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058. 4막 2장 - 분노하는 마법사 (3) / Isaac
구덩이에 갇혔던 녀석이 말하길 글린다는 남쪽 첨탑에 갇혀 있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지 몰라서 물어보려 했는데 기절했다. 다리가 부러진 고통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묻어 버렸다.
일단 남쪽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쪽으로 움직이자. 미니 맵에는 방위를 알려주는 기능도 있지.
남쪽이라. 무너진 복도 건너편이군. 다시 건너가야 하는 건가. 어쩔 수 없네. 유령화를 사용해서 돌무더기를 건너간다. 조금 전에 처리한 기사들의 시신이 보인다. 오래 봐서 좋을 건 없으니 빨리 지나가자.
갈림길에서는 기사들이 걸어왔던 방향을 선택한다. 다시 기다란 복도가 나타난다. 끝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벽에는 나무문이 주르륵 놓여있고. 가끔 걸려있는 횃불의 모습도 보인다.
미니 맵에 특별히 나타나는 빨간 점은 없다. 근처에는 없는 건가? 아니면 뭔가에 가로막혀 탐지를 못 하는 건가.
"이봐 거기!"
탐지를 못 하는 거군.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빼 든 상태로 다가온다.
"아까 무슨 소리 못 들었나?"
나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구나. 기사는 아직 무너진 복도를 보지 못한 거 같다. 그럼 조금 이용해 볼까.
"못 들었습니다. 기사님."
"그런가."
기사는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낀다. 들고 있던 검도 허리에 찬 검집에 집어넣는다. 나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훈련 상태 너무한 거 아니야?
"넌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여유 인원은 다 중앙으로 모이라고 했을 텐데."
왠지 사람이 안 보이더라. 왜 다 중앙으로 모이라고 했을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넘어가자. 글린다를 찾는 게 우선이다.
"백작님께 남쪽 첨탑 상황을 보고 오라고 명을 받아서 말입니다."
기사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걸어온 쪽이 남쪽 첨탑인데. 너 정체가 뭐냐?"
"몰라. 묻지 마. 뼈 화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을 사용한다. 투구를 쓰지 않은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뼈 화살. 기사는 고개를 움직여 피한다. 그대로 나를 발로 찬다.
대비하지 못한 사태다. 기사의 발에 차여 뒤로 날아간다.
"하늘 걸음."
마법으로 공중에 발을 디디고 땅에 내려앉아 균형을 잡는다. 내 방어력에 미치지 못하는 공격인지 아프지는 않다. 그냥 좀 놀랐을 뿐.
"너 뭐냐."
기사는 검을 뽑아든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도 다시 쓴다. 완전 무장상태의 기사가 나를 노려본다.
"다시 묻는다. 넌 정체가 뭐냐."
대답해주자.
"나는 너희들의 죽음이어라."
손에 화염구를 만들고 그대로 던져버린다. 기사는 갑옷을 입은 사람치고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화염구를 피해낸다. 이런 게 진짜 기사란 건가.
기사는 곧바로 자세를 잡고 나에게 달려든다. 순간 반응을 못 했다. 검이 목 앞에 놓여 있다. 차갑고 뾰족한 검이 목에 닿는다.
"켁."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목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많이 아프다. 기사는 위험한 존재구나. 잠깐만. 나 검에 목이 안 뚫리는데 그때는 어떻게 죽은 거지? 안 죽었어야 정상 아닌가? 나중에 생각하자. 기사의 공격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에서 놓쳤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눈으로 좇고 있다. 몸도 어떻게든 반응해서 피하고 있다. 왠지 에스나랑 싸울 때가 생각나네.
"껑충 뛰기."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마법을 뽑으면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한다. 몸이 붕 날아올라 뒤쪽으로 이동한다. 기사는 갑작스레 벌어진 거리에 당황하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기사라는 존재를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힘들겠다.
"방황하는 어린 양."
마법이 시작된다. 기사의 머리 주변으로 몽실몽실한 털의 작은 양들이 돌아다닌다. 기사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게 뭐냐."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는 달리 멀쩡한 정신으로 나에게 질문해온다.
"그거? 재미난 마법이지.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지?"
나에게 다가오려는지 발걸음을 옮기지만, 몇 걸음 떼지 못해 무릎을 꿇고 넘어진다. 방황하는 어린 양. 몸을 명령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마법. 효과는 보다시피 상당한 편. 서 있는 것마저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마법이다.
주저앉은 기사는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 손으로 땅을 짚으려 하지만 옆으로 미끄러진다. 손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상태다.
기사에게 다가간다. 쓰고 있는 투구를 벗긴다. 기사는 증오로 불타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뭘 그렇게 봐?"
"너···. 정체가 뭐야!"
"말했듯이."
손에 화염구를 만들어 낸다.
"나는 너희들의 죽음이어라."
화염구를 기사에게 던진다. 피할 수 없는 기사는 그대로 화염구를 맞는다. 기사의 몸이 불타기 시작한다.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나를 끝까지 노려보며 이를 간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마법의 불은 사람 하나를 재 조차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태워버렸다. 명복은 빌어주지 못하겠다. 남쪽 첨탑이 있다는 방향을 바라본다. 바로 가기에는 약간 부담된다. 정비가 필요하다.
"불러오기. 바다 왕국의 아름다운 별."
손에 푸른빛을 내뿜는 검은 반지가 나타난다. 검은 날개에 갇혔을 때 해독 반지를 끼기 위해 빼었던 물건이다. 마나 최대치를 올려주는 반지. 비어있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는다.
준비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기사와 제대로 싸워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적당히 하면 생각보다 살아남기 힘들 거 같다. 최선을 다해야한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죽는 건 더 좋아하지 않으니까.
"마력 해방."
몸에 고양감이 넘쳐난다.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마법 효율을 희생시켜 마나 최대치를 늘려주는 마법. 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은 마법 효율은 12%. 1대 10 비율로 바뀌는 마법 특성상 내 마나 최대치는 120% 증가했다.
"마법 고정. 순환하는 의지. 강철의 의지. 강철 체력. 거인의 힘. 맹수의 눈길. 방어력 향상. 수호 의지. 꺾이지 않는 신념. 위대한 자의 수호. 자연의 보호. 날뛰는 마나. 폭발하는 분노."
온갖 마법들이 나를 휘어 감는다. 마력 해방으로 증가했던 마나를 다 사용했다. 이게 나의 최대 전력.
마법 고정은 좋은 마법이다. 뒤이어 사용하는 마법들을 직접 취소하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해준다.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는 최고다. 강화 마법들로 방어력과 공격력을 둘 다 챙긴다. 이게 랭킹 1위를 유지하던 상태의 나. 기사들도 기습적인 공격도 나에겐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 가 볼까?"
흥분감이 몸을 감싼다. 이 상태로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사가 알려준 남쪽 첨탑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빨리 글린다를 구하고 성을 무너트리자. 무너트린 다음은······. 음······.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로.
복도의 모퉁이를 돈다. 또 주르륵 놓여있는 문들. 하아. 여긴 왜 이렇게 복잡해? 여기서 남쪽 첨탑을 어떻게 찾지. 일단 걸으면서 생각해보자. 어딘가에는 첨탑으로 올라가는 일이 있겠지.
횃불의 빛으로 비치는 어두운 복도.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앞에 있건 문이 갑자기 열린다.
"어?"
"어?"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 표정에는 놀람과 당황. 내 얼굴도 다르지는 않겠지. 놀라서 반응하지 못했다. 둘 다 멍청하게 서로를 보고만 있다. 먼저 반응을 한 건 내 쪽이 아니다.
"침입자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고함. 이건 분명 성 전체에 들렸다.
"어디냐!"
"무슨 소리야!"
역시나. 사방에서 고함과 발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지나가기는 글렀군.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다 박살 낼 생각이었으니 처리하면서 지나가자.
"화염의 꽃."
검을 뽑으려는 기사의 갑옷에 꽃망울이 나타난다. 불꽃의 꽃망울이 활짝 꽃잎을 피우고, 펑. 터져나간다. 기사의 갑옷이 부서지고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폭발에 휘말린 기사는 뒤로 붕 날아 바닥에 굴러버린다.
"저기다!"
복도 뒤편에서 달려오는 기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완전 무장 상태. 숫자는 다섯. 거리가 있으니 큰 마법도 가능하다. 한 번에 처리하자.
손을 뻗는다. 방법은 간단. 저 부분을 붕괴시키면 된다. 설마 저 위에 남쪽 첨탑이 있어서 글린다에게 피해가 가거나 하지는 않겠지?
"부분 붕괴."
건축물로 구분된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한 마법. 효과는 이름 그대로 무언가의 부분 붕괴.
달려오던 기사 머리 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돌과 흙더미가 쏟아져 내린다. 그 밑에 있던 기사들을 그대로 깔린다. 진동과 큰 소리가 퍼져나간다. 이건 또 이거대로 문제가 있네. 일단 달리자. 복도를 달리다 보면 글린다를 만나겠지.
"질풍의 발걸음."
발에 바람이 실린다.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간다. 양옆으로 문과 횃불들이 빠르게 지나쳐간다.
"저기! 쫓아라!"
뒤쪽의 문을 열고 기사들이 나타난다. 중무장한 상태인 두 명의 기사. 부분 붕괴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긴 편이다. 다른 방법도 넘치긴 하지만.
"압살."
기사들이 그대로 땅에 처박힌다.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리듯 갑옷도 찌그러진다. 더 보고 있진 말자. 사람이 짓눌려서 터지는 걸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리가 없잖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간다. 복도가 왼쪽으로 꺾인다. 몸을 돌려 땅을 박차고 나간다.
"잡아!"
"죽여!"
앞에는 한 무리의 기사들. 열려있는 문과 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 저기가 중앙인가. 엄청 많기도 하다.
열심히 움직이던 다리를 멈춰 세운다. 기사들은 방진을 세우고 나를 노려본다. 방패를 치켜세우고 한 발짝씩 다가온다. 마치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벽을 부수는 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지.
"대폭발."
기사들의 벽 중앙에 빨간 불꽃이 생겨난다. 점차 커져 나가는 불꽃에 기사들이 동요한다. 그래도 대형을 유지한다. 어떤 마법인지 모르나 보다.
점점 커지던 불꽃이 터진다. 기사들의 중앙에서. 그 폭발에 휘말린 기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벽과 바닥에 부딪히는 금속 갑옷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폭발에 성이 흔들린다.
열 명 정도의 기사가 그대로 터져나가서 죽었다. 다섯 명 정도는 벽에 부딪혀서 죽었다. 남은 기사들은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흘린다. 똑바로 서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다.
바닥을 뒹구는 기사들 사이를 걸어나간다. 매캐한 탄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살려다라는 외침과 신음이 귀를 자극한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거기···. 서···."
뒤쪽에서 기사 하나가 검을 들고 일어선다. 방패를 들고 있는 손은 부러졌는지 힘없이 축 처져있다. 그럼에도 눈빛만은 살아있다. 절대 나를 보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있다. 정말 멋진 모습이다.
"뼈 화살."
손에서 날아간 뼈 화살이 기사의 머리를 뚫고 지나간다. 멋있는 건 멋 있는 거고. 방해된단 말이야.
이제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글린다를 구하러 가자. 전투 가능 인원은 대충 다 처리한 거 같으니 방해될 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