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061. 4막 2장 - 분노하는 마법사 (6) / Isaac
나선 계단의 끝에는 또 복도가 펼쳐져 있다. 앞으로 쭉 뻗어있는 복도 복도 복도. 꿈에 나올 것 같다. 꿈을 꾸지는 않지만.
"우와. 저 여긴 처음 올라와 봐요."
맥은 3층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내가 보기에는 1층이랑 다를 바가 없지만, 맥은 뭔가 새롭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집무실은 복도 끝에 있어요."
글린다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나간다. 지금 보니 복도가 평범하게 생기지 않았다. 횃불과 횃불의 그림자 사이에 교묘하게 안쪽으로 파여 있는 공간이 있다. 대충 지나치면 모를 정도의 작은 공간. 사람 한 명 정도만 간신히 들어가겠네. 그런 공간이 10m 정도마다 하나씩 놓여 있다.
"이건 뭐하는 공간인가요?"
맥이 호기심으로 가득한 얼굴로 질문한다.
"집무실 방어시설. 저 공간마다 석궁을 든 병사나 완전 무장 상태의 기사가 숨어 있는 거야."
괜찮은 방어시설인 것 같다. 지금의 우리처럼 천천히 걷지 않으면 사람이 들어갈 구멍이 있다는 것도 모를 거다. 이곳을 습격한 적이 달려간다면, 옆에 숨어 있던 기사의 칼을 맞고 절명하겠지. 효율성은 군사 전문가에게 물어봐라. 나는 마법사지 군사가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은 없네요."
"그러게. 하나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음. 아마 내가 다 죽여서 그럴 거 같아요. 중앙에 모였다던 기사가 이 성의 기사 전원이었을 거다. 그래도 기사가 아닌 병사는 따로 있을 법도 한데.
"뭐. 방해가 없으면 좋은 거지."
글린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복도를 걸어나간다. 집무실까지 이어져 있는 복도는 정말 길다. 이 긴 복도의 구석에서 기사들이 달려들었으면 상당히 귀찮을 뻔했다.
복도를 걷다 보니 저 멀리 문이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문. 정확히 말하면 나무문으로 보이는 무언가겠지만.
미니 맵에 벽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닿지 않아서가 아니다. 저 문 너머는 명백한 탐지 범위 외. 마법사가 죽은 지금 탐지 방해 마법은 효력을 잃은 상태. 집무실이라는 방 자체에 마법이 걸려있다는 말. 아니면 백금을 벽에 잔뜩 칠했다던가.
"그런데 백작이 집무실에 있을까요?"
"있을 거예요. 아버님은 기사는 물러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까요."
임전무퇴의 정신인가. 어느새 우리는 문 앞까지 도달했다. 맥은 몸을 떨면서 최대한 문에서 떨어져 있다. 나와 글린다는 바짝 붙어서 서로 눈빛을 나눈다.
"열겠습니다."
글린다도 긴장한 상태인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을 준다. 문을 열어젖힌다.
집무실의 모습이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살풍경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책상과 의자 문서를 꽂아 넣을 책장이 전부. 수영장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보다 놓여있는 가구가 너무나 적다.
장식이나 그림 같은 게 잔뜩 달려 있을 줄 알았는데, 무기와 갑옷이 결린 게 전부. 이런 황량한 공간 중앙에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약간의 장식이 가미된 갑옷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둘 다 챙겼다. 가슴에 그려진 방패와 검의 문장. 투구에 달린 빨간 털 장식. 어깨 부분에는 늑대로 짐작되는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아버님. 오래간만입니다."
글린다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한다. 말투도 평소와는 다르다. 정말 귀족답다고 할까? 백작은 글린다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어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마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어투가 다르다. 아마 지금의 말투가 진짜 말투겠지.
"그렇습니까? 어제는 기절해버려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우와와. 저렇게 정중한 말투로 비꼬고 있다니. 귀족들은 무섭구나. 그러고 보니 맥은? 살짝 뒤쪽을 쳐다보자 문밖에 서서 시선을 피하고 있는 맥이 보인다.
"지금 비꼬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아버님의 말씀을 비꼴 수 있겠습니까."
무시무시하다. 말투는 바뀌었어도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나는 화법은 그대로구나.
글린다의 아버지인 백작도 글린다의 화법을 알고 있는지 말을 이어가지 않는다. 글린다를 바라보던 투구가 나를 향한다.
"그대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분명 죽은 걸 확인했을 텐데."
"마법은 신비롭고 이해 못 할 것으로 가득하죠."
그렇다. 나도 내가 왜 살아났는지 원리를 설명 못 한다. 그냥 반지의 힘으로 살아났다는 것만 겨우 이해했지.
"말해 줄 생각이 없나 보군."
말해 주고 싶어도 못하는 거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지. 여긴 왜 온 건가? 그냥 빠져나갈 수도 있었는데."
글린다를 바라본다. 글린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의지가 전달되었나 보다. 그런데 무슨 의지지? 나는 의미 없이 쳐다본 건데?
이해 못 할 글리단의 행동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질문에 대답이 먼저.
"그야 당연히 저를 죽였던 대가를 받기 위해서죠. 덤으로 글린다 양을 괴롭힌 것도."
망토에 담겨있는 위압감을 해방한다. 백작은 살짝 뒤로 물러서지만,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 효과가 없는 건가?
"이건 뭐냐."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위압감에 의한 공포 자체는 느끼고 있다는 거지. 대단한 정신력이다.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니.
"뭐긴 마법이지."
백작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백작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나를 겨눈다. 검이 덜덜 떨리고 있다.
"마법사님. 그 정도만 하세요."
"네?"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글린다를 바라본다.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쩔 수 없나. 몸에 서려 있는 위압감을 지워낸다. 백작은 몇 번 크게 숨을 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들고 있던 검은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다.
"무슨 대화를 원하는 거지?"
목소리도 침착하게 돌아왔다. 회복이 상당히 빠르다. 글린다는 침착하게 백작에게 다가간다. 위험하지 않을까 싶지만, 백작에게는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왜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투수 와인드업! 정중앙 직구입니다! 글린다의 말에 백작이 몸을 움찔한다. 그 당황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백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군인이기 때문이다."
글린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군인은 자기 가족을 죽이는 사람인가요?"
말투가 바뀌었다. 정중함 따위는 어딘가에 버려두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제가 배운 군인은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존재인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지. 백작은 침착하게 글린다의 질문에 대답한다.
"군인은 가족보다 국가가 우선이다."
"그것과 제 목숨과 무슨 관계인데요? 큰뱀의 부활이나 뭐 그런 거 때문에?"
알고 있구나.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론다란트가 군대를 모으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전쟁 이후 최초의 대전이 될 것이다. 나는 그걸 막고자 한다."
"저를 죽이고 뱀을 꺼내서?"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글린다는 백작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다.
"현재 테페리의 전력으로는 론다란트를 이겨내지 못한다. 여태까지는 내부의 질서가 정리되지 않아 일부 부족만 국경을 넘어왔다. 그리고 현재 강력한 통치자를 만난 론다란트는 제국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하다."
몽골 같은 경우인가? 칭기즈 칸이 등장하기 전에는 부족으로 찢어져서 생활했었지. 강력한 통치자를 만나자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대제국을 건설했고. 금방 망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백작은 그 부분을 걱정하는 것 같다.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며 가족을 죽이려 하다. 지가 계백이야?
"그래서 날 죽이려 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것인지 글린다는 존댓말마저 그만두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이 죽는다. 준비는 미리 하는 것이다."
글린다가 어깨를 부들부들 떤다. 화를 참고 있는 거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글린다가 입을 연다.
"그렇죠. 전쟁은 미리 준비해야 하죠. 그런데 자기 딸을 죽이는 게 준비에요?"
조금 진정했는지 존댓말이 돌아왔다.
"말했듯이. 나는 군인이다. 국가에 충성하며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지."
"으아아! 말이 안 통해!"
결국, 폭발. 글린다는 발을 들어 바닥을 내려찍는다. 백작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고.
"대화는 끝인가?"
"그래 끝이다! 이 바보 아빠가!"
글린다는 소리를 치고 내 뒤로 물러선다.
"10년 만에 듣는 호칭이군."
백작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든다. 대화가 끝났으니 싸우겠다는 건가.
"마법사님! 그냥 죽여버려요!"
"후회는 없습니까?"
"없어요! 저런 대화도 안 통하는 늙은이 따위 죽어버리라지!"
글린다는 팔짱을 끼고 콧김을 뿜으며 백작을 노려본다. 백작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알았어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게요."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어내고 백작을 쳐다본다. 백작은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잡아 가슴께에 가져다 댄다. 검날은 천장을 향한다.
"나는 오스왈츠 백작, 티파나 남작, 아인카를 남작, 오니와 영주, 인터란의 수호자, 테페리의 기사, 테페리 남동부 국경수비대장, 오스왈츠 기사단의 기사단장, 아인카를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데이비드 마일 오스왈츠다."
저게 다 가지고 있는 직함인 거야? 되 게 많네. 백작은 그대로 고개를 살짝 까닥인다. 저런 식으로 소개를 해줬으면 나도 따라 해줘야지.
"나는 퍼펙트 메이지, 총천연색의 전투 대장, 드래곤 슬레이어, 절대의 연금술사, 초월자, 달을 쫓는 자, 길을 걷는 자, 시간을 뛰어넘은 자, 오일란의 성주인 아이작이다."
가지고 있는 칭호 중 소개할 만한 것을 읊어준다. 이런 멋들어진 거 말고도 인간 도살자, 죽음을 퍼트리는 자, 파괴왕 같은 소개하고 싶지 않은 이름의 칭호도 많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성이 하나 있었네.
내 소개를 잠잠히 듣고 있던 백작이 검을 늘어트린다.
"투쟁의 칼리시여, 이 싸움을 보소서. 데이비드 마일 오슬란과 아이작의 싸움을."
"공식적인 결투를 하겠다는 거에요."
상황을 이해 못 한 나에게 글린다가 설명해준다. 결투라. 남자의 로망이지. 마음에 든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에 동의하나?"
"근데 마법은 써도 되는 거에요?"
결투의 규칙을 모르므로 글린다에게 물어보자. 글린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어요. 마법을 쓰든 활을 쏘든. 그전에. 하나만 부탁해도 되요?"
"얼마든지."
글린다는 잠시 머뭇거린다. 부탁하기 힘든 건가?
"한 번에 죽여주세요."
"네?"
"마법사님은 상대를 괴롭히는 취미 있으시잖아요."
음.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글린다는 한숨을 쉰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 다시 한 번 묻겠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에 동의하나?"
"동의한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백작이 한 마디를 내뱉더니 나에게 달려든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글린다는 한 번에 끝내달라고 했지. 부탁받은 일이니 제대로 해주자.
"절대명령. 죽음."
달려오던 백작이 걸음을 멈춘다.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린다. 검이 돌 바닥에 부딪혀 작은 불씨를 피워올린다. 백작이 쓰러진다. 갑옷을 입은 무게 때문인지 쿵 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죽은 거에요?"
고개를 끄덕여준다. 초월 마법다운 능력이지. 글린다는 쓰러진 백작에게 다가간다. 쓰고 있던 투구를 벗긴다. 백작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하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죽었을 테니.
"죄송하다고는 하지 않을게요. 당신이 먼저 절 죽이려 했으니까요."
글린다는 뜨고 있는 백작의 눈을 감겨준다.
"이제 가죠."
"차원문 개방. 목표 지점. 오스왈츠 마을."
주황색 원이 생겨난다. 문밖에 숨어있던 맥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백작의 시체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차원문에 고정해둔다.
"티파나가 아니고요?"
"성의 마지막을 목격하셔야죠."
글린다는 한숨을 쉬고 차원문을 넘어간다. 맥도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차원문을 넘는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마무리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