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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8화 (8/129)

8화

중학생이었던 호은은 당시 전국 소년 체육 대회 준비로 몇 달간 제대로 학교에 나오지도 못했다.

교실에 오더라도 잠만 자기 바쁘던 호은이 대회 도중 손목 부상으로 학교생활에만 전념하게 된 시기가 있다.

그동안은 뒷자리에서 잠만 자는 무서운 애라는 이미지였으나 친화력이 좋은 호은은 자연스럽게 반 애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성격과 호감 가는 외모 덕분인지 조용한 학생들부터 반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들까지 다 호은을 좋아했다.

유일하게 호은을 불편해하는 일부가 있다면 서열 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하게 만든 위화감에 불만을 가진 일진 무리였으려나.

물론 그들도 겉으로는 호은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교실의 서열은 암묵적으로 호은이 1위였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고 나자 1학년 전체적으로 무리가 정리됐다.

여전히 먹이 사슬 상위층은 포식자가 되어 먹이가 될 녀석들을 사냥하고 다닌다. 이 학교에 사람이 사는 건지 동물이 사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사냥이라고 하는데 호은이 보기에는 여러 명이 약자를 괴롭히는 거로밖에 안 보였다.

작고 왜소하며 본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아이는 약자로 치부되어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선생도 학생도 그 사냥을 막지 못했다.

여기는 동물의 왕국. 자연의 섭리라 생각하고 모두 자신이 대상자만 되지 않길 바라며 침묵하고 있었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약자는 강자에게 당하는 게 당연하다.

선의와 악의가 아닌 다른 관점의 세상이었다.

호은은 선한 사람으로 살기로 어릴 때 정했다. 하지만 여기는 사람도 아닌 짐승으로 살지 먹이로 살지를 정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이론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급식실에서 사건이 터졌다.

여름이었다.

반에서 가장 작고 왜소한 여름에게 식판이 던져졌다. 흰색 와이셔츠는 반찬과 국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급식실은 조용해지더니 순식간에 웅성웅성 작은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모두의 관심은 여름에게 향했다.

반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 괜찮은가? 했더니 그건 호은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여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당하고 있었다. 그 괴롭히는 순간순간이 쌓이다 보니 괴롭히는 자들의 공격성이 올라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식판을 던져대는 행위를 하고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선생님까지 나서지 않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학생들이 떠드는 목소리에 한 단어가 호은의 귓가를 스쳤다.

“이사장의 아들.”

반에서 여름을 괴롭히던 무리들 사이에 2학년 선배가 섞여 있다.

학교를 잘 나오지 않는 호은도 알고 있는 이사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선생님들이 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이유는 저 아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짐승 같네.”

국물까지 다 먹어 깨끗해진 식판을 든 호은이 망설임 없이 무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무리 중 같은 반 남학생이 잘난 척을 하며 그에게 말을 건다.

“권호은, 너 잘 생각해. 한여름 도와주면 다음은 네가 저 음식 쓰레기 뒤집고 있을 거다. 설마, 너 이 선배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이사장 아들과 한편이라는 사실이 의기양양할 이유라도 되는지 평소 호은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했던 남학생이 나서서 호은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쳤다.

물론 그런 작은 힘으로는 호은이 밀리 리 없었다.

“너 그거 알아? 수요일은 수다날인 거.”

에어컨을 틀어 놓은 급식실은 선풍기까지 돌아가고 있음에도 더웠다. 급식실 밖은 30도가 넘는 더위였지만 남학생은 서늘함을 느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하찮은 걸 쳐다보듯 남학생을 내려봤다. 그 시선을 받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수다날은. 네놈들처럼 수다 떠는 날이 아니라.”

매주 수요일은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 잔반이 거의 안 나오는 요일을 본다면 그건 수요일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름은 식판에 담긴 음식물로 뒤덮여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수요일은 다 먹는 날이라고 해서 수다날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건 악질. 음식으로 장난치는 건 더한 악질이다.

퍽!

호은은 식판을 들어 이사장 아들에게 던졌다. 급식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리 중 가장 덩치가 큰 학생이 호은의 멱살을 잡고 패 주려고 했던 것 같았으나 오히려 호은이 주먹으로 상대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학생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나서야 누군가 체육 선생님을 불러왔으나 이미 무리 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호은만 두 발로 서 있었다.

호은은 여름의 머리 위에 붙은 오렌지를 떼 주며 말했다.

“여름아. 동물의 왕국은 재미없지?”

“어?”

“역시 히어로가 나오는 장르가 재미있다니까. 봐 봐, 나 지금 폼 나지? 정의의 사도!”

체육 선생님에게 목덜미가 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가는 와중에 호은이 웃으며 말했다. 여름은 멀어져 가는 호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건은 일단락되고 각자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왔다. 이사장 아들과 그 무리가 여름을 괴롭혔다는 증거와 증언이 넘쳐 주먹을 휘두른 호은은 다행히 교내 봉사 징계로만 끝이 났다.

물론 영화처럼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운동을 가르쳤더니 사람을 팼다고 호은의 부모님은 더 이상 운동학원에 다니지 못 하게 했고, 이 사건의 문제인 이사장 아들과 그 무리의 징계는 고작 정학이 다였다.

오히려 가장 큰 피해자였던 여름이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거로 해당 사건은 마무리됐다.

앞으로 운동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호은은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두 개의 정론 중 호은은 선의와 악의의 정론을 선택했을 뿐이다. 전학을 가는 마지막 날 여름은 호은에게 몬스터 빵을 건네며 고맙다고 말했다.

***

“…….”

불편한 기색의 도인호와 눈이 마주치자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팔 교복 셔츠가 아닌 와이셔츠를 입은 현재의 호은이 거절의 말을 내뱉은 도인호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 뭐가 죄송해요.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안 되세요?”

“시간이 되어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거절해서 죄송하지만, 못 합니다.”

호은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못 한다고? 거절당한 건가?’

선의를 건네고 나서의 거절은 처음 당해 보는 호은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도와줬으면 너도 나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고 싶었지만 모든 선의가 선의로 돌아오는 건 아니다.

만약 저기서 도인호가 도와 달라고 한 적 없다고 말하면 호은은 할 말이 없었다.

멍해진 정신을 다잡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도인호의 앞을 막아섰다. 인턴 무리와 똑같은 행동이라 뜨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기. 도인호 씨? 이번 기회에 직장 동료도 하고 동료끼리 서로 도와주는 게 뭐 어렵다고 싫다고 하는 건가요. 게다가 저 그쪽한테 줘야 할 것도 있는데.”

“……싫은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동료도, 실습 상대도.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전 돌려받을 거 없습니다.”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표정과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도인호는 얼어 버린 호은을 지나쳐 점점 멀어져 갔다.

“아니. 동료 하는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뭐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 왜? 에스퍼랑 가이드는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건가.

여러 가설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그 무엇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매정한 도인호는 그렇게 호은을 얼려 버리고 갔다.

얼린 당사자가 얼음땡을 외쳐 주지 않으니 호은은 그 상태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꼬르륵- 한참을 서 있던 호은은 배꼽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머리를 많이 써서 허기가 졌다.

무료로 사내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곳에서 도인호도 씹고 밥도 먹어야겠다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뗐다.

***

호은은 아침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제 한 것도 없는데 간만에 수업을 들어서 피곤했던 건지 낯선 숙소를 생각보다 빨리 적응해 잠도 금방 들었다.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 시계를 보니 6시에 기상했다. 조금 더 이불에 있을까 싶었지만 말똥한 눈에 하는 수 없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봤던 공원이 러닝 뛰기 좋아 보였기에 한 번 뛸 생각이었다.

내근직이면 몰라도 외근직은 체력이 필요하다. 어느 부서에서 일하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려는 거였다.

공원은 낮에 보았을 때보다 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헬스장이 있어서 그런지 아침 조깅하는 사람은 호은 말고는 없었다.

“하아… 하아….”

공원을 세 바퀴쯤 돌다 숨을 고를 겸 벤치에 앉은 호은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

느닷없이 날아오는 이온 음료 캔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탁.

“반사 신경 좋네?”

손을 뻗어 캔을 잡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판기에 기대고 있는 미형의 남자가 보였다.

외모와 어울리는 고운 미성의 목소리, 트러블 하나 없는 흰 피부. 쇄골까지 닿는 길이의 금발 머리카락. 오묘한 분홍색 눈동자가 마치 적색 달처럼 보이며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감을 때마다 나풀거린다.

여태까지 봤던 연예인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잘생겼다. 외모만 보고 에스퍼인가 의심했지만 남자는 파란색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여기서는 발가벗고 다니더라도 사원증은 꼭 차고 있어야 해.”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요. 그리고 어제 사원증 안 찬 사람도 봤고요.”

트레이닝복에 무슨 사원증이냐 말하고 싶었지만 남자 또한 일하는 복장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색 라운드 티에 베이지색 반바지로 곧게 뻗은 다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흰색 단화를 구겨 신은 남자는 평범한 차림새였으나 목에 착실히 사원증을 차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남자의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옷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

호은은 차가운 이온 음료 캔을 이마에 갖다 댔다.

시원하다. 눈을 감고 냉기를 느끼고 있을 때 남자가 자판기에 기대던 몸을 떼더니 호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 인턴이지?”

“네?”

“나를 보고도 태도를 이런 식으로 구는 게 이해가 안 되어서 말이야.”

확실히 저 얼굴을 한번 보면 쉽게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외모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회사에서 뭐가 되는 존재라 초면에 반말하는 건지.

남자는 호은의 예의 없음을 꼬집었다.

“우리에게 사원증은 곧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야. 가이드 공단과 이능력자 협회, 그 어디를 가도 사원증이 필요하지. 줄 색에 따라서 가이드와 에스퍼를 나누고. 노란색은 인턴 가이드, 파란색은 정식 가이드, 검은색은 에스퍼.”

남자는 호은이 들고 있는 음료 캔을 자연스럽게 집더니 자기 목을 축였다.

호은은 비어 버린 자기 손을 허망하게 봤다.

‘먹을 걸 줬다 뺏는다니.’

이 사람 나쁜 사람일 확률 99.9%다.

“그리고 에스퍼 중에 사원증을 안 찬 녀석은 무시하면 돼. 그건 사람이 아니니까.”

남자는 다 마신 캔을 찌그러트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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