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064. 4막 3장 - 다시, 티파나 (3) / Isaac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게."
마르코스의 말에 전력으로 달려왔을 것이 분명한 병사가 숨을 몰아쉰다. 호흡을 가다듬은 병사가 다시 입을 연다.
"오스왈츠 성에서 급보입니다! 성이 무너졌습니다!"
"뭐어어어!!!"
마르코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 지른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에스나도 당황했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입안에 있던 차를 뿜을 뻔했다. 겨우 자제했지. 살짝 주변을 보니 글린다와 맥의 얼굴도 창백하게 변해있다
"자···. 자세히 말해보게!"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손도 떨고 있다. 불쌍해 보일 지경. 에스나도 만만치 않다.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숨은 쉬고 있는 걸까? 에스나를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글린다와 맥도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성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병사도 흥분 상태다. 그래도 필요한 말은 똑똑히 전하고 있다. 마르코스는 병사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든다.
"형님은! 백작님은 어떻게 되었나!"
"현재 무너진 성을 사람들이 치우고 있습니다. 아마···. 그 안에 계실 겁니다."
마르코스가 무너져 내린다. 병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나는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겠네. 일단 돌아가서 추릴 수 있는 병사를 모두 오스왈츠로 보내게. 지원할 수 있는 의약품과 식량 같은 물건들도 챙겨가게. 나는 나중에 호위병들과 움직이겠네."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병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마르코스는 터덜터덜 걸어와 소파에 앉는다. 아니. 무너져 내린다.
"괜찮으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마르코스는 손을 올려 얼굴을 덮는다. 깊은숨을 몰아쉰다. 에스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마르코스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얼굴로 글린다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받은 글린다는 침을 삼킨다.
"글린다."
"네. 숙부님."
글린다의 이름을 부르는 마르코스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듣는 사람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옆에 있던 나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얼마나 알고 있지?"
우와. 날카롭다. 역시 백작위를 노리고 있다 이건가? 마르코스는 글린다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던 글린다는 한숨을 쉰다.
"어떻게 아셨나요?"
"오스왈츠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으니 일단 의심해볼 만하지."
글린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린다. 다시 탁자에 올려진 잔은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말해주게. 어떤 일이 있었나."
"성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만찬이 있어서 거기 참여했죠. 숙부님께서 빌려주신 호위병들도 함께요."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지는 몰랐다.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고 끝날 줄 알았지.
"식사가 한창일 때 아버님이 건배를 제안했어요. 잔에 찬 와인을 들이켰고, 모두 의식을 잃었죠. 호위병들은 그때 모두 죽었어요."
덤으로 나도 죽었었지. 그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나 보군. 글린다의 이야기를 들은 마르코스가 이를 간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 옷을 입은 상태로 어느 탑에 갇혀있었죠."
글린다는 입고 있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다.
"그리고 맥을 만나고 아버님이 저를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큰뱀을 소환하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걸 방해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누군가의 방해 덕분에···."
에스나가 나를 바라본다. 뭐. 어쩌라고.
"전 죽고 싶지 않아서 탈출했어요. 그러는 동안 마법사님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죠."
도와주러 가는 길에 성에 있던 기사를 몰살했지. 성도 이곳저곳 부쉈고. 특히 지하시설은 아주 박살을 내놨다.
"그리고······. 음······."
글린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마르코스는 글린다를 계속해서 노려본다. 저러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못하지. 내가 나서야겠다.
"함께 백작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형님을 죽였나?"
마르코스가 날카롭게 물어온다. 이제 곧 나올 이야기인데 인내심이 부족하군.
"죽였습니다. 고통 없이요. 그다음 성을 무너트리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도움을 좀 얻으려고요."
내 대답에 마르코스가 한숨을 쉰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증오, 안심, 기쁨, 당황 등등. 뭐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
"형님이 자네들을 먼저 죽이려 했으니 죄를 묻지는 않겠네."
그것참 다행이군. 마르코스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나의 도움은 구하지 말게나. 어찌 되었든 자네들은 내 형님을 죽였으니."
그것참 불행이군. 마르코스는 한숨을 쉬고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 그렇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한다.
글린다는 침만 삼킨다. 뒤쪽의 맥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나도 이 분위기가 불편한 건 매한가지.
"음.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마르코스."
얼어붙은 시간은 에스나의 말 한마디로 깨어진다. 나와 글린다를 바라보던 날카로운 시선도 거두어진다. 마르코스는 에스나를 바라본다.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나는 좀 쉬어야겠어."
미르코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무실의 문을 향해 걸어간다. 터덜터덜. 걸음에 힘이 없다.
"갔군요."
에스나가 중얼거린다.
"질문이 하나 있거든?"
"말씀하시죠."
"왜 저렇게 화내는 거야? 어차피 백작위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았어?"
질문에 에스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입을 열어 대답한다.
"마르코스가 백룡 기사를 후원하면서 부탁한 게 있습니다. 데이비드의 목숨만은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부탁을?
"마르코스의 부모는 마르코스를 낳자마자 사망했습니다. 그 후 데이비드의 가족에게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요."
글린다가 중얼거린다. 몰랐던 이야기라니. 잘도 숨기고 있었구나.
"그럴 겁니다. 마르코스는 어느 정도 성장하자마자 집안을 뛰쳐나왔습니다."
"넌 그런 소식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야 백룡 기사는 오스왈츠 가문을 감시해 왔으니까요."
참 담담히도 말하는구나. 맥과 글린다의 입이 벌어진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 에스나는 그런 그들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오스왈츠 가문은 큰뱀을 섬기는 집안이었으니, 감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 네."
글린다는 헛웃음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그것과 상관없이 에스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찌 되었든 집안을 뛰쳐나온 마르코스는 상인으로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백룡 기사와 접촉했고요."
"왜? 오스왈츠 가문인 마르코스는 적이 아니었어?"
"큰뱀에 대해 교육받기 전에 빠져나왔습니다. 덕분에 백룡 기사의 사상에 쉽게 동화되었고, 저희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티파나의 시장으로 앉혔다?"
"백룡 기사는 그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백룡 기사에대해 재평가해야겠다. 에스나 같은 어벙한 사람이나 데리고 다니는 집단은 아니군.
"그런 겁니다."
그런 거긴 뭐가 그런 거야. 제대로 설명이 하나도 안 됐잖아. 더 물어보지는 않겠다. 어차피 스트레스는 내가 받을 테니까.
"그러므로 같이 갑시다."
"네?"
글린다가 반문한다.
"마르코스는 당신들을 돕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기사단장을 잃은 기사들은 여러분을 추적할 테고요."
그렇겠지. 나 같아도 범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될 거다.
"아이작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기사단 하나와 맞서 싸우는 건 무모한 일입니다."
이미 하나 박살 내고 왔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기사단 전부였겠지?
"그러니 저와 갑시다. 백룡 기사는 여러분을 보호해줄 겁니다."
"어···.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나와 글린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맥이 손을 들어 올린다. 에스나는 고개를 끄덕여 질문을 허용한다.
"그 백룡 기사라는 곳에서 아가씨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요?"
그러게. 에스나와 이야기하고 있었더니 잊고 있었다. 글린다도 이제야 생각난 것 같다.
"그건 큰뱀을 소환하는 의식을 방해하기 위해서였죠. 지금은 죽일 필요가 없으니 보호만 하면 됩니다."
백룡 기사에 대해 재평가 하자. 그냥 저기는 미친 집단이다. 여태까지 죽이려고 했다가 보호를 하겠다니.
"어떤 방식으로 보호해주나요?"
"따라가실 생각인가요?"
글린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에스나 씨의 말이 맞아요. 저희는 집단의 보호가 필요해요. 그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죽이려 했을지라도."
그런 건가. 난 잘 모르겠다. 글린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은 선택입니다."
에스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지금?"
"도망은 빠르게 칠수록 좋은 겁니다."
그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글린다와 맥을 바라본다. 둘 다 마음의 준비는 끝난 모양. 나는 별로 준비 안 됐는데.
에스나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글린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어쩔 수 없다. 한숨을 쉬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마르코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겠군요."
"그렇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으니."
오히려 작별인사를 하면 화를 내겠지. 에스나가 앞장선 상태로 복도를 걸어간다. 저택을 빠져나와 정문으로 간다. 마르코스가 미리 준비한 건지 에스나의 말을 붙잡고 있는 병사가 보인다.
"시장님께서 빨리 떠나시라고···. 일주일 치 정도의 식량을 짐에 싸드렸습니다."
병사가 에스나에게 말의 고삐를 넘겨준다. 에스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고삐를 받아든다.
"감사합니다. 마르코스에게는 떠난다고 전해주십시오."
에스나는 말에 올라타지 않는다. 그저 고삐를 잡고 걸어간다.
"안 따라오십니까?"
"갈게."
멀어져가는 에스나를 따라 걸어간다. 마르코스의 저택이 멀어져 간다. 광장을 지나가는 동안 글린다는 계속 뒤쪽을 바라본다. 글린다는 오스왈츠 가문과 연이 끊어졌다. 확실하게. 아버지를 죽였고, 가문의 기사들에게 추적당하며, 남은 친척은 글린다를 쫓아냈다. 아마 지금 영지를 떠나면 돌아올 일이 없겠지.
"괜찮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깝지만. 내 감이 말한다. 절대 괜찮을 리 없다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맥의 질문에 에스나가 답한다.
"백룡 기사의 본부인 인테아입니다."
인테아? 거긴 또 어디지. 물어보기 위해 글린다를 바라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맥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인다. 등골이 오싹하다. 무슨 일 생길 거라고 했지. 생각보다 빨리 일어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