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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3화 (13/129)

13화

남은 이틀 동안 이론 교육을 들으며 호은은 이곳에 와서 제대로 하지 못했던 운동에 집중했다.

처음 가 본 헬스장이 생각보다 잘 되어 있어 못했던 근력 운동을 실컷 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정신력도 나빠진 거다.

금요일 밤.

운동을 끝내고 주말에 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짐을 정리했다. 평일에는 외출이 금지지만 주말에는 미리 외출 신청서를 제출하면 나가는 것이 허락됐다.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번거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특수한 일을 하는 것이니 이 정도는 참기로 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곳에서 격리되어 있으니 호은이 생각해도 자신이 점점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들도 나랑 같았을까.”

맨 처음 도인호를 괴롭히던 인턴 선배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거다. 모두 첫 시작은 가이드가 에스퍼의 목숨을 쥐고 있단 사실을 알고 변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면 세상은 에스퍼나 가이드가 아닌 다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자신 또한 가이드 권호은이 아닌 평범한 일반인 권호은으로 돌아가 생각을 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고 호은은 대충 싼 짐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정문으로 갔다. 올 때는 폴의 순간 이동 능력 덕에 편했는데 집에 어떻게 갈지 살짝 막막했다.

인천 지사는 한적하고 주변에 숲이 많았다. 도무지 어디로 가야 버스나 택시를 탈 수 있는 건지. 경비원이 안내해 준 방향으로 정문을 나가 10분쯤 걷자 가로로 도로 한가운데 노란색 선이 길게 그어져 있다.

“차선도 아니고 가로로 있는 저 선은 뭐지?”

이상한 곳으로 내려왔나 싶었지만 뒤로 누군가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가는 길이 이곳이 맞는 것 같았다.

주변에 정류장이 없는 걸 확인하며 노란색 선이 그어진 도로까지 걸었다.

선을 넘는 순간 차의 클랙슨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앞머리를 날릴 정도로 부는 바람에 슬며시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인천 공항 입구 쪽 도로였다.

신호등 앞에 서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주변을 살폈지만 모두 평범한 사람으로 에스퍼가 이능력을 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호은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하늘에서 뿅 하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현장에 나타났다는 소리인데.

호은이 의문을 가진 순간 바로 옆에 있는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기둥 위에 신호등이 달려 있는 흔한 신호등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신호등을 한참을 보고 있자 기둥이 노란색으로 물들어갔다. 변화를 눈치챈 순간 호은의 옆에 방금까지 뒤에서 걷던 사람이 나타났다.

“이거구나.”

에스퍼의 결정체로 만든 이능력품. 신호등이 그중 하나라는 걸 인지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에스퍼나 가이드나 일반인 상관없이 쓸 수 있는 이능력품의 존재를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보행자 신호로 신호등 색이 초록 불로 바뀌었다. 호은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한 시간 반을 전철과 버스에 있자 드디어 익숙한 동네가 보인다. 집 앞까지 오자 호은은 굳었던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직 손목에는 가이드 워치와 목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지만, 가이드나 에스퍼가 없다고 생각하니 한결 편했다.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취업한 아들이 내려온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신나서 음식 준비했나 보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자 부모가 반겨주며 식탁으로 데려갔다. 이제는 먹을 눈칫밥도 없겠다 호은은 실컷 배를 채웠다. 식사가 끝나고, 하지도 않은 인턴 업무를 지어내 부모님에게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며 어필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이능력자 협회에서 배달 음식을 시키지 못했던 한이라도 풀려는 듯 자극적인 음식을 배달해 먹었다. 종일 먹기만 한 것 같은데 시간은 그런 호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흘렀다.

“또 내려올게요.”

일요일 아침 식사를 끝으로 호은은 부모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일정으로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 들러 딸기 생크림 홀 케이크를 샀다. 협회 내부에도 디저트 가게는 있지만 호은이 먹어 본 케이크 중 이 집만큼 맛있는 집은 찾지 못했다.

시선이 자꾸만 케이크로 향하는 걸 막으며 어제 자신을 워프시켜 줬던 인천 공항 횡단보도에 섰다. 회색 기둥이 점점 노랗게 변하는 걸 보며 호은은 눈을 감았다.

코끝으로 숲의 맑은 공기가 느껴진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눈을 뜨자 일주일 만에 지긋지긋해진 이능력자 협회 인천 지사로 가는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보도블록으로 이동한 호은은 케이크의 주인이 제발 집에 있기를 바라며 서둘러 숙소로 걸어갔다.

***

도인호 숙소 앞에 도착한 호은은 초인종을 눌렀다. 일요일에는 당연히 집에서 쉴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호은의 예상처럼 현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흰색 면티에 검은색 면바지를 입은 도인호의 모습은 몸이 좋아서 그런지 편한 복장에도 태가 좋았다. 여전히 신기한 노란색 눈동자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슨 일로…….”

“늦었지만 이사 와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려고요…!”

“?”

도인호는 이사 온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냐는 눈으로 호은을 쳐다봤다. 도인호가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걸 순간 까먹었다. 다행히 도인호에게 찾아온 이유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말실수에 대해 사과하려고 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호은은 한 박자 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김세희와 대화를 나눈 이후 호은은 자신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선을 넘은 것 같아서요. 언행부터 행동까지 전부 죄송합니다. 너무 가볍게 말했죠. 저는 그냥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랬어요. 멀쩡한 사람을 시한부 인생으로 만든다는 게.”

호은은 숨도 안 쉬고 말을 내뱉었다. 목요일 밤. 침대에서 얼마나 많은 발차기를 날렸는지 모른다. 도인호의 목숨을 자기 손바닥 위로 올리려고 했던 행동이 부끄러웠다.

덩달아 도인호에게 미안해졌다. 그는 그런 취급이 익숙하다 할지 몰라도 호은은 자신으로 인해 사람이 상처받는 모습을 못 견디는 스타일이었다.

그때의 도인호는 딱히 상처받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의 의미로 이거 받으세요.”

호은은 케이크를 안 받으려는 도인호의 손에 케이크 상자를 쥐여 주고 빠르게 뒤를 돌았다. 숙소가 바로 앞이라 민망하게 집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같이 먹으실래요. 혼자서는 양이 많습니다.”

“……!!”

호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인호를 쳐다봤다. 저 사회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던 남자가 저런 말을 한 게 의아했다. 여기선 거절하는 게 맞겠지만 호은은 입맛을 다시며 도인호의 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일반 사람이 케이크 한판을 먹는 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케이크는 오래 두면 맛이 없기도 하고……. 1인 1 구매라 저 케이크를 먹으려면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 음식물 쓰레기 나오지 않게 도와주자.’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끝낸 호은은 주방 의자에 앉았다.

식탁 위로 케이크와 세팅된 앞 접시를 올려 둔 다음에 커피를 내린 도인호는 호은의 앞에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았다. 능숙한 접대 모습에 그가 사회성은 없으면서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해졌다.

“잘 먹겠습니다.”

호은은 조각 케이크를 포크로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생크림과 새콤달콤한 딸기. 푹신한 빵의 촉감이 어우러져 입 안을 행복하게 해 준다.

호은이 가볍게 한 접시를 비워 가고 있을 때 도인호는 포크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시 케이크 싫어하세요? 여기는 진짜 맛있어요. 도인호 씨도 먹어 보면 저한테 가게 어디냐고 물어보게 되실걸요?”

“아…… 네.”

부담스러운 호은의 눈빛에 케이크 먹을 생각이 없던 도인호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앞으로 3주면 그만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호은을 보는 것도.

도인호는 포크로 케이크를 펐다. 실제 음식을 먹는 게 몇 년 만인지. 가이딩 퍼센트가 50% 이하로 떨어진 순간부터 음식 먹는 걸 멈췄던 것 같다.

제대로 가이딩을 받지 않으니 모든 신경이 예민해져 음식을 먹으면 마치 쓰레기를 씹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것도 그렇겠지. 도인호는 자신의 가이딩 퍼센트를 확인했다. 20%.

“맛있죠?”

도인호는 예의상 맛있다고 할 생각이었다. 사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도 쓰레기 맛밖에 더 안 날 게 분명했지만, 저 같은 게 감히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장단 맞춰 주고 그를 보낼 생각이었던 도인호가 케이크를 꿀꺽 삼켰다.

“어때요?!”

쓰레기 맛이 아니라 달콤하다. 달콤하다는 단어를 이럴 때 사용하는 게 맞는 거겠지?

도인호가 다시 한번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맛이 있다. 왜지? 의문에 빠진 도인호는 주변에 가득 찬 호은의 방사 가이딩을 눈치챘다. 무의식으로 하는 가이딩.

아. 케이크가 아니라 이 가이딩이 너무나도 달콤하다. 기대감에 가득 찬 호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인호는 포크를 내려놨다.

“달콤하네요.”

벌써 세 번째 케이크 조각을 푸던 호은이 도인호의 말에 서둘러 입 안에 케이크를 우물우물 씹었다.

“여기가 딸기 케이크 말고도…….”

호은의 실없는 말을 들으며 도인호는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평소라면 다른 사람을 집으로 들여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도 왜 변덕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케이크 때문인가. 케이크를 받아 본 건 처음이다. 아마 호은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케이크를 열어 보지도 않았을 거다. 변덕 덕분에 갖게 된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정말 이상하다.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는다.

“호은 씨는…… 특, 특이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요? 아 많이 먹는 거 때문에? 대식가거든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도인호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 웃었다. 도인호 씨 그렇게 웃고 다녀요. 얼굴도 잘생겼는데 웃으니까 남자여도 반하겠는데요.”

“…….”

마음이 울렁거린다.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도인호는 고개를 숙였다. 귀가 빨개진 도인호를 보며 호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일요일이 마무리되어 간다.

***

인턴 2주 차 실습 교육이 시작되었다.

인턴 세 사람은 실습 교육으로 바뀐 교육장을 이동하기 위해 기존에 교육받은 장소에 모여 함께 이동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훈련장은 헬스장이 있는 건물에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체육관처럼 보이는 건물은 검은색 사원증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 무리에 슬쩍 낀 인턴 가이드는 마치 병아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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