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051. 3막 4장 - 오스왈츠 성으로 (4) / Isaac
에스나 덕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약간 긴장이 풀려버렸다고 할까.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진짜 특이하고 사람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에스나와 헤어진 지(헤어졌다는 표현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루가 지났다. 이제 오스왈츠 성까지는 하루 남았다. 오늘로 글린다와의 여행이 끝이 난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여기서 점심을 먹읍시다. 잘하면 저녁은 오스왈츠 성에서 해결할 수 있겠군요."
그것참 다행이네. 저녁때는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온다는 거군. 맛없는 군용 식량도 안녕이다. 물론 이번 점심은 먹고 안녕이지.
호위병들이 당나귀에서 내려 장작을 준비한다. 나와 글린다도 말에서 내려 몸을 푼다.
"마법사님. 불을 부탁하겠습니다."
왠지 편리한 라이터 정도로 생각되는 듯하다.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해주자. 미하일이 모아 놓은 장작에 불꽃을 던져 놓는다. 장작이 타오르며 열기를 내뿜는다.
"냄비에 물 좀 받아 오도록."
오닐은 미하일이 건네준 냄비를 들고 멀리 흐르고 있는 강으로 다가간다. 저게 큰뱀 강이구나. 용이 된 뱀 전설이 있다는. 에스나는 자기를 백룡 기사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승천한 뱀이랑 관련이 있을까? 또 만날 일이 생기면 물어봐야겠다.
"물 받아 왔어요."
모닥불 위에 냄비가 올라간다. 강한 화력으로 물이 금세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미하일은 전에도 보았던 가루를 끓는 물에 집어넣는다. 어디선가 등장한 나무 주걱으로 냄비를 젓기 시작한다
곧 좋아할 수 없는 냄새가 퍼져나간다. 고소한 것도 아니고 탄 냄새도 아닌 이상한 향. 그리고 이제 저걸 먹어야 하지.
"자. 다 됐습니다."
미하일이 그릇에 맛없는 수프를 옮겨 담는다. 일곱 명을 위한 일곱 개의 그릇. 호위병들은 아무 말 없이 수저를 움직이지만, 나와 글린다는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거라도 안 먹으면 다른 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저를 움직인다. 어차피 안 먹어도 되는데 그냥 굶을까. 글린다도 나와 마찬가지로 수저를 움직인다. 눈을 질끈 감고 수프를 목으로 넘긴다. 혀에 닿지 않고 꿀꺽 삼킨다.
"너무 맛없어요."
"하하하하. 말했듯이 군용 식량은 다 그런 맛입니다."
난 절대 군인은 안 해야겠다. 글린다는 맛없다고 말하면서도 수저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더 달라고 미하일에게 그릇을 내민다. 저런 걸 보면 인간의 식욕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
식사가 끝났다. 글린다는 다섯 그릇을 해치웠고, 나는 한 그릇도 다 못 먹었지. 그릇과 수저를 냄비에 집어넣는다. 미하일은 오손에게 냄비를 건네며 닦아오라 명령한다. 오손은 잠시 투덜거리면서도 냄비를 들고 강가로 이동한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올라있다.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 평화로움을 그림으로 그린듯하다.
"냄비 닦아 왔어요."
오손이 냄비를 미하일에게 건네준다. 미하일은 냄비를 당나귀의 짐 안에 집어넣는다.
"그럼 출발합시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움직이죠."
호위병들은 나귀에 올라탄다. 나와 글린다는 말에 올라타고. 미하일을 선두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지루한 이동의 시작.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뒤쪽에서 적의가 느껴진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적의 에스나와 비슷한 실력을 갖춘 것 같다. 어휴. 어쩔 수 없지.
"미하일 씨."
"예?"
"먼저 가시죠?"
앞서 가던 미하일이 멈춰 선다.
"무슨 일입니까?"
"뒤쪽에 추적자입니다."
"그런 걸 맡으라고 저희가 있는 겁니다."
웃기는 소리다. 당연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녀석은 호위병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나서는 수밖에.
미하일은 쉽게 물러설 표정이 아니다. 정말 황소고집이군.
"글린다 양!"
"저는 왜 불러요?"
"달려가세요."
글린다는 주변을 잠시 살펴보다 한숨을 쉰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눈치챈 것 같다.
"알겠어요. 대신 다음에 갚는 거에요?"
손을 내젓는다. 글린다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말에 박차를 가해 오스왈츠 성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아가씨!"
미하일이 멀어져 가는 글린다에게 소리친다. 그러고는 나를 노려본다.
"저를 노려봐서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여러분의 임무는 글린다 양의 경호죠. 얼른 쫓아가세요."
"마법사는 정말 비열하군요."
"원래 마법이란 건 되게 비열한 기술입니다."
칫. 미하일은 혀를 한 번 차고 글린다를 쫓아 당나귀를 몬다. 다른 호위병들도 미하일을 따라 당나귀를 몰고 간다.
이제 나만 남았다. 곧 다른 녀석이 올 태지만. 말에서 내려 땅에 두 발을 딛고 선다. 말 머리를 글린다가 달려간 방향으로 놓는다. 그대로 말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찬다. 말은 한 번 크게 울부짖고 그 방향으로 내달린다.
지금 오는 녀석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놈이 가지고 있는 힘이 명확히 느껴진다. 나라도 쉽게 이길 수 없을 거다. 준비가 더 필요하다.
"가져오기. 축복의 성수. 거부자의 물약. 몰락자의 분노."
손안에 코르크 마개로 막힌 유리병이 나타난다. 투명한색, 검은색, 빨간색의 물약. 마개를 따고 그대로 들이킨다. 세 개의 물약이 서로 섞여 이상한 맛으로 변한다.
"으엑. 맛없어."
뱉을 뻔했다. 어떻게 겨우 삼켰다. UMO에서처럼 안내창이 떠오르진 않는다. 그래도 물약이 적용되었다는 게 느껴진다. 힘이 넘치는 게 느껴지거든.
모습이 보인다. 하얀 갑옷을 입은 말과 그 위에 올라앉아 있는 하얀 갑옷의 기사. 에스나와 같은 차림. 저쪽도 백룡 기사인가?
기사가 천천히 멈춰서 말에서 내려온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창과 방패를 손에 들고 나를 노려본다.
"그대가 아이작인가?"
"그런데?"
"글린다는 어디 있지?"
"별로 알려주고 싶진 않은데?"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어낸다. 기시도 방패를 앞세우고 자세를 잡는다.
"나는 백룡 기사 이스길. 그대의 이름은?"
"아까 네가 말했잖아!"
"아. 그랬었군. 이름이 아이작 맞나?"
"그 대답도 아까 했어!"
"그랬었나. 미안하군. 잘 기억이 나지 않네."
백룡 기사라는 녀석들은 정말 사람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다. 따로 훈련이라도 받는 건가.
"날 보내줄 생각은 없는 건가?"
"보내줄 거였으면 가로막지도 않았지."
이스길은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투구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도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에스나도 위험했는데 이놈은 더 위험하다. 진짜 까딱 잘못하면 죽겠군.
"비켜주지 않는다면, 힘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사용하시던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스길이 달려들었다. 창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몸을 뒤로 젖혀 피해낸다. 그대로 비어있는 몸통에 화염구를 던진다.
폭발에 몸을 맡기어 뒤로 크게 물러선다. 먼지가 가라앉고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는 이스길의 모습이 보인다. 에스나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갑옷이라면 화염구 정도로는 깨트리기 힘들 거다.
"에스나에게 들었던 것처럼 강력한 마법사로군."
"내가 좀 하는 편이지."
이스길은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천천히 다가온다. 이스길이 입고 있는 갑옷은 일반적인 마법으로 뚫을 수 없다. 물약으로 마법을 강화해도 어려울 거다. 이스길을 제압하려면 초월 마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초월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이 싸움은 시간 싸움이다. 내가 초월 마법을 쓸 시간을 만들거나, 만들지 못하거나.
"이제 나도 전력으로 간다."
이스길이 창을 바닥에 내리꽂는다. 에스나가 했던 것과 같은 자세. 어차피 마법으로 못 뚫는다. 상대가 준비하면 나도 준비를 해줘야지.
"백룡이여. 당신의 종을 주목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힘을 내리소서."
이스길의 기도문을 들으며 초월 마법을 준비한다. 한 번에 끝내버린다. 시간을 끄는 건 취미가 아니거든.
기도가 끝나고 이스길의 갑옷이 하얀빛을 내뿜는다. 이스길은 침착하게 한 걸음씨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초월 마법의 준비가 끝났다.
"뢰신의 창."
뇌신의 창이 아니다. 뢰신의 창이다. 뭐가 다른 건지는 묻지 말자. 국립국어원은 뇌신의 창이 맞겠다고 하겠지.
벼락이 떨어진다. 뢰신의 창이 떨어져 이스길을 맞춘다. 벼락에 맞은 이스길이 그 자리에서 비틀거린다. 갑옷에는 그을음 하나 남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봐야겠군.
"이게 끝입니까?"
설마. 그러면 초월 마법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이스길이 나에게 한 걸음 내딛자 다시 벼락이 떨어진다. 이전 것보다 강한 번개. 이스길이 창대를 바닥에 박아서 버티고 선다. 갑옷 틈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스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번개가 내려친다. 더 강한 벼락이 떨어진다. 이스길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지금까지 내리쳤던 번개 중 가장 강한 번개가 내리꽂힌다. 이스길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쓰러진다. 그런데도 갑옷에는 상처 하나 없다.
"커헉. 컥."
아직 숨이 붙어 있다니 놀랍군. 하지만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번개가 내리친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몇 번의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하얀 갑옷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생명의 불꽃은 없다. 이스길은 죽었고, 갑옷만이 남았다.
"결국, 흠집도 하나 못 냈군."
갑옷을 발로 차 본다. 열기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도대체 뭐로 만든 거냐. 갑옷의 빛이 점차 강해진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강한 빛에 팔을 올려 눈을 가린다. 빛이 사라져 간다. 팔을 내려 주변을 둘러본다. 갑옷이 사라져 있다. 이스길의 시체와 함께.
백룡 기사라. 생각보다 위험한 존재들인 것 같다. 이놈들은 주의해야 한다.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니.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공간 이동. 목표 지점. 글린다."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으악!"
내 앞에서 달려오던 말이 멈춰 선다. 그 위에 타고 있던 글린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솔직히 엄청 놀랐다. 공간 이동을 하자마자 말에 치일 뻔했다.
"마법사님!"
뒤에서 미하일이 당나귀에서 내려와 나에게 달려온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 잘 처리하고 돌아온 겁니다."
뒤쪽을 보니 내가 타고 다니던 말의 모습도 보인다. 나를 바라보는 호위병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에 올라탄다.
"갑시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더군요."
미하일은 한숨을 쉬고 다시 자신의 당나귀에 올라탄다.
"출발합시다. 오스왈츠 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으아아! 이제 집이다!"
글린다가 기지개를 켜며 말에 박차를 가한다. 호위병들도 나도 멀리 달려나가는 글린다를 쫓아간다. 진짜 이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 빨리 쉬고 싶다. 성에 들어가면 욕탕 정도는 있겠지? 침대도 있을 테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침대에서 뒹굴자. 그래. 그러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