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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053. 4막 서장 - 기사와 소년 / Glinda (53/65)



〈 53화 〉053. 4막 서장 - 기사와 소년 / Glinda

기사는 지키는 자. 싸워나가는 자. 수호자. 피를 흘리는 자. 그리고 오롯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

- 기사왕,  레베르티 -




마법사가 죽었다. 내가 보는 눈앞에서. 목에서 피를 흘리며.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죽어버렸다. 그것도 아버님이 죽였다. 나를 구하고  사람을 죽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마법사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도 없다. 나는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다. 알 수 없는 흰 드레스를 입은 채. 이런 건 신부한테나 입히는 건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신발은 하얀 단화. 몸을 만져보니 속옷은 입고 있던 그대로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일단 생각하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생각해야 해. 지금 나는 갇혀 있다.  어딘가에. 침대 하나만 겨우 들어오는 작은 방. 창문도 없다.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입고 있는 드레스가 불편하다. 마법사가 줬던 망토와 신발은 빼앗겼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단검도 빼앗겼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없어졌다.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한다······.

씨발! 개 같은 것!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으아아아아아!!!


침대에 엎어져서 천장을 바라본다. 뭔가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다. 자꾸 이상한 말 중얼거리고. 했던 말 또 하고. 머리가 아프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몇 번 한  같지만, 다시 정리하자. 마법사는 죽었고, 나는 갇혔다. 아버님이 나를 가두었다. 왜?

설마 나를 습격한 것도 아버님이 시킨 건가?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러면 식당에서 죽었겠지. 아직 내가 필요한 거다. 그래서 나를 가두고 있는 거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흥분이 가라앉자 몸이 반응을 시작한다. 난 갇혀 있다. 이유도 모른 채로. 날 지켜주던 사람은 죽었다. 눈물이 흘러나온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지금보다 무서웠던 적이 있었었나?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다리를 끌어안아 감싼다. 아무것도 할  없다.

누군가 철문을 두드린다. 뭐지? 누가 오는 거지? 이제 내가 죽을 차례인 거야?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본다.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맥?"

맥은 입가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손으로 입을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온다.

"아가씨.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을  같아?"


내 대답에 맥이 맥없이 웃는다.

"여긴 어쩐 일이야. 몰래 온 거야?"

"백작님이 식사를 전하라고 하셔서."

칫. 맥이 뒤에 숨기고 있던 보따리를 건네준다. 풀어보니 안에는 샌드위치가 가득. 마지막 만찬이 이런 거라니.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입에 집어넣는다. 제기랄. 맛있다. 맛있다는 게  짜증이 난다. 상황이 이런데 맛있게 느껴지다니. 으아아! 짜증 나!


손에 집히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입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맥이 보인다. 어쩌라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서  먹으면 폭발할 거 같아.

"엄청 잘 드시네요."

"불만 있어?"


"설마요."

맥은 또 맥없이 웃는다.


보따리의 샌드위치 스무 개는 전부 사라졌다. 내 뱃속으로.  기분이 나아졌다. 침착하게 생각을 할  있겠다.

"너. 알고 있는  있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맥이 몸을 움찔거린다. 눈이 사방팔방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냥 찔러본 건데 알고 있는 게 있구나.

"똑바로 말해. 알고 있는 거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맥에게 다가간다. 맥은 내가 다가갈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아가씨 그렇게 말씀하셔도······."

"얼른!"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맥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간다. 뒷걸음질 치던 맥의 등이 벽에 닿는다. 좁은 방이니 당연하지.


"알고 있는 거 당장 말해!"

"히이익!"

맥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예전부터 맥은 내가 강하게 압박해 들어가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지. 그러면 내가 괴롭히는 걸 그만뒀으니.

역시나 맥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봐주지 않는다. 주저앉아있는 맥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다. 맥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말해!!!"

"흐에엑! 말할게요! 무서워요! 그만해주세요!"

맥은 공포에 질려 소리 지른다. 제정신이 아니다. 손을 올려 뺨을 후려친다. 맥의 울음이 멈춘다.

"진정하고 똑바로 말해."

맥의 고개가 위아래로 미친 듯이 움직인다.


"그럼, 말 해봐."

맥은  번 심호흡하고 입을 연다.

"사실 어쩌다 엿듣게 된 겁니다. 정확한 내용은 몰라요."


그렇겠지. 맥이 뭐라고 이런 일의 중요한 내용을 알고 있겠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열흘 전에 백작님 방 옆을 지나가다 들은 겁니다. 아가씨가 납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죠."

침대에 걸터앉아 자세를 잡는다. 이런 이야기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들으려면 자세가 편해야지.

"그게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인데···."

잔뜩 긴장한 맥은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아가씨의 몸에 뱀이 들어있데요."


"엑?"


그게 무슨 소리야?  몸에 뱀이 들어 있다고?

"큰뱀 강 전설 알고 계시죠?"


오스왈츠 마을 옆에 흐르는 강에 있는 전설. 강에 살던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는 전설. 그 동생은 용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땅에 봉인되었다고 하지. 잠깐.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에요. 아가씨 몸에 승천하지 못한 뱀이 깃들어 있데요."


......어······. 음······. 으흠······. 응?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아니에요. 엄청 심각한 상황이라고요!"


그렇긴 하지. 내 몸에 뱀이 들어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어디 들어 있는 거지?


"그렇게 몸 더듬지 마세요! 이상하잖아요!"

"어?   여자로 보고 있어? 맥 주제에 대단한데?"


"아가씨 진짜 싫어!"

역시 맥은 놀리는 맛이 있다. 그래도 조금 자제하자. 지금은 맥을 놀리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계속 이야기해봐. 내 몸에 뱀이 들어 있고 그다음은?"

지금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백작님은 아가씨 몸에 있는 뱀을 깨우려고 하고 있어요. 봉인을 푼다고 해야 하나?"

아. 이야기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가씨를 제물로 바쳐서 뱀을 부활시키겠데요! 아가씨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잔뜩 흥분한 맥이  손을 붙잡는다. 얼굴 가깝다고! 가까이 붙은 맥의 얼굴에 머리를 박는다. 맥은 코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진다.


"맥 주제에 너무 가까이 붙었어. 이야기나 계속해봐. 거기서 끝은 아니지?"

맥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진정을 시도하듯 심호흡을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아가씨를 납치한 사람들은 백룡 기사래요."


 에스나란 사람이 백룡 기사였지. 엄청 엉성해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가씨 몸속의 뱀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래요."


그래서 납치하고 사람을 죽이려고 해? 그것들도 완전 개자식들이잖아! 뭐. 아버님보다는 조금  개자식인 것 같지만.


"결국엔 아버님이 날 죽이려고 하는 거네?"

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고  팔자야. 납치도 당하고, 죽을 뻔도 하고, 여러 가지 난관을 거쳐 집에 돌아왔더니 이제 아버님이 날 죽이려 하네.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옆구리에 검집을 차고 있는 기사가 들어온다. 누구는 쓰고 있지 않았지만, 갑옷을 빈틈없이 착용하고 있다.


"이제 갈 시간입니다. 아가씨."

뭐야. 그래도 꼴에 기사라고 아가씨라고 불러주네. 나를 잡으러 온 녀석이다. 칼을 뽑을  같지는 않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부탁한다고 내보내 줄  같지도 않다.

"꼬맹이 너는 얼른 나가라."


기사는 맥을 바라보며 말한다. 맥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기사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한다. 그래도 맥은 움직이지 않는다.

맥은 나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 눈에는 뭔가 강한 결의가 깃들어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아···. 아가씨는 내가 지킨다!"

맥이 내 앞에서 양팔을 펼친다. 나와 기사 사이를 막아선다. 우와.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 그렇게 하면 엄청 멋있을 거 같은 거야? 내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나설 때가 아닌 거 같아. 기사 놀이는 졸업할 나이 아니니?

기사는 맥을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그렇지.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지. 웬 꼬맹이가 자기 앞을 가로막는데.


"이봐 꼬맹이. 얼른 안 꺼지면 큰코다칠 줄 알아."

맥은 기사의 호통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어깨는 덜덜 떨리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좀 남자다울 때도 있네.

기사는 한숨을 쉬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휘둘러서 맥을 후려치려는 거겠지. 강철 장갑을 낀 채로 평범한 사람의 뺨을 후려치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맥을 쉽게 죽게 둘 생각은 없다.


휘둘러지는 기사의 손에 맞추어 맥의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손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기사의 눈에 당황이 역력하다.

"미안한데. 이 꼬맹이가  첫 키스 상대라서."


"으아아! 아가씨!"

다섯 살 때 일이지만. 기사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책으로 읽었었지. 거기 키스하는 묘사가 있어서 해보고 싶어서 했다. 맥은 놀려먹기 좋은 상대니까.

강하게 팔을 휘둘러 비어있는 기사의 품에 파고든다. 맥은 한구석에 던져두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낸다. 기사가 막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이미 칼은 기사의 목을 뚫고 지나간 상태였다.


"컥. 컥."

기사의 목에서 피 거품이 치솟는다. 목에 박혀 있는 검을 뽑는다. 피가 터지듯 뿜어져 나온다.


"아.  묻었네."

"아···. 아가씨?"

맥은 내 침대에 주저앉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저런 바보가 아까는 어떻게 나섰지?


"가자."

"네?"

"난 여기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거든."


"네?"

"아. 진짜! 성에서 도망치자고!"

"아가씨랑 저랑요?"

"그래 이 멍청아!"


"어···. 어······."


우와. 이 답답이. 한숨을 내쉬고 맥의 손을  잡는다. 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멍청아. 맥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간다. 조금 전에 죽은 기사는 보안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군. 도대체가 기사들 훈련을 어떻게 하는 거야.

방 밖에 보이는 것은 계단. 아래로 죽 이어진 나선 계단. 여기 탑이었구나.

"여기 어딘지 알아?"


"남쪽 첨탑이에요."


남쪽 첨탑에서 성문까지 가는 길에는 기사단의 숙소가 있다. 거기만 어떻게 지나가면 문제는 없겠군.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탑이 격하게 흔들렸다. 나는 균형을 잡았지만, 맥은 넘어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가 버렸다.

"맥. 괜찮아?"


"죽지는 않았어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첨탑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무장한 병사들의 발소리도. 귀를 기울여 대화 내용을 유추해본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나타났다!"

"성을 공격 중이다!  병력 집합."

다시 성이 흔들린다. 맥은 또 계단 아래로 굴러버렸다. 대단한 운동신경이군.


"으윽. 아파라. 그런데 아가씨. 왜 웃고 계세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왔거든."


마법사는 아직 살아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마법사니까 마법이라도 썼겠지. 역시 마법은 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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