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059. 4막 2장 - 분노하는 마법사 (4) / Isaac
걸어간다. 뒤에 시체들과 고통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글린다를 찾기 위해 걸어간다. 그래서. 글린다는 어디 있는 거지?
성안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원래는 바로 찾아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남쪽 첨탑에 갇혀 있다는 걸 빼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저기다! 마법사다!`
아직 남아 있는 거야? 미니 맵에는 빨간 점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 안 뜨는 거지. 처음에는 잘만 떴는데.
앞쪽에서 달려오는 것은 기사가 아니다. 가죽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달려오는 병사들. 어떻게 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아니면 살려야 하나.
"번개 그물."
양손을 공중에서 쥐자 그물이 손에 잡힌다. 파직 거리는 소리를 내는 번개의 그물. 그대로 달려오는 병사들에게 던진다.
병사들이 날아오는 번개 그물을 보고 멈춰 선다. 기사들이었다면 그냥 달려올 테지. 훈련 상태의 차이가 눈에 보인다.
그들이 멈춰 섰다고 던져진 그물이 멈추지는 않는다. 번개 그물이 병사들을 덮친다. 비명이 들려온다. 번개가 공기를 찢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물에 깔린 병사들의 움직임이 금세 멈춘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번개 그물이 서서히 사라진다. 어차피 이 마법은 비살상 마법이다. 죽이려면 죽일 수 있지만, 병사들까지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쓰러져서 부들거리는 병사들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지나간다. 가끔 팔 밟은 것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질풍의 발걸음은 시간이 다 되어 사라졌다. 횃불과 닫혀있는 문들을 지나친다. 도대체 남쪽 첨탑은 어디냐. 그냥 한 명 잡아서 물어봐야 하나? 일단 걷자. 사람이 보이면 잡아서 질문하는 거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나왔다. 내가 지나온 곳까지 합하면 네 갈래. 남쪽은 왼쪽이긴 한데···. 왠지 정면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감이 든다. 내 생각은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내 감은 나름 믿을 만하지.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걸어간다.
문이 달리지 않은 복도. 횃불만 타닥거리며 타오른다.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복도. 사용하지 않는 길인가?
가면 갈수록 횃불의 간격이 넓어진다. 그만큼 복도도 점점 어두워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생각대로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멀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복도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누군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벼운 소리. 갑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닌가 보군. 혼자는 아닌 것 같다.
역시나 미니 맵에는 빨간 점이 표시되지 않는다. 벗어날 수 없는 눈동자는 확실히 작동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마력 탄환. 마법 부여. 마비."
양손에 파란색의 동그란 물체가 나타난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물체. 누군가를 죽이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한 마법이지만, 다른 마법을 섞어 쓰기에는 아주 좋다.
달려오는 발소리에 집중한다. 점차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위치는 알겠다. 다가오는 사람들의 위치를 향해 마력 탄환을 쏘아낸다.
"흐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뭔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력 탄환을 튕겨낸 거야? 그보다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으악! 맥! 설마 맞고 쓰러진 거야?"
"아···. 아가씨! 도망치세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둠 건너편에서 들려온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확실하다.
"글린다 양?"
"마법사님?"
맞구먼. 이렇게 만나버릴 줄이야. 그나저나 한 명을 더 데리고 다니는 건가? 아니. 그전에 어떻게 탈출한 거지?
"광명."
머리 위에 빛을 내뿜는 구체가 떠오른다. 마법으로 움직여 앞으로 이동시킨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마력 탄환을 맞았는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남자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소년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글린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는 검을 들고 있다. 벌써 휘두르고 온 건가.
글린다에게 다가간다. 달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글린다는 앞에 있으니까.
"글린다 양. 괜찮으신가요?"
쓰러져 있는 소년을 보고 한숨을 쉰 글린다가 대답을 해온다.
"저야 괜찮죠. 그런데 마법사님. 살아계시네요? 어떻게 된 거에요?"
".... 어쩌다 보니?"
당연히 대답 못 하지. 마법 반지 덕분에 살아났어요. 천사를 만났는데 다음에는 쓰지 말래요. 웃기는 대답이다.
"저 소년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은 마법이 퍼졌는지 말도 못하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이긴 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안 나세요? 맥이잖아요."
"아. 그 성에서 같이 지냈다는?"
글린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났다. 성에 오는 길에 마주쳤던 소년.
"그나저나 뭔가 엄청 태연하시네요? 죽었다 살아나신 거 아니에요?"
"음······."
예전에 한 번 죽었다 살아나서 당황스럽지는 않네요. 어떻게 글린다는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질문하지?
"그나저나 글린다양도 별로 당황하지 않으시네요?"
질문은 질문으로 돌린다. 글린다는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성을 흔들 정도의 마법을 누가 쓰겠어요. 그리고 마법사님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잖아요?"
하하하. 그냥 웃어주자.
"일단 이 녀석 좀 깨워주시겠어요?"
맥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고 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느낌이군.
"마법 해제. 마비."
맥의 몸이 조금씩 움직인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마법이 완전히 풀리자 맥은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 그러고 보니 맥이랑 나는 모르는 사이지.
"안녕?"
왠지 맥에게는 존댓말이 나오지 않는다. 글린다한테는 바로 존댓말을 썼는데. 나와 맥이 어색하게 웃는 걸 본 글린다는 한숨을 쉰다.
"지금 그렇게 웃을 때 아니거든요? 빨리 빠져나가야죠."
"그렇네요. 걸어서 나가는 건 힘들 거 같으니 마법을 사용하죠."
나는 여기 남아서 마저 박살을 내야 하니 차원 문을 열자. 티파나 정도면 안전하겠지?
"차원문 개방. 목표 지점. 티파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법사님?"
"어···. 이게 마법인가요?"
글린다와 맥이 나를 바라본다.
"음. 다른 마법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누군가 공간 억제를 사용했다. 아마 탐지를 방해하는 마법도 썼을 거다. 그러니 미니 맵에 빨간 점이 안 나타나지. 누군지는 몰라도 꽤 강한 녀석이다.
"그럼 걸어가야 하나요?"
"그렇죠. 뭐."
글린다는 한숨을 쉰다. 맥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그럼 빨리 가죠. 여기 오래 있기 싫어요."
그렇겠지.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 하니까. 오래 있고 싶어하는 쪽이 더 이상하다.
"아가씨. 같이 가요!"
먼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글린다를 맥이 쫓아간다. 멀어져 가는 둘을 바라보다 그 뒤를 따라 걸어간다.
머리 옆에 떠 있는 빛나는 구체가 어두운 복도를 밝힌다. 어느 정도 마법에 익숙한 글린다는 앞만 보고 걷지만, 맥은 계속 곁눈질로 구체를 바라본다. 저러다 넘어지는 거 아닌지 몰라.
역시나. 맥은 약간 튀어나온 바닥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휘청거리며 넘어진다. 글린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맥을 바라본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
"죄송합니다."
글린다의 질책에 맥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난다. 대충 저 둘의 관계가 보이는군.
벽에 설치된 횃불의 수가 늘어난다. 갈림길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야기. 저기 네 갈래 복도가 보인다.
"힉. 저 사람들 죽은 건가요?"
맥은 눈이 좋은 편인지 쓰러진 병사들이 보이나 보다. 번개 그물에 맞아 기절한 사람들이 말이다.
"기절한 상태야. 한 시간 정도면 깨어날걸?"
"여기서 오른쪽이에요."
글린다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한다. 오른쪽 복도도 다른 복도와 마찬가지로 문과 횃불들로 가득하다. 미니 맵이 없었으면 진작에 길을 잃어버렸겠군.
"저기다!"
앞쪽에서 병사들이 달려온다. 가죽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로. 숫자는 열 명 정도? 앞서 걸어가던 글린다와 맥이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춘다.
"제가 처리하죠."
"그럴 필요 없지 않을까요?"
앞으로 나서려는 나를 글린다가 막아선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늘어트리고 당당하게 어깨를 편다. 달려오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춘다. 글린다를 바라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표정에서 당황이 새어 나오고 있다.
"아가씨?"
대표자로 보이는 사람이 창대를 늘어트리며 물어본다.
"뭐야? 내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거야?"
병사들 사이의 동요가 퍼져나간다. 대충 상황은 알겠다. 침입자를 무찌르러 왔는데 자신들이 섬기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당황스럽지.
"무기 안 내려놔? 나한테 지금 창 겨누는 거야?"
글린다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다. 병사들은 눈치를 보더니 겨누고 있던 창대를 땅으로 늘어트린다.
"아가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표자가 창을 옆 사람에게 맡기고 앞으로 나온다. 물음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묻지 말고 비켜."
오. 박력 넘쳐. 병사들이 몸을 움찔한다. 맥도 글린다의 명령에 몸을 떤다. 너도 저런 상황에 몇 번 처했었구나.
"하···. 하지만. 백작님께서 침입자를 잡으라고······."
"내가 침입자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나를 막는 건데?"
"그···. 아가씨 뒤에······."
"내 손님이거든? 저 사람들이 침입자라는 거야? 그럼 나도 침입자겠네?"
"아니···. 그건 또 아니고···."
글린다 완전 무서워. 열 명이 넘는 성인 남자를 말과 기백으로 압도하고 있다.
"얼른 비켜!"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당장 비켜!"
병사들이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글린다는 걸음에 힘을 싣고 병사들에게 다가간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친다.
"아가씨. 완전 무서워."
옆에 있는 맥이 중얼거린다. 그래. 좀 무섭긴 하지.
"다시 말한다. 비켜."
병사들이 양옆으로 물러서 길을 터주었다. 열 명의 남자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여자아이에게 진 거다.
"역시 병사들은 다 성 밖으로 내쫓아야 했어."
갈라진 틈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공간 너머로 보이는 검은 망토의 남자. 마법사다. 그것도 꽤 강력한.
지금 성안에 걸려있는 공간 억제와 탐지 방해도 다 저 남자의 작품. 레벨은 700 이상으로 추정. 맥발라에서 보았던 방랑 마법사와 비슷한 정도.
"마법사님!"
병사들이 그 남자를 보고 마법사님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 이름으로 불리는데. 부르는 호칭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글린다는 걸음을 멈추고 마법사를 바라본다. 마법사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 점차 다가온다.
"일단 명령을 거역한 사람부터 처분해볼까?"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강한 불안감을 느낀다. 글린다가 위험하다.
"칼날 회오리."
"마법 방패."
글린다의 앞에 푸른빛으로 빛나는 방패가 나타난다. 마법사를 중심으로 칼바람이 회오리친다. 점차 퍼져나가는 칼날 같은 회오리는 방패를 뚫지 못한다. 그리고 마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병사들의 목은 회오리바람에 잘려나간다.
"히이익!!!"
맥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뒤집고 뒤로 넘어간다. 다행히 중간에 붙잡았지. 이런 장면은 너무 과격했나.
"그쪽도 마법사인가 보군."
"일단은."
기절한 맥을 땅에 눕혀놓으며 대답한다. 그동안 글린다는 재빠르게 내 뒤에 자리를 잡는다.
"왜 죽인 거지?"
"뭐를?"
"병사들. 왜 죽였지?"
저 정도 되는 실력자면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방법이 많다. 아니 제압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물러서라고 하면 물러설 사람들이었을 테니.
"재미있으니까."
마법사가 웃는다. 와. 미친놈. 살려두면 안 되겠네. 넌 오늘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