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065. 4막 4장 - 찰나의 휴식 (1) / Isaac
이 시간은 금세 지나갈 거야
그저 찰나에 불과하겠지
그래도 일단은 여기서 쉬자
편히 누워 잠을 청하자
달을 바라보며 하루를 끝내자
- 시, `찰나의 휴식` 中 발췌 -
"자.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식사 준비할 테니 장작을 구해다 주십시오."
벌써 그럴 시간인가. 티파나를 떠나온 지 몇 시간은 지났다. 그동안 계속 걷기만 했다. 해는 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에스나는 말을 주변 나무에 묶고 짐을 푼다. 꺼내 든 것은 냄비와 물이 들어있는 수통. 그리고 갈색의 가죽 자루 하나. 내용물을 안 봐도 뭔지 알 거 같다. 미하일이 꺼냈던 그 곡식 가루겠지. 맛없는 그거.
나와 글린다가 동시에 한숨을 쉰다. 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걸 먹어본 적 없으니 저런 표정이 나오지. 에스나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한다.
"이 수프가 맛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 먹어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래도 그 표정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조금 너무한 거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리하는 사람을 생각해줘야지.
"죄송합니다."
"미안."
"칫."
나와 글린다의 성의 없는 사과에 에스나가 혀를 찬다.
"얼른 가서 장작이나 가져오시죠."
"필요 없을걸?"
"네?"
발로 쓱쓱 삼각형을 그린다. 그 위에 역삼각형을 그려 육망성을 만든다. 만들어진 별의 꼭짓점들을 이어 원을 그린다. 이것으로 마법진의 기본이 탄생했다.
"마법진 발동. 마녀의 화덕."
주문과 함께 마법진을 발끝으로 건드린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냥 불만 솟아오르면 화덕이라고 안 불리지. 마법진 안쪽의 땅이 솟아올라 무언가를 올려둘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든다.
".... 마법은 사기입니다. 제가 여태까지 한 고생을 부정하고 있군요."
"마법은 사기죠."
에스나의 중얼거림에 글린다가 동의한다. 그렇게까지 사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 말도 없는 맥을 살펴본다. 너는 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맥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 있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못 한다. 덜덜 떨리는 손은 마법진에 피어오른 불을 가리키고 있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구나. 내 편이 한 명도 없네.
"사기라고 치고, 요리나 시작하지?"
에스나는 또 혀를 차고 냄비를 화덕에 올려놓는다. 실제 화덕과는 다르게 생겼을 게 뻔하지만, 마법 이름이 화덕이니 화덕이라고 부르자.
화덕에 올라간 냄비의 물이 금방 끓어오른다. 마법은 역시 편리해. 에스나는 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끓어버리는 물을 보고 한숨을 쉰다. 편하면 좋은 거지 웬 한숨? 에스나는 가죽 주머니를 풀고 냄비에 조금씩 쏟기 시작한다.
주머니에서 쏟아진 가루가 냄비에 풀어진다. 투명하던 물이 누리끼리한 색으로 변해간다. 덤으로 걸쭉하게도. 끓어오르는 물의 김과 함께 냄새가 퍼져나간다. 입맛을 돌게 하기에는 힘든 그런 냄새가.
"뭘 그렇게 서 있습니까. 얼른 자리에 앉으시죠."
준비가 다 되었는지 에스나가 짐에서 그릇과 수저를 가지고 온다. 수프를 떠낼 국자도. 전부 나무로 만들어졌다.
맥이 먼저 냄비 근처에 앉는다. 저 수프의 맛을 모르기에 나오는 행동. 그 끔찍한 맛을 기억하고 있는 나와 글린다는 한참을 머뭇거린다. 투구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에스나의 따가운 눈총을 맞고 결국, 냄비 옆에 자리를 잡는다.
에스나가 국자로 수프를 떠서 그릇에 나누어 준다. 맛없는 수프가 담긴 그릇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친절하게 숟가락까지 올려져서. 끝까지 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글린다의 손을 떠난 그릇은 내 손에 쥐어졌다.
"다 받으셨습니까?"
"네···."
글린다의 힘없는 대답.
"받았습니다."
맥의 힘찬 대답.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불평 어린 대답.
에스나는 세 가지 대답을 듣고 한숨을 쉰다. 한숨 많이 쉬면 복 나간다는데.
"그냥 기도하고 먹읍시다. 하늘에 계신 신이시여. 우리를 도우시는 백룡이시여. 이 식사가 준비되게 도우신 물론이시어. 감사드리며 맛있게 먹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에스나가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다.
"안 따라 하십니까?"
따라 하는 거였어? 티파나에서는 안 그랬는데. 살짝 눈치를 본 우리는 에스나의 마지막 말을 반복한다.
"감사드리며 맛있게 먹겠습니다."
맛있지는 않겠지만. 맥이 수저를 들어 입 안에 넣는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뱉을까 삼킬까 고민 중이군. 삼키는 거로 첫 숟갈이 끝. 다음을 쉽게 시도하지 못한다.
"좀 맛있게 먹으십시오."
이걸 어떻게 맛있게 먹어. 나와 글린다가 동시에 한숨을 쉰다. 맥은 한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어 보인다.
"에휴. 얼른 드십시오. 식사를 거르면 내일 힘들어질 겁니다."
에스나의 말에 글린다가 수저를 움직인다. 나도 일단은 수저를 움직인다. 나무 수저에 노란빛의 수프가 뜨여진다. 그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맛. 솔직히 아주 맛없는 건 아니다. 그냥, 다시는 입에 대고 싶지 않은 맛일 뿐.
구겨진 우리들의 얼굴을 본 에스나가 한숨을 쉰다. 자신도 식사를 시작하려는지 투구를 벗는다.
..... 여자였어! 말도 안 돼! 왠지 남자 목소리는 아니더라
"으헤헤."
에스나의 민얼굴을 본 맥과 글린다도 이상한 소리를 낸다. 둘 다 에스나가 여자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나 보다.
"여자셨습니까?"
맥의 질문에 에스나의 잘 정돈된 눈썹이 찡그려진다.
"전 태어날 때부터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기사시지 않습니까?"
저 질문으로 유추해보건대 여기사라는 존재는 매우 드문가 본다. 아예 없거나.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는 아닙니다. 백룡 기사라는 건 이름일 뿐이지요. 저희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는 기사가 아니라 사신입니다."
에스나의 대답에 맥과 글린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정확히 이해했지만.
백룡 기사는 사신이지. 초월자를 도와 악마를 해치우는 사람들. 사람들이긴 할까? 백룡 기사는 사신들의 위장 신분 정도로 이해하면 편할 거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투구를 쓰고 다니니 문제없습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여러분이 그러하듯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남자로 알고 있을 거다. 중성적인 목소리와 기사는 전부 남자라는 상식이 만나서 나타나는 오해. 자신을 숨기는 데 똑똑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얼굴을 가리시고 다니다니! 다른 여자를 모욕하는 일이에요!"
글린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나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왜 저렇게 흥분하나 했더니 바닥에 그릇이 떨어져 있다. 저 과장된 행동은 먹기 싫은 음식을 땅에 쏟기 위해서다.
"다시 떠드릴 테니 자리에 앉아 주시죠."
봐라.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잖아. 에스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땅에 떨어진 그릇을 줍는다. 수통에 담긴 물로 대충 흙먼지를 털고 다시 수프를 퍼 담아준다. 글린다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맥의 손을 거쳐 돌아온 그릇을 보고 한숨을 쉰다.
"어쨌든, 그런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면 안 돼요. 너무 아깝잖아요."
이전보다 목소리가 많이 줄어들었다. 글린다의 말을 들은 에스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 얼굴이 어떻기에 그러십니까?"
짧게 잘린 흑발. 잘 정돈된 눈썹. 오뚝한 콧날. 약간 날카로운 눈매. 작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 나에게 묻는다면 미인상이라고 말하겠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다니! 여자의 수치에요!"
글린다의 목소리가 커진다. 왠지 모르게 흥분하고 있다. 손을 이리저리 휘젓다 보니 그릇이 흔들린다. 또 땅에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네.
"음식을 모독하는 일은 그만둬 주십시오."
에스나의 말에 글린다가 멋쩍은 듯 웃는다. 흔들리던 그릇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는다.
"도대체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길래 그러십니까? 못생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못생겼다니!"
글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릇은 옆에 앉아있는 맥에게 넘겨주고. 에스나는 그런 것이 불편한지 머리를 긁적인다.
"에스나씨는 매우 예뻐요! 질투가 날 정도로!"
그 정도···. 인가? 난 잘 모르겠다. 뭐 현실의 사람들을 좀 만나봤어야 알지. 맥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예쁜 편이긴 한가 보군.
"그렇습니까?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백룡 기사로 살아와서."
"그럼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무슨 관리요?"
"안 하는구나······."
글린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말도 안 돼. 내가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며칠 동안 제대로 관리 못 해서 피부가 상해가는 게 느껴지고 있는데. 누구는 관리도 없이 저런 외모를 유지하고.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상당히 상심한 채 중얼거린다.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차마 말을 걸 수 없다.
"저는 아가씨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눈치를 보던 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지른다. 얼굴은 불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빨갛다. 아주 정열적인 고백이지만, 지금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 그래? 그럼 얼른 앉아서 처먹어."
봐봐. 역시 기분이 안 좋은 글린다는 건드리는 게 아니야. 글린다의 날카로운 말에 맥은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에스나는 웃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일과 함께 저녁 식사는 기분 좋게 끝이 났다. 음식이 맛없었던 게 흠이지만.
"이제 잘 준비를 합시다. 그런데 모포가 두 개밖에 없는데···."
"도대체 준비가 왜 그 모양이야?"
"본부에서 출발할 때는 여러분과 동행할 줄 몰랐습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 질문에 에스나가 인상을 찌푸린다. 입고 있던 갑옷을 전부 벗어 정리한 에스나는 편해 보이는 천 옷차림이다. 글린다는 그 옷을 보고 자신을 보고 한숨을 쉰다. 글린다는 아직 드레스 차림이다. 빠르게 마을에 들러서 옷을 구해야지. 신발도 불편해 보이고.
"그럼 어떻게 하죠?"
글린다의 질문에 에스나가 생각에 잠긴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짐에서 모포 두 개를 꺼낸다. 삽과 망치 같은 공구들도 꺼내 든다.
"저와 아이작이 불침번을 서는 것으로 하죠. 두 분은 그냥 주무시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어차피 차원이탈자는 수면이 필요 없는 몸입니다. 저야 말에 올라타서 졸며 움직일 수 있고요."
사신이라 그런지 많은걸 알고 있다. 잠깐만.
"너 내가 음식 먹을 필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그렇게 맛없는 걸 건네준 거야?"
"음식이 남는 것은 아깝기 때문입니다."
망할 자식. 고작 그런 이유로 그릇을 넘겨주다니. 처음부터 양을 줄여서 조리했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갑시다. 땅을 좀 파서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필요 있나?"
"조금이라도 파야 잠자는데 불편하지 않습니다."
"아니. 마법을 쓰자고."
에스나와 글린다가 나를 바라본다. 맥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확실히···. 마법을 사용하면 편리하겠군요. 부탁하겠습니다."
삽을 들고 있던 에스나가 뒤로 물러서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곳으로 걸어가 마법을 준비한다. 에스나는 땅을 파는 마법을 원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거로 만족하면 재미없지.
"마법사의 탑."
땅이 흔들린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땅에서 검은 탑이 솟아오른다. 높이. 높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시전자의 마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마법사의 탑. 나 정도 되면 100층이 넘어가는 탑이 나타난다.
"됐다. 오늘을 여기서 자자. 말도 데리고 들어가고."
"마법은 사기야."
"네. 마법은 사기가 분명합니다."
사기든 뭐든 효과만 좋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