빠르게 움직인 반정부 선율이 바람에 날아가려는 신이라 불린 반정부를 품에 안고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손을 뻗어 B1을 잡은 C1이 서둘러 인질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어서 잡으세요!”
“아직…… S1이랑 C4가 없어요.”
“괜찮습니다. S1은 제 이능력이 담긴 이능력품을 가지고 있으니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겁니다.”
호은은 진동하고 있는 가이드 워치를 봤다. 도인호의 가이딩 퍼센트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안 내려오는 거지?’
멍하니 비상계단 문을 바라보고 있는 호은을 기다리지 못한 채 결국 순간 이동 에스퍼가 호은의 오른손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C4는요? S1이랑 같이 빠져나오는 건가요? 아직 위에서 이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C4는 이번 작전에서 제외입니다.”
“…!!”
붙잡은 손을 호은이 내치자 어느새 바짝 다가온 C1이 호은의 어깨를 붙잡았다.
“처음부터 그런 계획입니다.”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렸다. 순식간에 불길과 뜨거운 열기가 빌딩을 감쌌다. 푸른색 불. 도인호의 이능력이다.
-S1은 빠져나왔다. 나머지도 빨리 인질 데리고 나오길 바란다.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순간 이동 에스퍼가 알겠다고 답했다. 호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헬멧 앞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에 숨쉬기가 힘들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목구멍을 괴롭힌다. 밖으로 나가면 이렇게 뜨거운 불도 고통스럽게 하는 연기도 없다.
“셋 세고 가겠습니다. 하나, 둘.”
순간 이동 에스퍼의 손을 잡은 호은은 위에서 떨어지는 자재들과 앞이 보이지도 않는 검은 연기에 한쪽 팔을 들어 헬멧을 내렸다.
“셋.”
호은은 숨을 참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이동 에스퍼가 뒤늦게 다시 호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호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갔다.
도인호에게 닿기 전에 연기를 너무 많이 먹어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는 위에서 소음이 나던 순간부터 세 명의 반정부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거로 충분히 증명됐다. 아무도 이 빌딩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빌딩은 무너질 거다.
도인호와 함께.
‘처음부터 그런 작전이라니.’
왜? 어째서 도인호가 결정체 이식자이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사람을 죽으라고 등 떠미는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정말 없는 건가?
호은은 기침을 뱉으며 비상구 계단을 올라갔다. 연기로 인하여 눈이 맵다. 폐가 쪼그라들 것 같다. 중앙부터 퍼져 나간 불길은 비상구 계단까지는 아직 번지지 않았지만 언제 번질지 몰라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은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쾅.
어디에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폭발음 소리.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무거운 다리로 힘겹게 60층까지 올라간 호은은 비상문을 열려고 손을 가져다 댔다.
“윽……!”
손잡이가 뜨겁다. 장갑이 녹아내렸다. 얼마나 뜨거운 거야. 화상을 입기라도 한 듯 고통이 느껴졌다.
호은은 손잡이에서 손을 잠시 뗀 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야 해. 뜨거운 열기도 고통스러운 연기도.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문 너머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괴로울 거다. 아니 나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도인호를 보면 등짝을 후려쳐야지. 왜……. 이능력 함부로 쓰지 말라 했는데, 가이딩 퍼센트가 떨어지는 걸 알면서 이능력을 썼냐고 때릴 거다.
폭주 날짜까진 기다릴 거라 했으면서. 왜! 왜 지금 폭주를 일으킨 건지. 꼭 따지고 혼내 줄 거다.
“으아아악!”
고통은 한순간이다. 호은은 뜨겁게 달궈진 손잡이를 손으로 잡아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빠져나갔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숙여 기침을 토해 내던 호은이 아래쪽으로 최대한 몸을 낮춘 다음 도인호를 찾았다.
“도인호. 어디 있어.”
손바닥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연기를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바닥을 기어가듯 보폭을 옮기던 호은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아직 도인호를 못 찾았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그 순간 누군가 호은의 앞에 다가왔다.
“허억…… 헉. 도, 도인호?”
“……너 가이드?”
호은은 순식간에 멱살이 잡혔다. 희미하게 보이는 전통 탈, 도인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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