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055. 4막 1장 - Over the Death (2) / Isaac
인긴이 만들어낸 화면 속의 나는 쓰러져 있다. 목이 벌어진 채로 죽어있다. 어딘가의 돌 침대에 올려진 상태로.
"놀랐나?"
"아니요. 뭐. 제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좀 놀랐다. 내 시체를 내가 바라보다니.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다시 살아날 예정이지만.
"저긴 어딘가요?"
"오스왈츠 성의 지하 시설. 주로 사람을 해부하고 필요한 마력을 추출하는 곳이지."
으엑. 딸을 데리고 온 우리를 죽일 때부터 수상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런 짓까지 하다니.
"아! 글린다는 어떻게 됐죠?"
"같이 있던 그 여자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긴이 손가락을 튕기자 화면이 바뀐다. 화면 속에 글린다의 모습이 보인다. 흰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다. 주변의 살벌한 풍경을 보니 어딘가 갇혀있는 건가.
"어떤 상황인지 질문해도 되나요?"
"긴 대답을 원하나? 아니면 짧은 대답을 원하나?"
"짧은 대답이요."
인긴에게 긴 대답을 들으려면 날 샌다. 분명하다. 말 못하는 사람은 짧게 말을 해야 좋다. 봐봐. 짧은 대답을 하는데도 고민을 하잖아. 긴 대답은 오늘 못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인긴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글린다의 몸속에 뱀이 들어있네."
한숨이 나온다. 너무 짧잖아. 앞뒤 내용 다 잘라먹고 설명을 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뭔가 부족한가?"
"자기가 한 말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질문합시다."
인긴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생각에 잠긴다. 아 또 저래. 인긴과는 대화를 나누기 힘들구나. 한참을 생각하던 인긴이 다시 입을 연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군.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그대가 알고 있는 지식에 차이가 심각하다는 걸 잊고 있었네."
그렇겠지. 일단 저쪽은 초월자라고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니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우선 로테리아에 대한 기본 상식부터 채워야겠군."
로테리아? 아. 내가 지금 있는 세계가 로테리아지. 대기록원에서 들었던 이름.
"로테리아는 자네의 고향인 지구와는 다르지. 인간이 아닌 지성체들이 있거든."
오오. 진짜 판타지 세계군. 아직 본 적은 없지만, 계속 살다 보면 만날 수 있겠지?
"우선 지성체에 대해 알아야겠지. 지성체라 함은 영, 혼, 육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하지."
영, 혼, 육. 이전에 들었던 설명이지.
"그럼 당신도 지성체인가요?"
인긴은 고개를 젓는다.
"초월자는 지성체라 부르지 않네. 육과 혼이 없기 때문이지. 초월자들은 영체라고 불린다네."
그렇군. 솔직히 별로 관심은 없었다. 그냥 퍼뜩 떠올라 물어봤을 뿐이지.
"본론으로 돌아가죠."
"그러도록 하지. 자네 용에 대해 들은 적 있지?"
지금은 죽은 오손이 이야기해줬었지. 큰뱀강에 살던 큰뱀이 용이 되어 올라갔다고. 그런데 큰뱀이 살아서 큰뱀일까, 큰뱀강에 살아서 큰뱀일까.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이 떠오른다.
"그래. 그 용 말하는 걸세. 그런 식으로 로테리아에는 다른 지성체들이 살고 있지."
"용도 지성체에요?"
"지성체지. 용이 되기 전인 큰뱀도 지성체라고 부르고."
용이 인간이랑 같은 등급이라니. 이 로테리아라는 곳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중요한 건 아니니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오스왈츠 옆의 큰뱀강에는 실제로 용이 된 큰뱀이 살았었지."
그 전설이 실제였구나. 그럼 지상에 봉인되었다는 뱀도 진짜인가?
"바로 그렇다네. 그리고 그 뱀이 글린다라는 아이의 몸에 봉인된 거지."
그게 뭐야.
"어찌 되었든 그 아이의 몸에 뱀이 깃들어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뱀을 깨우기 위한 일을 할 예정이고."
"뱀을 깨워요? 그전에 어떻게 글린다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거죠?"
이런. 질문이 너무 많았다. 인긴은 다시 대답하기 위한 고민에 빠진다. 한참을 고민하던 인긴이 겨우겨우 입을 연다.
"비인간, 그중에서도 인간보다 강한 지성체의 봉인은 인간의 육을 입는 형태가 대부분이지. 용이 되지 못한 뱀도 같은 방식으로 봉인된 걸세."
역시 인긴은 설명에 재능이 없다. 어디 웅변학원 같은 게 있으면 좀 배웠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봉인이란 건 옛날 일 아닌가요? 왜 글린다의 몸에 있는 거죠?"
"로테리아의 시간으로 2천 년 정도 된 이야기지. 그동안 뱀은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육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봉인이 되어있는 걸세."
"이번에는 글린다 차례고?"
"그냥 운이 나빴던 걸세. 하필이면 뱀을 모시는 사람의 딸로 태어나다니."
"뱀을 모셔요?"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훨씬 강한 존재를 섬기지. 오스왈츠 가문은 대대로 큰뱀강의 용을 섬기던 사람들일세."
글린다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뱀을 깨운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요?"
"말 그대로 인간의 몸속에 잠든 뱀을 깨우는 거지. 데이비드는 뱀을 깨워 그 힘으로 자신의 적을 부수길 원하네."
데이비드? 그건 또 누구야?
"현 오스왈츠 가문의 가주일세."
글린다의 아버지를 말하는 거군. 이름이 데이비드라. 뭐랄까 상당히 흔한 이름 같다. 그냥 그 사람이 싫어서 느끼는 걸 수도 있고.
"바깥 상황 설명은 이게 끝일세. 뭔가 더 궁금한 게 있나?"
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죽어서 성 지하에 있는 상태다. 글린다는 성 어딘가에 갇힌 상태고.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없는 거 같아요."
"좋아. 그럼 다음 일정에 관해 물어보지."
소을이 써 준 종이에 그렇게 적혀 있었지. 다음 일정이라···.
"일단 글린다를 구한다?"
"으음."
인긴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끄덕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 오스왈츠 가문을 박살 낸다?"
"박살 낸다고?"
"네. 안 되나요?"
인긴은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안 되는 건가? 그냥 대 때려 부수고 싶은데. 나를 공격한 사람을 그냥 놔주는 취미는 없다.
"안 될 건 없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자네는 자네가 가진 힘을 좀 더 명확히 알 필요가 있겠군. 이런 건 설명 진짜 못 하는데."
그럼 안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인긴은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뭔가 대화를 하려면 중간에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한참을 고민하던 인긴이 입을 연다. 체감시간으로 5분 정도 걸렸다.
"자네는 자네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나?"
"조금 정도?"
인긴이 고개를 끄덕인다. 뭔지는 몰라도 말해보라는 의미인 거 같다.
"아마 세계 최강이 아닐까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쉽게 죽었지만."
나도 모르게 목을 만지고 있다. 손을 자연스레 무릎 위에 얹는다.
"세계 최강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하네. 자네가 가진 마법들, 물품들, 능력들은 세계 자체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지."
"그 정도인가요?"
인긴이 한숨을 쉰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중에는 로테리아의 과학력와 마법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들이 많네."
"골렘 같은 거?"
"로테리아의 기술력으로는 못 만드는 거지."
그렇군.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나는 지구 입장으로 생각하면 외계인 같은 거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아득히 뛰어난 과학력으로 무장한 존재. 위험하겠군.
"덤으로 경제도 순식간에 파탄 낼 수 있지."
"경제를요?"
인긴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가 얼마를 가지고 있지?"
"9,000억 넘게요. 아."
"개인이 그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 경제가 파탄 나는 건 순식간이지."
돈을 쓰는 것도 자제해야겠군. 최대한 로테리아에서 번 돈을 써야겠다. 요정 잡이 같은 거로 돈 벌면 되겠지?
"그러므로 앞으로도 자제하며 살아주게."
"걱정 붙들어 매시죠.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취미가 아닌 사람이 성 하나를 박살 내겠다고 말하나?"
아. 그러네. 성을 하나 박살 내는 건 큰일이지.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뭐 성 하나 정도는 괜찮다네. 그 정도는 로테리아의 마법사도 가능한 일이니."
"그렇군요. 그럼 어느 정도의 일을 하면 안 될까요?"
"나라를 부수지는 말게나."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도?"
인긴이 한숨을 쉰다. 대답이 시원찮아서 미안하다.
"좋아. 일단 아까의 질문을 계속하도록 하지. 오스왈츠 가문을 박살 낸 다음은 무얼 할 건가?"
..... 음. 생각해본 적 없다. 사실 나는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언제까지고 살아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계획을 세우는 일도 거의 없었지. 끽해야 내일 뭘 할지 정도를 생각하는 정도.
지금은 다르다. 어느 정도 생존이 보장되어 있다. 백작한테 당한 것처럼 멍청한 짓만 하지 않으면 말이야. 계획은 필요하겠군.
"그 뱀이란 거 언제까지 글린다 속에 있는 건가요?"
"1년 정도 더 있을걸세. 그다음에는 어딘가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몸에 깃들 테고."
"그럼 1년 동안 글린다를 보호합니다."
인긴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보면 인긴은 고개를 자주 끄덕인다. 버릇 같은 건가.
"나쁘지는 않군. 그다음은?"
"어······. 거기까지 생각해야 하나요?"
"자네는 로테리아에 엄청 위험한 존재일세. 그런 존재가 어떻게 움직일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지."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사실 로테리아에 예정에 없이 갑자기 나타난 거라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글린다라는 피보호자도 데리고 있었고.
"생각이 필요해 보이는군."
"네. 좀 많이 필요할 거 같네요."
"지금 꼭 대답할 필요는 없네. 나중에 생각이 나면 알려주게."
에?
"그런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얼굴을 만져본다. 확실히 이상한 표정이다.
"연락할 방법이 있나요? 그 초월자라는 거 만나기 힘든 거 아니에요?"
"일반적으로는 만나기 힘들지."
인긴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라고 할 건 공허밖에 없지만.
"말했듯이. 자네는 특별관리대상일세. 필요하면 눈을 감고 아무 초월자나 불러보게. 자네에게 관심이 있는 존재라면 바로 응답을 할 걸세."
뭔가 상당히 대충대충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다. 눈을 감고 불러보라니. 아무나 불러보라니. 무슨 콜센터도 아니고.
"어찌 되었든 더 질문할 건 없나?"
"일단은요."
"그럼 돌아갈 때가 되었군."
인긴이 글린다를 비추고 있는 화면을 사라지게 한다.
"그냥 돌아가는 건가요?"
"걱정하지 말게.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정도일걸 테니."
인긴이 손을 뻗은 채로 나에게 다가온다. 약간 불안하다. 인긴의 손이 눈을 가린다. 인긴의 모습이 사라진다.
"죽음의 지배자. 살아있는 것들을 돌보는 자. 삶과 죽음의 위대한 순환의 굴레. 그 모든 것의 이름을 가진 인긴으로서 명한다."
뭔가 엄청난 주문이네.
"인간 아이작은 새로이 깨어나리라."
인긴의 손바닥에서 빛이 일어난다.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난다. 이제 나는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