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052. 3막 종장 - 오스왈츠 가문 / Isaac
저 산 너머에는 망할 자식들이 살고 있지. 절대 물러서지 않으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우리를 죽도록 괴롭히지. 정말 망할 자식들이야.
- 론다란트 남부 사령관의 오스왈츠 가문에 대한 평가 -
오스왈츠 성은 산 위에 홀로 서 있다. 노을빛을 받으며 붉게 변해가는 하얀 성벽은 가히 장관이라 부를 만하다. 산 주변에는 농지와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저 산은 오스왈츠 산이에요. 우리 가문이 저 산에서 시작했죠. 마을은 그냥 오스왈츠 마을이라 불려요."
잔뜩 흥분한 글린다가 오스왈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원래 오스왈츠 가문의 조상은 저 산에서 사냥꾼으로 살고 있었데요. 그러다 대전쟁이 일어났고, 가문의 시조인 데이비드가 민병대를 조직해서 이 땅을 지켜냈어요. 그 보답으로 테페리에서 오스왈츠라는 성과 백작위를 받았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대전쟁이 뭐에요?"
말을 타고 나아가던 글린다가 멈춰 선다.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정말 몰라요?"
"모르니까 물어보죠."
글린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마법사님은 어떻게 마법사가 되신 거에요? 어떻게 마법사란 사람이 대전쟁을 몰라요?"
게임을 열심히 하다 보니 마법사가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한 건데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글린다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다.
"대전쟁은 300년 전에 있었던 전쟁을 말해요."
300년? 오래도 된 전쟁이군.
"남쪽에서 마족들이 대규모로 침공해왔어요. 인간들은 모든 사력을 다해 반격했고요."
마족이라니. 또 처음 듣는 게 튀어나왔다. 이 세계엔 인간만 사는 게 아니었구나. 진짜 글을 배워서 역사서라도 읽어봐야겠다.
"대전쟁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앞서 가던 미하일이 우리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는지 당나귀의 속도를 늦춘다.
"대전쟁은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피와 시체로 가득 차 있었지요."
꼭 자기가 직접 겪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 봐야 자기도 이야기로 들은 걸 테지만.
"인간의 나라 열두 개가 대전쟁 때 몰락했습니다. 수많은 마법사와 기사들도 죽어갔지요."
원래 전쟁이란 그런 법이지.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약간 입맛이 쓰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아직도 그 상처가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대전쟁이라 부를만한 전쟁이었으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오스왈츠 마을에 들어왔다. 가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농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바라본다.
오스왈츠 성이 더 가까이 보인다. 높게 솟은 첨탑들. 쌓아올린 성벽의 모습이 나타난다.
"글린다 아가씨?"
"맥!"
반대쪽에서 말을 타고 오던 사람이 글린다를 알아본다. 앳돼 보이는 얼굴을 한 소년. 소년은 글린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살아계셨습니까?"
그 질문에는 기쁨보다는 당황이 더 강하다. 마치 죽은 유령을 보는 사람 같다.
"살아있으니까 돌아왔지. 아버님은 잘 계셔?"
"어···. 네···. 뭐···."
맥이라는 소년은 똑바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한다. 뭔가 상당히 찜찜하다.
"일단 난 아버님을 만나러 갈 건데. 너는?"
"오늘 일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소년은 글린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뭔가 켕기는 듯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는다. 찜찜한 건 싫은데.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맥은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나아간다. 글린다도 원가 이상하다는 듯이 맥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맥이라고 성에서 일하는 시종이에요. 나랑 나이가 비슷해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이던데."
"그러게요. 도대체 뭘까요."
지금은 알 수가 없지. 나와 글린다는 맥이 떠나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두 사람 다 정신 차리고 갈 길이나 깁시다."
미하일의 말에 다시 앞을 바라보고 고삐를 당긴다.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 이 산을 올라야 성에 들어갈 수 있어요."
"상당히 험한 산이군요."
"원래 오스왈츠 성은 전쟁에 대비한 요새에요. 그러다 보니 편리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죠."
오스왈츠 산은 경사가 급한 산이다. 마차가 다닐 수 있게 돌을 깔았지만, 경사는 어찌하지 못했나 보다. 좌우로 나 있는 나무들을 보며 산을 오른다.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엄청나게 뛰어다니고 그랬어요. 저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폭포도 있어요."
글린다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집에 가까워지니 기분이 좋은 거겠지. 글린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너무 힘들어서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하하. 아가씨께서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전 죽을 거 같고 말이죠."
허튼 말이 아니다. 진짜로 허리가 부서질 것 같다. 엉덩이는 쪼개질 것 같고 말이야. 호위병들과 글린다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도 익숙해지면 안 아프게 탈 수 있을까.
"보인다!"
글린다가 소리치며 손을 뻗는다. 손가락 끝에 오스왈츠 성의 하얀 성벽이 걸려있다. 오스왈츠 성은 깊은 절벽 건너에서 자신의 풍채를 자랑한다. 내려온 도개교만이 유일한 길.
"원래 대전쟁이 끝나고 요새로 지어진 거에요. 스할린 오스왈츠가 성을 설계했지요."
그런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도개교와 절벽이 맞닿는 부분에 병사 몇 명이 서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
병사들은 우리의 얼굴을 보자 들고 있던 창을 내민다. 공격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한 경계의 의미. 미하일이 멈춰 서서 당나귀에서 내린다.
"어디서 오는 누구인가."
미하일은 아무 말도 없이 뒤쪽에 있는 글린다를 가리킨다. 글린다는 어깨를 쫙 편다. 병사들은 글린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입을 벌린다.
"그···. 글린다 아가씨!"
"네. 바로 저에요."
글린다의 콧대라 하늘을 모르고 치솟는다. 글린다는 내가 이 정도랍니다 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칫. 재수 없어.
"얼른 백작님께 알려!"
"넷!"
병사 한 명이 도개교 건너편으로 달려간다. 병사들이 심히 당황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나마 침착한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다들 일제히 말과 당나귀에서 내린다. 나야 한 박자 늦게 움직였지만. 고삐를 잡고 도개교를 건넌다. 아래쪽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 물이 보인다. 높이는 백 미터 정도. 떨어지면 죽겠군.
도개교의 끝에는 거대한 나무문이 존재한다. 그 양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신호를 보내자 문이 끼긱거리며 열린다.
성벽 안쪽의 모습이 보인다. 잘 정돈된 길과 누군가의 손을 탄 정원. 높게 솟아오른 첨탑들. 머릿속으로만 그렸었던 성의 모습.
"말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어디선가 나타난 시종이 고삐를 움켜쥔다. 혼자서 일곱 마리의 동물을 통제하며 어딘가로 걸어간다. 그래 봐야 마구간이겠지만.
본채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성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 양옆에는 병사들이 서 있다. 우리가 다가가자 병사들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어준다.
"안쪽에서는 시종장이 안내해줄 겁니다."
문 너머에는 정장 비슷한 차림의 노인이 하나 서 있다. 노인은 우리를 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정확히 말하면 글린다를 향해서지만.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돌아왔어요. 슈리케."
글린다는 노인에게 웃으며 안긴다. 노인, 슈리케는 가만히 선 채로 글린다가 자신을 놓아주길 기다린다.
"백작님께서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글린다가 자신을 놓아주자 슈리케는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한다. 성안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거대한 연회장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같은 건 없다. 그냥 복도와 방이 죽 늘어져 있을 뿐. 벽에는 그림이나 무기들이 걸려있다.
"저 그림은 데이비드 오스왈츠의 초상화에요."
집에 돌아와 신이 난 글린다가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호위병들은 일일이 반응하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없다. 일단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러는 동안 슈리케가 걸음을 멈춘다. 그 앞에는 양쪽으로 열릴 수 있는 큰 문이 있다.
"안쪽이 식당입니다. 백작님이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슈리케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린다. 기다란 식탁이 보인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품은 벽난로가 보인다. 벽에 무장한 채 서 있는 기사들이 보인다. 식당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아 우리를 노려보는 중년 남성이 보인다. 아마 백작. 글린다의 아버지.
"백작 각하. 글린다 아가씨와 그 호위 병력입니다."
슈리케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인다. 글린다도 호위병들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인다. 나도 분위기를 맞추어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인다.
"왔느냐.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여기 이분들이 도와주셔서 별다른 문제 없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백작의 말에 글린다가 대답한다.
"고개를 들고 이리로 와 식사나 하자꾸나."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도 고개를 들어 올린다. 슈리케는 뒷걸음질로 식당을 나선다. 호위병들은 주변의 기사들에게 자신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맡긴다. 기사가 나에게도 손을 펼쳐 보인다.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린다.
기사의 안내를 받아 한 명씩 자리를 잡는다. 백작의 양옆에 나와 글린다. 그 옆으로 호위병들이 주르륵. 백작은 우리를 하나하나 바라본다.
"식사를 시작하지."
백작이 나이프를 들어 올림으로 식사가 시작된다. 앞에 놓은 음식들은 고기구이를 중심으로 놓여 있다. 글린다야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식기를 놀린다. 호위병들은 백작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히 식기를 움직인다. 일단 맛있어 보이니 나도 먹어 볼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 좀 소개를 받았으면 하는데."
그 말에 모든 식기의 움직임이 멈춘다. 이제 좀 먹으려고 했더니. 백작은 글린다를 바라본다. 글린다는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헝겊으로 입 주변을 닦는다.
"일단 제 앞에 계신 분은 마법사인 아이작입니다."
분위기에 맞추어 고개를 숙이자.
"다른 분들인 티파나에서 숙부님이 빌려주신 호위병이지요."
호위병들이 고개를 숙인다.
"그렇군. 다들 글린다를 위해 힘 써줘서 고맙네. 그래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뒤에 있던 기사들이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을 채워준다. 이게 병사야 시종이야. 유리잔에 붉은 와인이 가득히 담긴다.
글린다가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걱정하지 마. 설마 이거 한 잔으로 취하겠어?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럼 모두 글린다의 건강을 위해 건배."
백작의 건배사에 맞추어 잔을 들어 올린다. 와인이 목으로 넘어간다. 역시 술은 맛이 없어. 아. 취기 올라온다. 벌써 머리가 어지럽다.
주변 사람들을 본다. 하나둘씩 식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다. 헤헤헤. 다들 술이 약하구나. 그럼 나도 쓰러져도 되겠지. 무거운 머리를 식탁에 박는다. 우히히히.
"아···. 아버님?"
글린다도 식탁에 쓰러진다. 술이 센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뭔가 이상한데···. 몰라. 몰라. 우헤헤헤. 술을 마시니까 기분이 아주 좋다.
"미안하군. 글린다를 살아서 데려온 건 고맙지만, 이다음부터는 알려져서 안 되는 일일세."
"백작 각하!"
미하일이 백작에게 소리친다. 우헤. 귀족한테 소리치면 안 돼. 혼난단 말이야.
"시작하게."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반짝이는 칼을 들고 다가온다. 글린다를 제외한 호위병들을 하나씩 잡고 목을 그어버린다. 붉은 피가 식탁을 적신다. 아. 제기랄. 이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독이다. 마비독.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독 저항 반지가 효력을 내지 못할 정도의 맹독.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는다. 글린다의 눈동자가 보인다. 공포만이 가득히 담겨 있는 눈동자가.
미친 이렇게 죽는 거야? 이건 너무하잖아. 칼날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백작이 뭔가 말을 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기사들이 글린다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한다. 지금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네.
몸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게 두 번째 죽음. 첫 번째보다 아프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