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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2화 (12/129)

12화

피 묻은 손을 닦고 출근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호은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도인호 심장에 올려 뒀던 오른손을 뻗었다. 평소 보았던 손과 다른 점은 없었다.

저릿하고 뭔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역시나 달라진 건 없다. 그저 몸이 조금 피로하고 허가가 졌다. 어쩐지 도인호만 마주치고 나면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다.

“피곤하네.”

한 시간 정도 알람을 맞추고 숙면을 한 호은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밤새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짧은 시간 동안 푹 잤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시계를 확인했다.

“8시면 밥 먹고 가면 딱 시간 맞겠네.”

구두에 발을 구겨 넣으며 문을 열자 엘리베이터 앞에 도인호가 서 있었다. 그렇게 찾아다닐 땐 보이지 않더니 최대한 늦게 마주치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얼굴을 보게 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자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벌써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복도에 흘린 피는 치운 건지 깨끗했다. 어색한 상황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짧게 고민했던 호은이지만 그 모습이 더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 참았다.

“우와. 이런 우연이! 옆집이네요.”

“…….”

용기 내 호은이 먼저 말을 걸었지만, 도인호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는 거로 대화를 중단해 버렸다. 행동을 봐서는 새벽에 있던 일을 모르는 눈치였다.

호은은 작게 안도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았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애써 무시했다.

“출근하시는 거예요?”

“…….”

대답 없는 도인호의 모습에 호은은 볼을 긁적였다. 사람 민망하게 만드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있던 호은은 바닥을 보고 있는 도인호를 살폈다.

이곳에서 만났던 에스퍼나 가이드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중에서 도인호가 가장 심한 것 같다.

호수의 말을 들어보면 10년을 에스퍼로 지내 왔다고 했나. ‘넌 죽어야 해. 얼른 폭주해서 도구가 되어라!’라는 말을 들으며 컸을 도인호를 생각하니 사회성이 결여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10년밖에 못 살고 죽는다면…….’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놀러 다니고 어차피 죽을 거 적게 일하고 돈은 펑펑 쓰고 도인호처럼 땅굴 파는 것보단 최대한 후회 없이 지내다 가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가이드들이 허락해 줘야 가능한 인생인가?

도인호가 여행을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상상 가지 않는다. 새벽에 봤던 집 풍경으로 텔레비전조차 없던 거실이 떠올랐다. 집을 구경 할 정신이 없었지만 확실한 건 집 안이 전체적으로 텅 비어 보였다는 거다.

10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도인호는 어떻게 살았을까. 분명 처음 봤던 도인호는 군사 제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일만 하고 살았던 건 아니겠지.

호은이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췄다.

“도인호 씨.”

집게손가락으로 호은이 도인호의 셔츠를 잡았다. 우뚝 멈춘 도인호가 호은을 내려다보자 손가락이 손등을 '쿡' 하고 찔렀다.

“?”

눈썹을 까딱거린 도인호에 호은은 무방비한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닿은 건 몇 초에 불과했다.

“이것봐요, 만져도 멀쩡해요.”

“제가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쓴 거 아니고 만지는 건요?”

“그, 그것도 하지 마십쇼.”

손을 내친 도인호는 말을 더듬었다. 지난번 작은 목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도인호는 생긴 것과 다르게 말을 소심하게 했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 때문일까. 그것이 흠이 아니라 하나의 매력으로 보여 호은은 콧등을 긁었다.

“저 도인호 씨 만져도 멀쩡해요. 그냥 그렇다고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뒤로하고 호은은 식당이 있는 건물로 걷다가 멈췄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도인호는 숲이 우거진 쪽으로 향했다.

저쪽은 호은이 한 번도 안 가 본 체육 시설이 있다. 겉으로 봤을 때 3층 정도의 높이지만 지하까지 있어서 건물 자체는 보이는 것보다 넓으며 개인 훈련 및 단체 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이라고 들었다. 다친 몸을 기껏 치료하고 가는 게 훈련장이라니.

“불쌍하네.”

사람을 쉽게 동정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새벽의 일을 떠올리면 그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호은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사원증을 목에 메고 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가게 직원들은 사원증 대신 모두 은색 명찰을 달았다. 명찰은 일반인이라는 뜻이다.

호은이 봤던 사람 중 오직 도인호만 자신을 나타내는 증표가 없다. 자신이 무엇인지 부정당하고 있다. 사람 취급도 못 받고 그가 죽는 걸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하루 삶을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 버팀의 끝은 뭘까? 죽음?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지만 사실은 모든 게 일그러져 있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일해야 한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사원증이 더는 사원증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건 목줄이다.

호은은 자신의 안에서 뭔가 격하게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이건 정의감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도덕성? 무엇인지 단어로 정의 내리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7월 30일 이후에 도인호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를 죽인 이유에 호은도 포함될 거다. 호수가 말한 것처럼 방관한 공범이 되어 살인자가 되는 거다.

‘매 순간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잠을 자다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도, 동료조차 되지 못한 도인호를 떠올릴 거다.

호은은 멀어지는 도인호를 쫓아갔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씩 크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요동친다. 머리에는 생각이 가득 차서 용량 초과였다. 이걸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도인호를 따라잡은 호은은 그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돌렸다.

“도인호 씨.”

“…….”

“당신을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 수 있도록.”

“…….”

“내가……. 내가 살려 줄게요. 가이딩 받으면 폭주 안 해도 되잖아요.”

“…….”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왜 당신은 죽음에 동의한 적도 없으면서 죽어야만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거야? 본인의 운명을 마음대로 정하는 사람들에게 왜 싫다고 거절하지 않는 거야? 에스퍼가 뭐길래. 그리고 가이드가 뭐길래.

일반인으로 잘살고 있던 사람을 강제로 에스퍼로 만들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만드는 건가? 잘못된 운명을 막을 수 있다면 호은은 기꺼이 막고 싶었다.

“에스퍼를 구할 수 있는 게 가이드라면 제가 도와줄게요.”

가이드란 에스퍼를 구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그렇다면 호은은 망설임 없이 구할 거다. 호수처럼 구할 능력이 있음에도 에스퍼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를 살릴 수 있는 가이드가 되는 거다.

“전.”

처음으로 도인호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저걸 미소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빨리 죽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가치가 없습니다. 죽어서 결정체를 남겨야만 가치가 있대요.”

“무슨……?”

“저 같은 건 살아 봤자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피해만 주겠죠.”

“…….”

“그러니 부디 당, 당신을 위해서라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저는 죽고 싶습니다.”

도인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호은을 스쳐 지나갔다.

에스퍼는 이능력을 가진 대신에 그 능력을 일반인을 위해 사용한다. 능력을 사용해 생명을 갉아먹는 에스퍼를 가이드가 치유한다.

이론 시간에 배운 내용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친다. 이런걸 공생 관계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 관계에서 가장 갑은 가이드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구할 수 있다. 그럴 힘을 가지고 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신이다. 그러니 당연히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 준다고 하면 신에게 고맙다며 눈물 흘리고 신앙심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자만하며 생각했는데.

멀어져가는 도인호를 멍하니 바라보며 호은은 그대로 굳었다. 어째서? 거절 받는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까였네…….”

자신이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고맙다며 눈물 흘리는 도인호였다. “저 사실은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도인호를 따듯하게 안아 주며 그럼 우선 실습 상대부터 되어 달라 말하는 거다. “당연하죠!” 단번에 오케이하는 도인호와 하하 호호 청춘 드라마를 찍는 거였는데.

현실은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예의상 하는 거절이 아니라는 건 죽고 싶다고 말한 도인호의 얼굴이 알려 준다.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에 미련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확신이 보였다.

***

호은은 가이드 이론 교육을 들으러 가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종이에 왜 도인호가 자신을 거절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낙서하기 바빴다.

“여기 고양이 있어요?”

“네?”

“고양이 이야기 아니에요?”

호은이 잔뜩 낙서한 종이를 가리키며 김세희가 물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돌봐 주려고 먹이 들고 다가가는데 잔뜩 경계해서 안 먹는 상황인 거죠? 야생 고양이 중에 인간을 혐오하는 애들도 많아서 최대한 천천히 다가가야지, 안 그러면 나타나던 장소에도 안 나타날 수 있어요.”

경계, 거절, 무시 등등 단어 위주로 끄적인 덕에 도인호를 고양이로 오해했나 보다. 호은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 아니고 사람이요.”

“사람? 그러면 이렇게 다가가면 안 되죠! 난 누가 나를 동정해서 다가오는 거 싫던데. 같은 인간인데 본인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나를 도와주려 하고 내 인생에 간섭하려고 하는지.”

역시 K고등학생이구나. 필터링 없이 생각 그대로 내뱉은 김세희의 말에 호은은 뼈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인간인데 본인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도와주려 하냐.’ 마지막 말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에 내리꽂는다.

분명 도인호와 나는 같은 인간이다. 가이드니 에스퍼로 따질 게 아니라 동일한 인간.

호은은 도인호를 에스퍼로서 살리려고 한 건지 인간으로서 살리려고 한 건지 다시 생각했다. 인간 취급을 못 받는 걸 없애 주고 싶어서 폭주를 막아 주려고 하던 건데, 그 전제에는 가이드인 권호은이 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호수가 한 행동과 다를 거 하나 없다. 가이딩으로 폭주 날짜를 맞추는 놈이나 가이딩으로 살려 준다며 헛소리를 내뱉는 놈이나.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에 대한 이상한 것들이 주입된 모양이다.

‘정신 차려 권호은. 신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잠깐 미쳤던 것 같다. 살려 주는 건 내가 아니다. 그건 도인호 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도인호에게 살려 달라 구걸의 말을 내뱉게 하는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우선이다.

그저 폭주라는 운명을 막을 뿐이다. 그 이후의 삶은 도인호가 선택하는 거다. 결정체 이식자의 삶이 아닌 도인호로서의 삶을 계속할지. 그리고 곁에서 알려 주는 거다.

죽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 세상이 재미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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