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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23화 (23/129)

23화

“그럼 어떡해. 상위 등급 중에 갈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데.”

레오와 대화를 하던 상대방이 물기 젖은 목소리로 레오에게 안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더니 신파 드라마를 찍는 듯 차라리 도망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호은은 나무 뒤에 숨어 두 사람이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은 어느새 1시 55분. 상대방 쪽도 이제 가야 한다며 레오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호은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앞으로 나왔다.

“저 죄송한데요…….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런데.”

호은의 등장으로 당황한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사라지자 달빛을 받아 어둠에 감싸여 있던 인영이 점점 드러난다. 호은의 얼굴이 보이자 레오는 도인호의 가이드……? 라고 중얼거렸다.

호은은 연구소에 가면 어린아이에 빙의해서 호은이도 갈 거야!! 호은이도 끼워 줘!! 난동을 부릴 예정이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당장이라도 출연할 미운 5세처럼 바닥에 온몸을 브레이킹하더라도 임무에 끼려고 했는데, 앞에 두 사람의 신파로 채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가 레오 씨 가이드 대신 임무에 참가해도 될까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레오의 상대방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레오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망설이는 표정. 레오는 자신의 가이드가 들고 있던 전투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가이드가 이걸 입고 임무를 수행하는 거지?”

“뭐? 아…… 응.”

특수부대 전투복처럼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 옷은 이능력 공격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옷이었다. 또한, 헬멧까지 차야 하므로 잘만 하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완곡히 거부하는 자신의 가이드에게 전투복을 빼앗은 레오는 호은에게 건넸다.

“이 은혜 꼭 갚을게.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제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 아기도 좀 생각해 자기야…….”

“……흐윽.”

레오의 상대방은 결국 마지막 말에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배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호은은 숨어 있던 나무 뒤로 가 훌쩍이는 두 사람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옷을 갈아입었다.

에스퍼만이 가이드를 원할 거로 생각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도와주는 존재. 그들의 히어로. 그래서 갑을 관계가 생기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저 두 사람의 모습은 그저 서로에게 을일 뿐인 인간이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평범한 연인이자 가족이다.

호은은 마지막으로 헬멧을 쓰고 두 사람 앞에 섰다. 눈가가 붉어진 두 사람은 호은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레오의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호은에게 알약 하나를 줬다.

“먹고 가요. 이번 임무를 위해 먹으라고 했던 약이에요. 이걸 먹으면 가이딩 파장도 달라져 아마 가이딩으로 그쪽을 알아보긴 힘들 거예요.”

호은은 헬멧 앞을 열어 알약을 먹은 다음 헬멧을 닫았다.

“가면 이능력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내 것도 제출했는데. 우산이야. 그거라면 도인호 불을 끌 수 있을 거야.”

레오의 말에 호은은 헬멧을 써 무거워진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호은은 사이즈가 맞지 않은 전투복과 신발에 억지로 발을 넣은 채 연구소 앞으로 갔다.

아홉 명의 전투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같은 복장이었지만 호은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옆으로 섰다. 익숙한 기척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가이딩으로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그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은은 헬멧을 꾹 누르고 남자의 앞에 손을 내밀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파이팅.”

호은은 남자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그 행동에 멈칫하더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호은은 헬멧 안에서 씩 웃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작아 보이는 상의와 발목이 보이는 바지. 발가락을 구부리고 있어야 그나마 신을 수 있는 워커. 남에 옷을 빌려 입어서 그런지 호은의 모습은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호수는 딱 봐도 호은으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가 없다는 그의 표정과는 반대로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가 있다.

뭐가 그렇게 자신 있는 건지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호수는 호은의 뒤로 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갈아입고 와.”

호은은 쇼핑백을 한번 그리고 호수를 한번 쳐다봤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호은은 호수가 전해 준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장소에 등장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나은 차림새였다. 호수는 앞으로 서서 각자에게 이번 임무 코드명을 붙여 줬다.

“S1, A1, A2, B1, B2, B3, C1, C2, C3, C4. 앞으로 여러분은 해당 호칭으로 서로를 불러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인질 구조다. 이능력은 최대한 사용하지 않을 것이나 필요하다면 이능력을 허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린 등급으로 줄을 다시 섰다. 호은은 A2 도인호은 C4. 순서대로 각자 이능력 도구를 받았다.

호은이 받은 건 흔히 알고 있는 우산이었다. 검은색 장우산은 천으로 된 우산 집에 들어가 있었고 우산 집은 어깨끈이 달려 있었다. 레오의 이능력품을 받아 다행이라 생각했다가 문득 검은색 장우산을 보니 도인호에게 돌려주지 않은 우산이 떠올랐다.

“총 세 팀으로 나눠서 움직일 예정이다. A팀은 타이거와 계약 협상. B팀과 C팀은 협력하여 인질 구조. 이때 반정부에서 가이딩을 원한다면 C팀이 주도적으로 가이딩을 해 줘야 한다.”

-A팀 S1(가이드) C4(에스퍼)

-B팀 A1(가이드) C1, C2, C3(에스퍼)

-C팀 A2, B1, B2, B3(가이드)

협회에서 준비한 대형버스로 이동한 직원들은 호수가 보여 주는 작전판과 함께 작전 설명을 들었다. 그 누구도 해당 작전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버스 안을 채웠다.

“특수한 상황으로 현장 업무가 아닌 가이드들도 이번 임무에 참여했을 거다. 억울한 놈도 있을 거고. 하지만 준비된 현장을 만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아 둬라.”

호수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호수가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S1에 입에서 욕이 나왔다.

“씨발. 장난해? 누가 봐도 목숨 내놓으러 가는 거면서.”

시간이 지나자 주변에선 그의 말을 동의하는 듯한 목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가이드들의 목소리였다. C등급 직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현장 업무를 하는 게 익숙해서 그런 걸까? 주변을 둘러보며 버스가 우울함에 잠식될 것 같다고 생각하던 호은에게 옆에 앉아 있던 C1이 말을 걸었다.

“그쪽은 괜찮아요?”

“네? 뭐…….”

“하기야. 프로필 봤을 때 A2 빼고는 거의 다 현장직이 처음인 가이드였죠. 현장 경험상 A2가 S1 역할을 맡아야 했는데. 저분이 잘할지…….”

“아……. 그런가요.”

“그런데 감기라도 걸리셨나요?”

“크흠, 흠. 새벽이라 목이 조금 잠겼네요~”

호은은 뒤늦게 목소리를 한 톤 올렸다. 지금 A2가 권호은이라는 건 아무도 모른다. 호은은 레오의 가이드 대타로 이 자리에 있는 거다.

‘그나저나 A2 빼고는 다른 가이드가 다 초짜라니.’

초짜를 보통 이런 위험한 임무에 내던지나? 호은이 생각에 빠졌을 때 버스가 흔들리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창밖의 모습이 변했다.

운전기사가 에스퍼인지 인천 지사에서 한강이 보이는 도로로 버스는 자연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에 호은의 입술이 메말라갔다. 도인호가 있는 팀은 A팀이었다. 계약 협상이라고 말하던데 정확한 내용은 S1만 전달받은 것 같다.

1순위는 인질 구출이라 했지만, 임무에서 나올 수 있는 키워드는 계약 협상을 무사히 끝내는 것으로 예상한다.

호은은 계약서가 들어 있는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을 쳐다봤다. 연신 입으로 구시렁거리는 S1이지만 저 가방이 자신의 생명줄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 건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다.

어느새 63 스퀘어라 쓰인 건물의 앞에 버스는 멈춰섰다. 무장을 한 열 명의 직원들이 일렬로 내렸다. 새벽의 서울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해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전기와 무선 이어폰을 테스트하고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열 명은 들어오라는 듯 열려 있는 정문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두컴컴한 63 스퀘어는 사람이 들어오자 마치 반겨 주기라도 하듯 차례대로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은 헬멧 덕분에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도 큰 충격은 없었다.

경계 태세를 갖춘 열 사람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수색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계단을 이용했겠지만, 가이드들이 60층을 계단으로 올라가는 건 무리라 판단한 선택이다.

-에스퍼 감지기에 현재 60층 2명, 59층 3명. 인질은 59층에 있는 거로 확인된다.

“A팀은 60층 B팀과 C팀은 59층으로 갑니다.”

현장 지휘 역할을 맡은 C1은 상황실에서 말하는 내용을 듣더니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엘리베이터에 타 5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목적 층에 내리면 타이거와 바로 마주칠 수 있으니 비상계단 쪽으로 우회할 생각이다.

50층부터 일부러 층마다 엘리베이터를 멈추게 했다. 50부터 59까지 눌러진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며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빠졌다.

손끝이 살짝 떨린다. 호은은 자신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제대로 임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도인호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느리게 심호흡하며 호은은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권호은.”

양손에 주먹을 쥔 채 호은은 이곳에서 모두가 사지 멀쩡한 채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5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모두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내렸다. 비상구 계단을 찾은 C1이 문을 열고 손짓하자 C2와 C3의 후방을 경계하며 모두가 비상구 쪽으로 들어갈 때까지 엄호했다.

호은은 가운데에 섞여 비상구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지금 여기 있는 열 명 말고 다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말이다.

59층에 도착하고 S1과 C4는 멈춰서 여덟 사람을 바라봤다.

“계약서 서명받으면 바로 무전 바랍니다.”

C1은 S1에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A팀인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고 나머지 여덟 명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C1이 신호를 주자 문을 박차듯 열고 B팀 에스퍼들의 엄호를 받으며 두 팀은 빠르게 59층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내부에 인질들이 줄로 묶인 채 한군데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얼핏 보면 협박받아 얌전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텅 비어 보였다. 눈동자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피부 또한 새하얗게 질려 있다.

“으음. 방사 가이딩이다!”

주방으로 보이는 은색 문이 활짝 열리더니 어린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에서 봤던 사람 중 가장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신난다는 듯 리듬 타는 걸음으로 뛰는 타이거 멤버는 여전히 이상한 전통 탈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휙 손을 내미는 아이에게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B1이 한 발짝 뒤로 빠졌다.

“나랑 놀자!”

키만 작다고 생각했으나 말하는 투도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빠르게 B1의 손을 낚아채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는 카페 테이블로 향하는 반정부에 B1이 뒤를 돌아보며 걷는 속도를 늦췄다.

아마도 C1에게 이대로 가도 되는지를 물어보는 거였을 거다. 그러나 C1이 신호를 주는 것보다 타이거 멤버가 더 빨랐다.

“나랑 놀자니까 어디 보는 거야!!”

양손으로 B1의 손을 잡아당긴 타이거의 멤버는 어린아이로 보였으나 역시나 에스퍼였다. 성인 남자를 가볍게 제압하는 압력에 B1이 휘청거렸다.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덕분에 쓰고 있던 헬멧이 벗겨졌다.

마치 그걸 노리기라도 했다는 듯 전통 탈을 쓴 아이는 자신의 전통 탈을 벗었다. 갈색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바뀌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헬멧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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