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권호은 씨 보다 하루 먼저 들어온 동기들을 만나 볼 겁니다. 이번 기수는 권호은 씨까지 총 세 명이고 한기수 위에는 일곱 명이 있는데 곧 정직원이 되는 선배들이니 모르는 게 있으면 그분들을 통해 접하면 될 겁니다.”
폴은 일주일 정도는 가이드와 에스퍼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 교육받는다고 했다. 첫날부터 일하는 건 아니라 다행히라고 생각했다.
단지 내부에서 가장 큰 건물로 보이는 곳으로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겼다.
어제 갔던 가이드 공단은 조용했는데 이곳은 다른 분위기였다. 정적이지 않고 실제로 일하는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직원들은 오피스 룩에 사원증을 차고 있었는데 줄이 파란색인 사람과 검은색인 사람이 있었다.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안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폴은 이번에는 같이 타지 않으려는지 한 발 떨어져 호은을 바라봤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5층은 신입 가이드분들의 교육 시설이니 앞으로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인걸요. 그럼 권호은 씨 다음에 또 봐요.”
폴은 미련 없이 호은의 앞에서 이능력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안내해 주려고 이능력을 안 쓰고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숙소에서 바로 교육장으로 와도 됐을 텐데 지사를 구경시켜 준 폴의 호의에 호은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답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제 같은 손등에 입술을 맞추는 행동이 아닌 커피를 사는 거로 말이다.
띵-
5층에서 내린 호은은 복도 끝 <교육장>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대학생 시절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넓은 단상과 그 앞에는 강의실은 연상시키는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다.
아직 교육이 시작된 건 아닌지 단상에는 아무도 없었고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호은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시선이 마주치고 바로 들려오는 쾌활한 인사소리에 호은은 동기들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안도했다.
넓은 교육장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고 호은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 옆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간단한 통성명을 나눴다.
여자의 이름은 김세희. 어려 보이는 외모라 생각했더니 17살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스카우트 됐다고 하는데 짧은 단발에 순한 강아지 눈매와는 대조적으로 커다란 목소리와 동작을 보니 비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이름은 류윤재. 구릿빛 피부와 진한 눈썹. 운동한 건지 제법 다부진 몸이라 생각했더니 시골에서 여러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류윤재 역시 최근 마을에서 단체 건강검진을 받고 가이드 공단에 스카우트로 들어오게 된 케이스였다.
호은은 두 사람의 소개를 듣고 잠시 침묵했다.
‘가이드 공단에서 허접스럽게 만들어 낸 채용 공고는 바보같이 나만 당한 거였다니.’
가이드를 어떻게 찾나 궁금했는데 역시 건강검진과 관련이 있었다.
두 사람은 원치 않게 들어온 것이었지만 호은은 직접 가이드 공단에 채용 검진 결과지를 들이민 거나 다름없어서 잡아먹어 달라며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온 꼴이었다.
“저는 권호은입니다. 가이드 공단에 이력서 넣었다가 들어오게 됐어요.”
소개를 마치고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었다.
인턴사원 모두 현재 가이드가 무엇인지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시설이나 규모로 보았을 때 이상한 곳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고 한다. 호은도 거기에 대해 동의했다.
첫날 어떤 교육을 들었는지 물어보자 두 사람이 들은 이론 교육은 어젯밤 호은이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가이딩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육이 들어간다고 한다.
드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교육 담당자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하늘색 머리는 굵은 펌이져 있었다. 순한 눈매와 무표정에도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남자를 온화하게 보여 줬다.
아침 인사를 건넨 남자는 가지고 왔던 책자를 세 사람에 나눠 줬다. 책자의 이름은 슬기로운 가이드 생활이었다.
‘슬기로운 이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책을 펼쳐 보자 앞에는 빼곡한 글자로 가이드의 기원 같은 게 상세히 적혀 있었다.
빠르게 장을 넘기자 뒤쪽에는 보건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성적 접촉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의문이 생기려던 차에 교육 담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오시는 분이 계시니까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가이드 교육 담당자 하늘이라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가이딩 이론에 대해서 여러분은 배우실 거고요. 다음 주에는 실습 교육으로 실제 가이딩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실 수 있습니다.”
호은을 보며 싱긋 웃은 하늘의 목소리는 마치 나비가 부드럽게 날갯짓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가냘파 보이는 인상과 잘 어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여러분에게 미리 공지해야겠네요. 다음 주 금요일 실습은 에스퍼에게 직접 가이딩 하는 테스트가 있을 예정입니다. 2주 안에 에스퍼 분들과 친해져 실습 상대로 데려와 주셔야 합니다.”
“네?!”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퍼를 데려오라고요?”
‘인턴인 우리들이 무슨 수로 에스퍼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단 말인가? 에스퍼는 사람 지키러 다니느라 바쁜 존재인데!’
그런 세 사람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 담당자는 세 사람에게 노란색 줄의 사원증을 줬다.
“가이드 인턴은 노란색 사원증을 착용합니다. 이걸 차고 있으면 주변 에스퍼들이 도와줄 거예요. 인천지사는 여러 에스퍼들이 살고 또 임무 이동하는 장소이니 여러분이 생각하기만큼 만나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자 그럼 이론 수업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호락호락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공지를 끝낸 하늘은 단번에 교육을 시작했다.
호은은 사원증을 쳐다봤다. 사원증에는 이력서에 냈던 증명 사진이 있었다. 아래로 이름과 등급이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등급은 D- 로 적혀져 있다.
“먼저 들어온 다른 인턴 언니가 알려 줬는데 인턴은 D-로 시작한대요. 나중에 등급 테스트를 보고 바뀌는데 등급이 높다고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높으면 위험도가 높은 업무를 하는 부서로 배치받을 수 있다고 해요.”
눈치가 빠른 건지 김세희는 호은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궁금했던 점을 조용히 알려 줬다.
‘위험도가 높은 부서라면 유언장을 쓸 확률도 높겠네.’
D-가 마치 대학교에 다녔을 시절 학점을 떠올리게 했으나 일하기에는 오히려 낮은 등급이 좋은 것 같았다.
호은은 사원증을 목에 찼다. 사원증 하나로 정말 회사원이 된 기분이다. 궁금증도 해결됐으니 교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이딩은 각 나라에서 왜 기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시했다.
가이딩이란 그저 가이드 안에 있는 기(氣)였다. 가이드는 무의식적으로 기를 내뿜으며 가이딩하고 있었고 에스퍼는 그 기로 치유를 받는 거였다.
무의식으로 나오는 가이딩은 방사 형태로 에스퍼를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애초에 무의식이라 그런지 가이딩 자체가 적게 빠져나간다나 뭐라나.
의식적으로 방사 가이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몸 안의 기를 느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폭포수를 맞으며 나는 누구인가, 내 몸에 있는 기는 무엇인가 찾는 수련은 할 수는 없으니 이때 무의식 가이딩의 다른 종류인 직접 가이딩을 한다고 한다.
직접 가이딩은 에스퍼와 살을 맞대는 것으로 신체에 닿기만 하면 의식적 방사 가이딩만큼의 치유 능력을 보인다.
내용은 별거 없었지만 가이딩에 대해 굳이 기밀 유지를 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직접 가이딩의 윤리 문제 때문일 것 같다.
가이드가 에스퍼의 신체에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가이딩의 양은 짙어진다. 또한 가이드의 기분이 좋아지면 가이딩에도 반영이 되는데 이 때문에 치유 목적의 접촉이 성적 접촉이 변질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가이드는 치유 목적의 접촉과 성적 접촉을 구분할 줄 알아야 했으며 가이드 의지 없이 가이딩을 강제로 진행하는 건 국제 가이드 법으로 처벌이 된다고 했다.
점심시간을 가지고 두 시간 정도 더 진행된 교육은 세 시쯤 되니 종료되었다.
하늘은 이후 자유 시간이니 주변을 돌아다녀 보며 가이드와 에스퍼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아. 그리고 사원증으로 복지 포인트 백만 원이 매달 들어오니 단지 내 가게에서 카드 결제하듯 이용하시면 됩니다.”
‘돌아가는 건 개판 같은데 복지 부분은 공공 기관 같네.’
호은은 동기 두 명과 전화번호를 교환한 후 헤어졌다.
단지가 넓어 당분간 구경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에스퍼를 어디서 구해야 하나.”
제법 어려운 과제가 막막해 건물을 빠져나와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걷던 호은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노란색 사원증을 걸고 있는 세 명의 사람과 사원증을 걸지 않은 한 남자가 구석에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편의점 앞 교복 입은 학생 무리가 성인에게 담배 심부름하려는 듯 위협을 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노란색 사원증을 걸고 있는 사람은 덜 자란 학생처럼 작았고 당하고 있는 남자는 182cm 호은보다 훨씬 컸지만, 몸을 잔뜩 구긴 채 묵묵히 당하고 있었다.
“야야, 손으로 건들지 마. 가이딩 강탈해 간다.”
“지금도 방사 가이딩 훔치고 있잖아. 기분 나쁘게.”
노란색 사원증은 분명 인턴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오늘 봤던 김세희와 류윤재는 없었기에 저들이 인턴 선배라는 것을 호은은 눈치챘다.
그들은 막대기 같은 거로 덩치 큰 남자를 건들고 있었는데 검은색 바지에 신발 자국과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힘으로 제압하면 남자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가만히 맞고 있는 게 의아했다.
“시폭아, 나 같으면 그냥 무릎 꿇고 제발 가이딩 좀 해 주세요 하고 빌겠다. 혹시 몰라? 시폭 시간 좀 늘려줄지.”
“…….”
가이딩해 준다는 걸 보니 아침에 폴이 말한 인턴 선배가 확실했다. 맞고 있는 남자는 사원증을 착용하고 있지 않아 가이드인지 에스퍼인지 구분이 안 됐다.
“너 정확한 시폭 시간 언제냐? 응? 너 파트너 가이드도 없으니까 결정체 남겨 놓고 폭주로 뒈지겠네? 빨리 뒤져서 결정체나 내놔!”
“으하하.”
인턴 한 명이 독설을 날리자 주변에 있던 인턴들이 동조하며 웃기 시작한다.
호은은 주변을 쓱 둘러봤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 그중에서 파란색 사원증을 찬 사람과 검은색 사원증 찬 사람 모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저 상황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놈의 회사는 도대체 뭐 하는 회사기에 사내 왕따를 가만히 방치해?’
교육 담당자가 주변을 둘러보라 했던 게 가이드로서 갑질을 할 수 있다는 걸 느껴 보라는 거였나 의문이 들었다.
“야, 시폭. 무시하냐? 엉? 무시해? 우리 인턴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에이 설마 감히 그러겠어? 우린 조금 있으면 정직원인데.”
가만히 서 있던 남자는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어?”
반대편에서 지켜 보고 있던 호은은 남자가 고개를 든 찰나 시선이 마주쳤다.
‘그 녀석이다.’
황금 같은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지난번과 오버랩되듯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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