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20화 (20/129)

20화

“무슨 얘기해?”

호은과 김세희의 사이를 가로지르듯 란이 들어왔다. 그녀는 호은을 째려보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김세희를 보며 싱글 웃는다. 김세희는 란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냥 가이드끼리 얘기하는 거야-, 라고 답했다.

조금 쌀쌀하기 짝이 없는 김세희의 말에 란은 기죽지도 않고 옆에 달라붙어 대화를 이어 간다. 그러고 보니 김세희는 분명 고등학생인데. 두 사람 반말하는 사이구나.

‘도인호 씨도 나를 편하게 대해 주면 좋을 텐데.’

조금 부럽다고 생각하며 호은은 남들의 눈에 도인호와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어색한 사이처럼 보이나? 그래도 저녁 같이 먹는 사이긴 한데…….

“이쪽.”

생각에 잠겨 혼자 다른 방향으로 걷는 호은을 도인호가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온 호은이 정신 차리고 호수의 뒤를 따라갔다. 맨 뒤에서 그런 두 사람을 보던 김한슬의 눈이 잠깐이나마 반짝거렸다.

호수를 따라 건물을 나왔다. 단지를 걷다 보니 흰색 건물과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연구소가 등장했다. 건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연구원들이 보였다.

“새로운 데이터들이 왔다!!!”

거칠거칠한 피부와 눈 밑 다크서클을 가진 가운을 입은 남자가 호수를 반겨 줬다. 호수는 질색이라는 듯 남자의 어깨를 밀쳐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가이딩 측정하려고 올 때마다 그 지랄이냐?”

“지랄이라니. 환영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데이터들인가 하고!”

어느새 인턴 주위로 온 남자가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호은은 연구원의 반짝이는 눈을 피해 도인호의 등 뒤로 섰다. 광기에 찬 안광이 그를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연구원은 음침하게 혼자 웃으며 데이터를 측정하는 연구실로 안내했다.

연구실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마치 정신 병원을 떠오르게 하는 인테리어다. 이런 곳이라면 맨정신인 사람도 미칠 거 같았다.

여섯 사람은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연두색 환자복 같은 옷이다. 상의는 양 옆구리에 지퍼가 달려 맨몸에 기계를 부착할 때 쉽게 만들기 위한 디자인 같았다.

가장 첫 번째 측정은 김세희와 란이다. 나머지 네 사람은 통유리로 되어 있는 상황실에서 그 두 사람을 지켜봤다. 온몸에 기계를 붙인 김세희와 란은 내부에 갖춰진 스피커에서 삑 소리가 나자 직접 가이딩을 시작했다.

첫 번째 신호음에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상황실 모니터에서 란의 가이딩 수치가 올라가는 걸 보며 호수는 “잘 찾았네.”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호수는 바로 버튼을 눌러 다음 신호를 주었다.

총 세 번의 직접 가이딩을 해야 한다고 사전에 설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손, 두 번째는 포옹이었다. 접촉하는 부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는 거 같다.

호은은 유리창 너머로 서로 껴안고 있는 란과 김세희를 봤다. 김세희는 무료한 얼굴이었고 란의 볼은 살짝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신호음이 울리고 세희가 란의 이마에다 입을 맞췄다.

“아니……. 미성년자인데. 이래도 되는, 되는 건가요?”

“하? 미성년자니까 이마에다 해 주고 있잖냐. 너 뭐야. 어느 시대에서 왔어?”

호수의 못마땅한 소리에 호은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잠깐만 그러면 나도 직접 가이딩할 때 도인호와 저 정도 수위까지 나가야 한다는 건가?

슬며시 도인호를 쳐다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놀란 표정을 본 적이 없으니 저 무표정 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황한 티는 전혀 안 나긴 하는데. 에스퍼들에게는 이런 광경이 당연하다는 건가.

다행히 김세희와 란의 측정은 빠르게 끝이 났다. 기지개를 켜며 나오는 김세희와 잔뜩 상기된 볼로 조심스럽게 자기 이마를 만지다 작은 몸짓으로 발을 구르는 란이다.

“다음 류윤재, 김한슬 준비해.”

두 사람도 첫 번째 팀처럼 같은 단계별로 측정을 진행했다. 다른 점은 김세희와 란은 세 가지의 직접 가이딩 측정을 하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거고, 이 두 사람은 전체적으로 앞에 팀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세희 씨 때는 빨리 넘기시더니 왜 류윤재 씨는 다음 측정 알림을 느리게 하는 건가요?”

“첫 번째 팀은 서로 파장이 잘 맞았고 두 번째는 파장이 잘 안 맞으니까 가이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다.”

“파장이요?”

“같은 가이딩이라고 해도 그 가이딩이 잘 맞는 에스퍼가 있고 잘 안 맞는 에스퍼가 있지. 이걸 수치로 보는 걸 파장이라 해.”

“음…. 예를 들면 셰이크를 일반 빨대로 먹었을 때랑 조금 더 넓은 빨대로 먹었을 때 셰이크를 흡입하는 양이 다른 것처럼요?”

“그런 예시는 처음 들어 본다. 뭐 네 말이 맞아. 저기는 류윤재가 버겁겠어.”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측정이 끝났다.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뻐근해진 몸을 풀며 마침내 호은과 도인호의 측정 시간이 다가왔다.

호은은 자신의 몸에 붙여지는 낯선 기계들을 느끼며 건너편의 도인호를 바라봤다. 셰이크 입장이 된 기분이다. 일반 빨대 말고 커다란 빨대로 먹어 줘라. 인호야.

-삐익

호은과 도인호의 첫 번째 측정 알림이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상황실에서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가 올라가는 걸 보며 호수는 턱밑을 매만졌다. 호수가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의 파장은 못 해도 80% 이상은 나올 것 같았다.

1단계 가이딩 퍼센트가 금방 올라갔다. 25%에서 천천히 26% 27% 이내 숫자는 곧 30%가 되었다.

-삐익

두 번째는 포옹이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도인호를 껴안는 호은을 보며 호수는 생각했다.

임무가 있으면 50%까지 직접 가이딩으로 채워 넣으라고 했지만 무슨 일인지 도인호에 대한 임무가 다 끊겼다. 암묵적으로 폭주 날짜를 맞추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호수는 호은이 50%까지 가이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도인호 같은 도구는 호수 같은 베테랑 가이드도 가이딩하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은 나오지 않을 가이딩 양과 컨트롤 능력을 갖춘 본인 또한 도인호를 오래 가이딩하다 보면 코피가 흐를 정도다. 호은이 만에 하나라도 A등급 이상이라고 한다면 50% 채울 때쯤 코피를 흘리겠지.

2차 측정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가이딩 수치가 천천히 올라가 40%를 찍었다. 호수는 내부에 설치된 CCTV로 호은의 얼굴을 확대했다. 식은땀은 흘리고 있었으나 한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침내 세 번째 측정 알림을 울렸다. 포옹한 상태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호은이 조심스럽게 도인호의 뺨에 입술을 댔다.

그 모습에 호수는 픽하고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정도도 부끄러워하는 놈이 도인호의 폭주를 어떻게 막는다는 건지.

그래도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가이딩 수치가 41% 이상으로 점점 올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은의 호흡이나 신체 상태 모든 게 정상적이라는 거다. 도인호의 가이딩을 정말로 버틸 줄이야. 젊었을 때 내 모습이 저랬으려나 호수는 짧게 생각했다.

호수는 마이크의 스위치를 온으로 돌리고 두 사람이 들리게 말했다.

“볼에다 하지 말고 입술에다 해.”

볼 키스의 가이딩은 45%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하게 닿는 부위가 적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도인호의 가이딩 빨아들이는 양을 호은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장난식으로 말한 50%라는 수치. 권호은 너는 그걸 넘을 수 있을까.’

호은이 도인호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한다. 아쉽게도 호수가 있는 이곳에서는 두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잠깐 숙인 호은이 고개를 들더니 마치 유치원생처럼 도인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부딪친다.

“뽀뽀냐…….”

호수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핸드폰을 넣은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지난번 징계 전화가 자동으로 떠올라 반사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준다. 호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차장님. 지금 당장 긴급회의에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 씹. 무슨 일인데.”

예상한 것처럼 좋은 소식은 아니었던 건지 내용을 듣자마자 호수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말하자면 너무 깁니다…….”

“짧게라도 말해.”

“그게, 도인호 사원…….”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웅웅 소리를 낸다. 다른 한쪽에서는 가이딩 수치가 올라가는 기계음이 들린다. 호수는 멍하니 가이딩 수치가 나오는 화면을 바라봤다.

51% 52% 53%……. 수치가 빠르게 올라간다. 호은은 얼굴이 붉어진 거 빼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인다.

부끄러운지 호은은 눈을 감고 있다. 도인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호은을 담아냈다.

잘못 걸렸네. 호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스퍼는 가이드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녀석들이다. 하지만 가이드의 숫자가 적은 만큼 그 음습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녀석은 적다. 어차피 본인의 것이 되지 못하니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에스퍼 사회에서 비뚠 녀석들이 아니고서 다 그 이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도인호는 다르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존재.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그 이치를 알 만한 기회조차 없었다. 가이딩 수치가 올라갈수록 도인호의 눈이 소유욕으로 일렁거린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저 눈빛을 내버려 두어도 되는 걸까.

“……에서 포기한 것 같습니다.”

“금방 갈게.”

호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도인호를 조금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위에 상황이 틈을 주질 않는다. 기계를 보니 60%까지 수치가 올라갔다. 이게 가능한 건가? 전성기의 호수여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결정체 이식자의 가이딩을 60%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이다.

두 사람이 파장이 안 맞아 그런 이유도 있지만, 결정체 이식을 받은 이능력자와 저 정도로 가이딩 파장이 맞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호은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측정 종료. 결과 나오면 따로 안내할 테니까 다들 해산해.”

스피커 사이로 들려오는 호수의 목소리에 호은은 입술을 떼고는 자기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볼이 화끈하다. 남자랑 키스했어. 아니 뽀뽀인가. 하여간 남자랑 했다……. 가이드는 성별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호은은 당황한 자신과 다르게 무표정으로 있는 도인호를 쳐다봤다. 에스퍼라 그런가. 그래도 너무 무반응인데? 평소의 도인호라면 저 같은 거랑 이런 짓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말하며 다크모드로 가야 했는데 말이다. 어쩐지 아침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다.

“어우, 덥다.”

어색하지 않으려고 내뱉은 말이지만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크흠, 호은은 목을 가다듬으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나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