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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7화 (7/129)

7화

남자의 눈동자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밝고 화려한 색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비 오는 날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의 시선은 호은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호은과 눈이 마주친 건 자기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은 지쳐 보였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지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야. 지난번처럼 우리 무시하고 가 봐. 상해죄로 또 처벌해 줄 테니까. 에스퍼가 가이드 상해를 연속으로 입히면 어떤 처분이 나오는지 궁금하네? 너 이제 가이딩 약도 못 먹는 거 아니냐?”

듣기 거북한 말만 골라 내뱉는 인턴 선배를 본 호은은 주먹을 쥐었다. 귀가 썩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던 호은이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걸음을 뗐다.

“안녕하세요.”

“뭐야, 너.”

호은은 가장 많이 떠들어 대던 인턴 선배를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살면서 이런 녀석들을 많이 봤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여러 명이 뭉쳐 사람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푸는 쓰레기.

학창 시절의 버릇을 성인이 되어 고치려고 해 봤자 사람이 하루 만에 변하기 어렵다.

쓰레기는 역시 성인이 되어도 쓰레기다.

“제가 앞에 사정은 모르지만 여러 명이 한 명 괴롭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뭘 괴롭힌다는 거야. 이놈은 염치도 없이 우리 방사 가이딩을 처먹고 있다고! 이런 괴물은 당해도 싸!”

“그럼 방사 가이딩을 하지 마세요”

“뭐? 그,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아, 안 되는구나. 제가 아직 잘 몰라서요.”

호은의 압도적인 피지컬에 겁먹고 있던 인턴 무리는 호은의 목에 걸린 노란색 사원증을 확인하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태세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너 후배 주제에 대드냐?!”

살면서 선망했던 직업에는 경찰관, 소방대원, 의사, 사회복지사 등 여러 개가 있었다. 그 직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히어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을 도와주는 역할이라는 거다.

어린 시절 악당을 물리치고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에 동경하지 않은 어린아이는 없다. 호은은 그것이 유난히 심했다.

귀여운 초등학교 시절.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히어로가 그려진 이불에서 히어로 인형을 끌어안고 잘 정도였으니 호은은 얼마나 히어로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 같은 반 친구가 히어로는 에스퍼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 히어로가 되고 싶다던 호은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야. 너 뭔데 아직도 안 비키냐?”

막대기를 들고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는 인턴 선배를 보며 호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극혐이네요.”

히어로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호은은 오지랖과 정의감에 똘똘 뭉친 성인으로 자라게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악당 역할을 자처하는 앞에 사람들을 선배 취급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뜻이다.

“저는 인턴 권호은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턴 선배한테 물어보라고 하던데.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쓰레기 보는 듯한 눈으로 선배라고 말해 봤자 상대방도 그 안에 숨은 비꼼을 모를 리 없었다.

“이게 돌았나. 갑자기 이 상황에서 뭔 질문질이야?!”

“에스퍼 상해죄 말고 가이드 상해죄 기준은 뭐죠? 스쳐만 지나도 상해죄인가요? 아니면 물리적인 힘을 줘야 성립인가요?”

호은은 가볍게 인턴 선배의 멱살을 잡더니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멱살만 잡으려고 한 건데 남자 몸에 근육이 없는 건지 쉽게 들어 올려져 놀란 나머지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아 죄송해요. 너무 가벼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래도 선. 배. 님이시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거죠?”

호은은 싱긋 웃었다.

분명 처음 면접 보러 왔을 때 가이드가 하는 일에 관하여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안내했던 남자는 에스퍼 케어라고 했으니 지금 행위가 근무 위반은 아닐 거다.

문제를 묻는다면 불쌍하게 따돌림당하고 있는 에스퍼를 보살펴 줬을 뿐이라고 변명하면 된다.

인턴 선배들은 당황해 붉게 물든 얼굴로 권, 권호은이라 했지! 넌 다음에 뒈질 줄 알라는 유치한 말을 내뱉고는 호은이 바닥에 패대기친 동료를 챙겼다.

바닥에 떨어진 선배는 팔을 이상하게 짚었는지 손목이 부러진 것 같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다.

아마 그 모습이 창피해서 선배들이 남자를 챙겨 도망친 것 같다.

호은은 인턴들이 도망치고 나서야 뒤를 돌아 가만히 서 있는 남자에게 인사했다.

“괜찮으세요?”

“……다음에는 그냥 무시하세요.”

반말을 내뱉던 지난번과 다르게 호은의 신분을 확인한 남자는 존댓말로 대답했다. 물론 존댓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싹수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기껏 도와줬는데. 그냥 고맙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하?”

“이런 일 익숙하니까.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아니. 상처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호은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뒷걸음질 친 남자는 호은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행동에 호은의 입술이 말라갔다. 자꾸 거절하니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이번에는 남자에게 거절당하지 않게 빠른 속도로 호은이 남자의 손을 잡았다.

“……!”

“이럴 때는 고맙다고 악수하면 되는 겁니다.”

“이거 놔!”

힘으로 손을 빼려고 하는 남자에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른 한 손도 들어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저 병균 없거든요? 남자끼리 손 잡는 게 뭐라고!”

“당신이 다칩니다!”

“뭐가 다쳐요!!!”

에스퍼인 남자는 여기서 더 힘을 주면 호은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힘 조절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호은의 손목은 탈골될 수도 있기에 짜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바로 대답해 오는 호은의 찢어질 듯 커다란 목청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같은 것에게 가, 가이딩하면 다칩니다.”

“안 다치잖아요. 뭐가 다친대, 자꾸?”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호은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으나 여전히 호은은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는 호은의 손을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었다. 잡은 손을 통해 가이딩이 들어왔다. 달콤한 가이딩이 빠른 속도로 몸에 침투해 온다. 시끄러웠던 소음이, 남들은 향기롭다고 말해도 그저 쓰레기처럼 느껴지던 꽃내음이, 터질 것 같은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세상에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쪽 에스퍼죠?”

남자는 호은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권호은인데 그쪽은 이름이?”

“……도인호.”

가이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도인호는 한풀 꺾인 모양새로 착실히 대답을 이어 갔다.

“도인호 씨. 제가 그쪽이 잃어 버린 무언가를 드릴 예정인데. 그전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

“다음 주에 가이딩 실습 상대로 에스퍼를 데려오라는데 같이 갑시다.”

맞잡은 손은 여태까지 가이딩을 전달하고 있었다. 손을 잡은 뒤로 얌전해진 도인호를 천천히 감상하자 음울한 분위기와 반대로 두툼한 붉은색 입술과 높게 쭉 뻗은 콧대, 무쌍에 매섭게 살짝 올라간 눈이 매력적 있었다.

‘에스퍼는 다 잘생겼다는 말이 사실이네.’

연예인 뺨치는 잘생긴 외모로 어두운 오로라를 잔뜩 달고 있는 도인호가 신기했다.

‘덩치도 크면서 저 어깨는 왜 저리 굽히고 있는 건지.’

예쁜 눈동자를 왜 고개 숙여 가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제가 오늘 도인호 씨 도와줬으니까 도인호 씨도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이래 보여도 내성적이라 새로운 사람에게 말 걸 때 큰 용기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호은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도인호를 바라봤다.

“권호은 씨, 이제 손 놓으세요.”

어깨를 움찔 떤 걸 분명 확인했는데 도인호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호은은 어쩔 수 없이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며 과제 상대를 쉽게 구했다 자축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전 할 수 없습니다.”

“네?”

거절의 말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해 충격적이었다.

여름의 땡볕 아래 서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어린 호은은 엄마가 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는 선의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발육이 좋았던 호은은 또래보다 건강한 신체를 가졌다.

타고난 신체와 몸을 쓰는 일에 있어 센스 능력이 남달랐던 호은은 한번 본 수학 공식은 외우지 못하더라도 한 번 배운 동작들은 금방 몸에 익혔다.

한동안 부모님은 호은이 태릉선수촌이라도 갈 줄 알고 태권도, 수영, 유도등 안 시켜 본 운동이 없었다.

무엇을 배우든 영재 소리를 들었고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차지해 돌아와 부모님은 자식을 어떤 선수로 키울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어떤 운동에 종착할지 여러 운동을 배웠던 초등학생 시절이 지나고 호은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호은이 본 건 작은 동물의 왕국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남자애들 사이의 서열이 불분명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몇 년 동안 같이 봐 왔던 학교 친구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중학교는 여러 동네 애들이 모인다. 각자 동네에서 생태계 가장 꼭대기에 있던 녀석들은 대장 노릇을 하기 위해 힘을 과시하기 바빴다.

그들의 힘 과시용의 대상은 주로 하위층에 향해있었다. 과시할 거면 강한 상대를 노려야지, 호은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행위였다.

어렸을 때부터 힘이 좋았던 호은은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던 말이 있다.

“선의는 선의로 돌아오고 악의는 악의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악의를 가진 힘은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다치게 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교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가 남들보다 유난히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왜소한 남학생을 툭툭 치며 괴롭혔다.

“야. 내가 언제 몬스터 빵 사 오라 했냐? 소시지 빵이라 했지.”

오늘따라 잠이 안 와 가만히 앉아 있던 호은은 괴롭히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시끄러운데 조용히 해 주면 안 될까?”

친절한 목소리로 호은은 무리에게 말했다. 착한 언어로 말하는 건 선의다. 선의는 선의로 돌아온다는 공식답게 무리는 호은을 보자마자 자기들끼리 속닥이더니 교실 밖으로 나갔다.

중학교 1학년인데 키가 175cm였던 호은은 반에서 가장 큰 키와 덩치를 가진 남자아이였다.

평소에는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잠을 자고 있어 그 덩치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오늘처럼 또래 남학생들 사이에 서 있으면 그가 얼마나 중학생 같지 않은지 잘 보였다.

자신의 몸짓이 위협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호은은 빵 심부름을 당하는 아이의 자리로 향했다.

“괜찮아?”

“응. 고마워…….”

작은 목소리로 들려온 감사 인사. 명찰을 보자 한여름이란 이름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여름아, 몬스터 빵 나 먹어도 돼?”

“으응!”

역시 선의는 선의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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