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탈의실 안쪽에는 샤워실이 있었다.
두 사람은 훈련복을 벗어 쇼핑백에 넣고 재빨리 샤워실로 들어가 찝찝한 몸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에 닿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동시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찬물 샤워를 끝내고 흰색 수건으로 몸을 대충 두른 호은이 샤워실에서 나왔다. 물에 젖은 발은 걷는 자리마다 물 자국을 만들었다. 옷이 들어 있는 로커를 열어 입고 왔던 옷을 하나둘씩 갖춰 입고 마지막으로 가이드 워치를 찼다.
어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도인호의 가이딩 퍼센트를 확인했는데 현재 15%로 볼 때마다 떨어져 있었다. 20%를 유지하려면 어제 방사 가이딩을 받으러 왔어야 했으나 도인호는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말 안 듣는 학생을 잡듯 호은은 교육이 끝나면 도인호의 집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세 사람은 같이 식당에 가 밥을 먹고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다 시간 맞춰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훈련장은 어제와 다른 모양새였다. 잡동사니로 가득하던 내부가 정리되고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천장에 설치된 빔프로젝터가 흰색 화면을 벽으로 쏘고 있다. 영상을 보여 주려는 건지 의문을 가진 채 세 사람은 의자에 앉아 여전히 지각이 잦은 호수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20분이나 늦었다.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느긋하게 걸어온 호수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체력 등급 결과 빠르게 불러 줄 테니까 잘 들어. 일단 권호은. 넌 운동선수냐? 이 정도면 이능력자랑 체력 비슷할 것 같네. 1등급. 류윤재 3등급. 김세희 4등급.”
“체력 등급이 가이딩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등급 발표가 끝나자 김세희가 손을 번쩍 들더니 호수에게 질문했다.
“어제 1차 측정 결과는 너희들 몸 안에 있는 가이딩 양을 측정한 거다. 그리고 이번 체력 검정은 너희가 가이딩할 때 어느 수준으로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한 거다. 접촉만으로 가이드는 체력 소모를 하는데. 이때 체력이 약한 녀석일수록 가이딩하는 게 버거울 거다. 단지 손만 잡은 것뿐인데 마치 장거리 마라톤을 한 것처럼.”
“그럼 체력이 약한 가이드는 어떡하나요?”
“그래서 체력 검정을 통해 등급을 나누고 이 결과도 하나의 데이터가 되어 가이드 워치로 입력된다. 나중에 가이딩 업무를 하게 될 때 판정된 종합 수치로 가이드 몸이 한계라고 판단되면 가이딩을 강제 중단하기 위해서 말이야. 우리 가이드 공단은 가이드의 안전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한다.”
“에스퍼는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말이죠.”
계속 강조하는 가이드 안전에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불만의 소리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호수는 목소리의 당사자인 호은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호수가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껴졌을 때 그는 호은을 지나쳐 노트북이 놓인 탁자로 갔다.
“…….”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 소리가 들리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빔프로젝터에서 영상이 재생됐다.
영상은 흑백이었다. 오래된 영상인지 화질도 좋지 않았다. 검은색 줄 사이로 인영 하나가 보였고 그 주변에는 홍수라도 났는지 마을이 물에 잠겨 지붕만 보였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된다.
불이 나거나 벼락이 미친 듯이 내리치는 등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상을 보다 보니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런 상황에서도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건 자연재해 같은 게 아니다. 에스퍼다.
에스퍼의 능력으로 마을을 침수시키고 산을 태워 불바다를 만든 거다.
장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변했다. 한 사람이 군대를 몰살시키는 장면이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오른손을 올리자 검은 연기가 피어난다. 그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군부대의 진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목을 조여 왔다.
한 사람과 군부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영상에 담겨 있다. 혼자서 군부대를 제압하는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 얼마나 강한 걸까? 아니 저걸 강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건 그냥…….
“이능력자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더 많은 이능력이 있겠지만 교육용 영상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이능력은 이 정도. 이능력자는 쉽게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지. 그렇기에 한국 정부 및 세계는 이능력자를 엄격하게 관리 감독하는 거다. 만약 정부가 가이드와 일반인을 지켜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
“일반인은 파리 정도의 목숨으로 치부될 테고 가이드는 이능력자에게 혹사당하며 가이딩하고 있겠지. 가이드가 원하지 않더라도 신체적 접촉만 하면 직접 가이딩이 되니까. 가이드의 의사 따위 힘으로 제압하면 그만이다. 에스퍼는 사람 취급을 안 한다? 정답이야.”
“…….”
“권호은. 너 이능력자가 불쌍해? 그럼 그 이능력자가 억지로 가이드를 납치해 자신들이 살기 위해 이용하는 건 안 불쌍하고? 이능력자와 가이드 사이에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아. 이용하는 녀석과 이용당하는 녀석이 존재할 뿐.”
“…….”
“우린 가이드니까 가이드의 편을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가이드의 시대가 끝나고 이능력자의 시대가 온다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잘 생각해 봐. 그땐 과연 누가 사람 취급을 안 당할지.”
호은은 호수의 말을 들으며 화면을 쳐다봤다.
영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현실에서 저런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 거다. 군부대를 박살 내고, 산 하나를 다 태우고, 마을 전체를 물로 침수시키는 존재를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저 존재는 호수의 말처럼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그 능력은 사람의 영역을 벗어났다. 여태까지 매체에서 왜 에스퍼의 존재를 숨기고 그 능력을 다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됐다.
이런 걸 일반인이 알게 된다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될 감정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공포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에스퍼란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거다. 에스퍼를 도와주는 가이드라는 존재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호은이 알고 있는 에스퍼와 현실의 에스퍼는 달랐다. 호은이 알고 있는 에스퍼는 사람을 구하려고 이능력을 썼지만, 영상 속 에스퍼는 자기만을 위해 이능력을 사용했다. 빌런이 되어 버린 에스퍼를 막을 수 있는 가이드는 없었다.
“뭐야. 또 세뇌하네. 이론에서도 그러더니 자꾸 이상한 사상을 세뇌하는 것 같지 않아요?”
“아…… 그러게요.”
“에스퍼는 위험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분명 나중에 위험한 짓을 할 거다. 과거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다. 가이드인 우리가 제어하지 않으면 에스퍼는 언제든 빌런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그렇네요…….”
“매체에서는 에스퍼를 히어로라고 소개하는 주제에. 재수 없어.”
호은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김세희를 쳐다봤다. 김세희는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요즘 학생들은 생각보다 더 대담하구나.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호수가 듣고 한마디 했을 것 같다. 다행히 호수는 못 들었는지 1인용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았다.
“자 각자 테이블 서랍에 꽃이 들어 있으니까 꺼내 봐라.”
서랍이 있는 줄 몰랐던 세 사람은 더듬더듬 서랍 속으로 손을 넣었다. 손에 뭔가 걸려 꺼내자 호수의 말처럼 꽃이 들어 있었다. 꽃은 이미 시들어 향기조차 나지 않았다.
“이건 리커버리 이능력자가 만든 이능력품이다. 꽃에 이능력을 담은 거라 가이딩만 제대로 받는다면 영원히 피어 있을 수 있는 꽃이지. 오늘부터는 직접 가이딩 연습을 하게 될 거다. 직접 가이딩이 제대로 들어간다면 꽃이 피어나는 원리지.”
세 사람 각자 꽃이 달랐다. 벚꽃 나뭇가지인 김세희와 자두꽃인 류윤재. 그리고 호은의 앞에 놓인 꽃은 푸른 잎에 처음 보는 꽃이었다. 줄기에 네임표가 달린 걸 보니 ‘아마꽃’이라고 적혀 있다.
호수 또한 꽃을 어디서 꺼냈는지 보라색에 이파리가 네 개로 갈라진 시들어 있는 꽃을 들고 있다.
“꽃을 쥐고 있는 손에 집중해. 그리고 상상해. 시들어 있는 꽃이 다시 활짝 피는 모습을.”
호수가 말을 끝내자 손에 들린 죽어 있던 꽃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갈라져 축 처져 있던 잎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활짝 생기 있게 잎들을 펼쳐 보인다.
호수가 살아난 꽃을 손에서 놓자 꽃은 순식간에 시들어진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앞으로 이능력자의 능력이 들어가 있는 이 꽃으로 직접 가이딩 넣는 연습을 할 거다. 눈앞의 꽃을 살린 상태로 내일 가져오는 게 오늘의 과제다.”
호수는 떨어진 꽃을 다시 주워 가이딩을 불어넣었다. 시든 꽃은 다시 활짝 피었고 호수가 손을 떼도 조금 전처럼 시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꽃이 지지 않도록 내일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가이딩을 넣은 것 같다.
세 사람은 호수가 했던 것처럼 각자 눈앞에 있는 꽃을 만지며 집중했다.
‘꽃이 되살아나는 이미지를 상상…….’
눈을 감고 집중하자 도인호에게 가이딩했던 그때처럼 손끝이 찌릿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시들었던 꽃이 활짝 폈다.
“살렸다.”
가이드는 죽어 가는 에스퍼를 살릴 수 있다. 에스퍼는 일반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능력을 사용한다.
호은은 꽃을 이리저리 돌리며 감상했다. 이 꽃은 나를 지켜 줄까. 아니면 공격할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자 꽃은 금방 시들어갔다. 시든 꽃은 더 이상 향기도 나지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냥 죽어 있을 뿐.
“자. 나는 이제 필요 없지?”
직접 해 보면 가이딩 원리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거라며 과제 준비 잘하란 한마디 남긴 호수는 말없이 사라졌다.
바쁜 건지 귀찮아서 도망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일정한 패턴이다.
옆에서 김세희는 벚꽃 잎을 하나둘 뜯고 있다. 그러고는 손으로 가이딩을 불어넣는다. 뜯긴 곳에서 다시 새롭게 꽃봉오리가 핀다.
“이거 봐요. 가이딩만 있으면 몇 번이고 살아나요.”
김세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류윤재에게 자신의 꽃을 흔들었다. 류윤재는 자신의 시든 꽃을 소중하게 손으로 감싸고 눈을 감아 보지만, 집중이 제대로 안 되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호은은 비어 있는 호수의 자리를 확인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시하는 담당자도 없는데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게 아까웠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지금도 시들어 가는 꽃인 도인호를 찾아야 했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정도의 선의를 베풀고 싶은 건데,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런 간단한 이유로 다가가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만 같다. 알량한 선심은 치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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