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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화 (1/129)

1화

오후 2시쯤의 음식점 풍경은 전쟁을 치르고 난 이후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과 주방에서 들리는 어수선함.

해당 장소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카페로 2차전을 하러 떠나갔을 게 분명했다.

창문 밖을 보니 회사원이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바쁘게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

주변 풍경과 상관없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식당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어딘가 동떨어져 보인다. 그는 선망의 눈빛으로 창밖을 구경하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모님. 저 여기 도전 메뉴 하나 주세요.”

메뉴판을 펼쳐보기도 전에 남자는 벽에 커다랗게 붙여진 이벤트 메뉴를 주문했다.

식당은 평범한 국숫집이었다. 국수라는 음식 자체가 빠르게 만들 수 있고 먹는 시간도 아주 짧은 편이지 않은가.

덕분에 해당 국숫집 사장님이 돈을 잘 버는 건지 <대왕 국수>라는 이벤트 메뉴가 있었다. 총 10인분의 양을 20분 이내에 다 먹으면 상금 10만 원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직원에게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촬영해도 되냐고 물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직원은 익숙하다는 듯 오케이 사인을 보였다.

무료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핸드폰을 고정한 남자는 화면에 비추는 제 모습을 확인했다. 어차피 음식 위주로 촬영할 예정이라 얼굴 상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기 얼굴이 입술까지만 노출되게끔 위치를 조정하고 나자 타이밍 좋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대왕 국수가 등장했다.

스톱워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직원은 남자를 흘긋 쳐다봤다.

고운 흰 피부와 분홍빛이 감도는 두툼한 입술은 남자를 나이보다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키는 커 보였지만 늘씬한 체형이 과연 저 국수를 다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카메라에 받은 국수를 한번 보여 주고 말없이 스톱워치를 눌렀다.

삑.

국수를 식히지도 않고 남자는 도전이 아닌 그저 식사하듯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곱상한 외모의 남자가 먹는 음식이 잔치국수인지 파스타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어머. 저 학생 봤어요? 성공 못할 것 같았는데 벌써 반이나 먹었어요.”

“아. 우리 집까지 왔나 보네.”

“사장님? 저 학생이 누구인지 아세요?”

“최근에 이 동네에 상금 걸린 도전 음식을 도장 깨기를 하듯 깨는 녀석이야.”

“네? 그냥 흔한 너튜버 아니었어요?”

“너튜버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내가 보기에는 그냥…….”

국물까지 싹 다 먹고 그릇을 내려놓은 남자를 확인한 사장은 카운터에서 상금을 준비하며 말했다.

“배고픈 백수 같은데.”

10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야무지게 챙긴 남자의 이름은 권호은이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25살의 평범한 남자였다.

트레이드 마크라고 불릴 수 있는 남색 트레이닝복은 그와 한 몸과도 같은 복장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이것보다는 잘 차려입었던 것 같은데 졸업하고 나니 아무 때나 입어도 되는 트레이닝복이 가장 편했다.

대학교 동기들은 취업을 준비하거나 이미 취업이 된 사람도 있건만 호은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막막한 미래는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었다.

투둑.

‘오늘따라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비를 품고 있는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습도가 올라간 골목길 바닥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소나기처럼 굵은 빗줄기가 매섭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아…….”

주머니에 돈 봉투를 꾸겨 넣은 호은은 급작스러운 비를 맞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람에게 치이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 아래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젖은 옷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어느새 우산이 없어 뛰어다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색의 우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가만히 서서 건너편 돈가스 가게를 바라보던 호은은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기척에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자신 보다 10cm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차림새는 길거리에 있는 우산에 색이라도 뺏긴 건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헬멧과 검은색 상의와 바지, 신발마저 검은색이다. 심지어 무슨 특수요원이 입을 듯한 방탄복처럼 보여 근처에서 영화라도 촬영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남자는 내리는 비를 감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처럼 돈가스 가게를 보는 건지 미동도 없이 정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배고픈데 돈이 없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구겨진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호은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비가 와서 촬영이 멈췄고 잠깐 대기하라는 감독의 명령에 남자는 배고픈 배를 달랠 겸 촬영장을 벗어난 거다. 마침 향기로운 냄새에 이끌려 음식점 앞까지는 왔지만 아뿔싸! 남자는 핸드폰만 챙겨 온 것이다.

‘돈가스 먹을 돈도 없다니 너무 불쌍해!’

물론 이 내용은 모두 호은의 상상으로 남자는 어느 순간 돈 없는 엑스트라 1이 되었다.

평소 오지랖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호은은 본인 또한 알바조차 안 하는 백수이건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 돈가스 드실래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손은 남자의 어깨에 닿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정전기에 당황할 새도 없이 열린 헬멧 안으로 황금 호박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쿵.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올라왔다. 쿵쿵. 요란하게 띄는 심장은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당신, 뭐야.”

“……!”

냉기를 머금은 듯한 차가운 목소리는 주변 온도를 떨어트렸다. 내밀었던 손은 남자가 반사적으로 쳐 버려 허공을 어색하게 떠돌고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친 호은을 향해 비가 매섭게 떨어졌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느끼며 호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는 남자를 향해 당신이야말로 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파래진 남자의 입술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어 매몰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다시 남자에게 괜찮냐 물어보려는 순간 열기를 머금은 강한 바람이 불었다.

“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뒤 바람이 멎을 때쯤 팔을 내리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엉? 어디 갔어. 저기요?”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는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호은은 자기가 서서 잠이라도 잤나 싶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장우산을 보며 조금 전까지 남자가 이곳에 있던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온 호은은 한 번도 펼치지 않은 검은색 장우산을 현관문에 놓여 있는 우산꽂이에 넣어 뒀다.

우산을 왜 챙겼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만 떠올리면 손에서 느껴지던 전류가, 힘차게 뛰던 심장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산을 챙긴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원인 부모님에게 나갔다 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젖은 옷은 세탁기 통 안에 대충 꾸겨 넣고 호은은 서둘러 씻기 시작했다.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자식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이 지난 시점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한심하게 생각할 것이다.

집에서 받는 눈초리를 생각하면 아무 회사라도 취업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머리가 나쁜 아들을 위해 허리 휘어 가며 학원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보낸 부모님께서는 아무 회사에 취업하길 바라진 않을 거다.

호은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러했다.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무원 시험이나 NCS 시험을 준비하라는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호은은 어쩔 수 없이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 공부는 잘돼 가고?”

“뭐 평소랑 같지.”

부모님과 함께 먹는 저녁은 체할 것만 같다. 아무리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호은이라지만 매번 숙제 검사하듯 일과를 물어보는 부모님의 질문에 답할 때마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한 결과였다. 공부도 안 하고 아르바이트 대신 용돈을 벌기 위해 너튜브 활동과 상금이 걸린 음식을 먹으러 다니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지금이라도 공부가 아니라 남들보다 강한 신체를 이용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까 봤던 방탄복을 입었던 남자처럼….

호은의 사념을 깨우듯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공부만 하고 있을 거야? 너 이번 상반기 공채 뜬 거 서류는 넣었어! 안 넣었어?”

“넣었을걸.”

“연락받은 거는 하나도 없고?”

“엉.”

“뭐? 너 도대체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쓰길래 연락받은 게 없어!!!”

우산 주인을 떠올리던 호은은 아빠가 물어보는 질문에 건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그러다 귀를 찢을 듯 들려오는 고함에 들었던 수저를 떨어트렸다.

“너 1년 동안 도대체 뭐한 거야? 어떻게 다 서류 탈락이야!!!”

“어어? 아냐, 아냐. 면접 있어!”

잔소리 한 시간 이상을 예상한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뱉었다. 면접이야 보러 간다고 거짓말하고 떨어졌다 하면 그만이었다.

“정말? 너 왜 말 안 했어.”

“아니 면접 보고 나서 말하려고 했지.”

“면접 언제인데?”

“어…… 그게.”

바쁘게 시선을 굴리던 호은은 내일이라고 중얼거렸다. 바로 당장 내일이라는 말에 호은의 예상처럼 잔소리 폭격을 쏘아 대려던 부모님의 입은 일자로 다물렸다.

“그래? 아이고 그러면 컨디션 관리 잘해야지. 내일 면접 준비는 다 했고?”

“아…… 이제 하려고.”

어색한 미소를 띤 호은이 다 먹은 식기를 들고 식탁에서 벗어났다. 등 뒤에서 정장과 구두를 꺼내 놓는다는 부모의 말은 한 귀로 흘렸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콕콕 찔렸지만,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상반기 공채가 열린 공공 기관과 대기업 회사에 무작위 서류를 던지긴 했다.

5번째 서류 광탈 문자를 받은 뒤 남은 회사의 서류 전형 합격 결과는 확인하지 않았다.

안 봐도 불합격일 것이 뻔했다.

‘운 좋게 면접 봤어도 불합격이었겠지.’

호은은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나 더 추가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

아침에 일찍 일어나 면접 준비를 한 호은은 괜히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몸에 맞지 않은 정장을 입고 머리에 왁스를 칠하는 모든 과정이 귀찮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 태워다 줘? 언제 나갈 거야?”

“나는 여유 있어서 밥 먹고 가면 될 것 같아. 엄마 먼저 출근해.”

부모님이 나가고 나면 불편한 정장도 벗어 던지고 머리도 헤집어 놔야겠다 생각한 호은은 자신보다 더 호들갑인 부모님을 보내 주며 멈췄던 아침 식사를 이어 가려 했다.

“호은아!!!”

벌컥, 다시 열리는 현관문에 놀란 호은은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트렸다.

“회사에서! 너 데리러 왔대!!”

“예?”

“가이드 공단이라는데?”

면접을 보러 간다는 건 다 거짓이었다. 분명 거짓이었는데…….

“밥 그만 먹고 얼른 나와!”

친절히 현관문에 구두를 내려놓은 엄마였다. 호은은 아직도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그럴 리 없는데.”를 중얼거리며 나왔다.

“반갑습니다. 권호은 씨.”

눈앞에는 자신을 면접장에 데리러 온 가이드 공단 직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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