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050. 3막 4장 - 오스왈츠 성으로 (3) / Isaac
"아 좀! 살살 합시다!"
에스나가 휘두른 검에 굴의 벽이 파여나간다. 사람의 근력으로 저런 게 가능한 거였어? 다시 휘둘러지는 에스나의 검을 머리를 숙여 피한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굴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이러다가 무너지는 거 아닌지 몰라.
이상한 주문과 함께 엄청난 양의 마나를 받은 에스나. 보이는 바와 같이 근력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다행히 속도까지 빨라지지는 않았다. 빨라졌으면 다섯 번은 죽었겠다.
"글린다가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시면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칼 휘두르면서 그런 말 하지 마!"
다리를 노리며 날아드는 검을 뛰어올라 피해낸다. 바닥에 금이 갈라지며 깨진다. 진짜 놀라운 힘이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린다.
에스나가 곧바로 달려든다. 마법을 쓸 틈을 주지 않네. 좀 여유가 생겨야 제압을 하든 말든 하지.
또 벽이 부서진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겨져 나간다. 날카롭게 쪼개진 파편들이 날아와 부딪힌다.
"좀 맞아주시죠!"
"바랄 걸 바라시지!"
우리 둘 싸우고 있는 거 맞지? 만담하고 있는 거 아니지? 그런 고민은 에스나가 휘두르는 검에 깨어진다. 검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조금만 넋 놓으면 한대 얻어맞겠군.
검이 계속 휘둘러지고, 나는 열심히 피해낸다. 가끔 굴 일부를 부시기도 하면서 그리 즐겁지 않은 춤이 진행된다. 머리, 어깨, 허리, 다리. 전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격. 그걸 전부 피해내는 나.
"제발 좀 죽어주세요!"
"너 말이 점점 심해진다?"
목을 노리고 검이 휘둘러진다. 땅바닥에 몸을 굴려 어찌어찌 피했다.
"피하지 좀 마세요!"
"안 피하면 죽거든!"
복부를 노리는 강한 찌르기. 뒤로 크게 뛰어 물러난다.
"제발 한 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다리를 노리는 하단베기. 큰 공격이라 틈이 생겼다. 하늘 걸음으로 날아올라 에스나의 뒤로 넘어간다.
"마법은 쓰지 마세요!"
"넌 검이나 휘두르지 마세요!"
머리를 향한 찌르기를 목을 움직여서 피해낸다. 이제 보니 에스나는 속도뿐만 아니라 명중률도 떨어진다.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기사가 된 거지?
"기사한테 검을 쓰지 말라고 하다니! 제정신이신가요!"
"마법사한테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하는 너의 정신은 어떠신가요!"
갑자기 에스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허리를 베고 들어오는 검을 피하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튕겨 나가 벽에 부딪힌다.
"....."
검에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며 몸을 일으킨다. 에스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안 죽으십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진짜 아프다.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힘이 쭉 빠진다.
"분명 검에 닿았는데······."
에스나가 검으로 땅을 내려치자 땅이 갈라진다. 아무리 봐도 어마무시한 힘이로군.
"입고 있으신 그 이상한 옷. 마법이 담겨 있는 겁니까?"
이상한 옷이라니. 그냥 평범한 코트잖아. 이 세계에는 없는 옷인가.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그래. 마법 물품이다. 어쩔래?"
"그건 좀 곤란하군요. 가지고 있는 장비 중에 마법을 깨트릴 물건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글린다 양이 어디 갔는지 말씀해주세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말 유감스러운 인간이다.
"말씀 못 해주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렇군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에스나는 허리를 숙여 나에게 인사한다. 그대로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엥?
"그냥 가는 거야?"
걸어가던 에스나가 멈춰서 돌아본다.
"네. 글린다가 어디 있는지 안 알려주신다면서요."
"그렇다고 그냥 가?"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나.
"어차피 당신과 싸운다고 제가 이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아니.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더 붙잡으시지 않을 거면 전 돌아가겠습니다."
"어. 그래. 잘 가라."
"다음에 만났을 때는 글린다를 건네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럼 안녕히 계시길."
에스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걸음을 옮긴다. 예의가 바른 녀석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메아리쳐 울리는 발소리만을 남기고 에스나의 모습은 사라진다. 일단 끝난 거겠지?
상당히 어이없는 마무리다. 깔끔하지 못하다. 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 글린다와 일행들에게 돌아가자.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에스나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마법사님!"
5분 정도 걸어가자 창과 활을 들고 전방을 경계 중이던 호위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는 글린다의 모습도. 아무리 한밤중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잘 처리된 겁니까?"
미하일이 약간 긴장을 한 채 질문해 온다.
"다 처리했지요."
처리한 거 맞겠지? 일단 당장 적은 없는 거니까."
내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을 한 것인지 한숨을 몰아쉰다.
"아가씨도 주무시고 계시니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호위병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는다. 짐에서 담요를 꺼내 나에게 건네준다. 자신들도 하나씩 챙기고 자리에 하나둘씩 눕는다. 불침번은 오손이다.
불침번은 한 시간 정도의 단위로 교대되었다. 미하일을 지나 다시 오손이 차례가 되었을 때 다른 호위병들이 모두 일어났다.
"마법사님. 아가씨.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나야 한숨도 잔 적 없다. 그저 눈을 감고 누워서 자는 척을 하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미하일이 나를 불렀을 때 바로 일어날 수 있었지. 글린다는 몸을 일으켰지만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아직 잠이 덜 깼다.
"어제 비 때문에 이동이 지체되었으니 아침 식사는 이동하면서 하겠습니다."
굴 밖으로 나가자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온다. 아직 구름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태양의 모습은 확실하게 보인다.
말과 나귀들은 얌전히 묶여 있는 상태. 내가 추적자였다면 기동성을 제거하기 위해 말과 나귀들을 죽였을 거다. 에스나는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가.
"안장의 물기만 닦아내고 출발합시다."
천을 하나 꺼내 밤새 내린 비로 젖어 버린 안장을 빠르게 닦아낸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말에 올라타시죠."
일행 전원 타고 왔던 말과 당나귀에 올라탄다. 약간 축축하긴 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
"이게 아침입니다."
미하일이 뭔갈 던져준다. 천에 쌓여 있는 건빵 비슷한 무언가. 이게 아침 식사인가. 글린다도 나와 같은 걸 받고 한숨을 쉰다. 맛이 있어 보이진 않네.
"출발하겠습니다."
발굽이 땅을 박차고 움직인다. 갈대밭의 땅은 어제보다 더 상태가 나빠졌다. 말의 다리가 깊게 땅에 박힌다. 여길 벗어나기 전까지는 제 속도를 못 내겠네.
미하일이 준 건빵을 입에 넣고 씹는다. 딱딱하고 맛이 없다. 이런 건조식품이 맛있기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호위병들은 불만 없는 표정으로 건빵을 먹는다. 글린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움직인다.
"맛없어."
"하하하. 원래 군용 식량은 맛있는 게 없는 법입니다."
글린다의 투정에 미하일이 웃으며 대답해준다. 글린다는 한숨을 쉬면서 건빵을 계속 먹는다.
"이곳은 땅이 좀 괜찮군요. 달리도록 합시다."
갈대밭을 빠져나와 흙으로 포장된 도로에 들어선다. 도로의 땅도 흠뻑 젖어있지만, 갈대밭의 땅보다는 단단하다.
말과 당나귀가 달리기 시작한다.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이제야 오십니까?"
아. 제기랄. 멈춰선 미하일 앞에 말을 탄 에스나의 모습이 보인다. 타고 있는 말도 하얀 갑옷으로 중무장한 상태.
"너 돌아간 거 아니였냐?"
미하일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에스나와 대화를 이어간다.
"돌아갔다가 대장한테 혼났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왔다고 말이죠."
에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게 다 당신 때문입니다!"
"왜 나 때문인데!"
에스나가 나를 향해 삿대질한다. 말투도 그렇고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놀라운 재주다. 그나저나 왜 반지가 반응을 안 하는 거지?
"당신이 가진 마법 물품 때문에 임무가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준비를 안 해온 사람이 잘못이지!"
저 인간이랑은 말이 안 통해요! 일단 좀 진정하자. 흥분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마법사님."
글린다가 어깨를 톡톡 친다.
"아는 사람이에요?"
"일단은요. 별로 알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알게 됐네요."
"소개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건가.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글린다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인데. 소개해줘도 되는 건가?
에스나는 말에 올라탄 채로 팔짱을 끼고 있다. 검과 방패는 등 뒤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고. 당장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거라 생각된다.
"저쪽은 에스나입니다, 백룡 기사 중 하나라더군요."
에스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내 옆의 글린다도 고개를 숙인다. 표정을 보아하니 얼떨결에 인사했군.
"당신이 글린다 맞죠?"
"네. 제가 글린다 알폰소 오스왈츠 입니다."
글린다가 에스나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옆에 있는 분들은?"
"티파나에서 빌려온 호위병입니다."
"그렇군요."
에스나와 우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에스나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지만, 그 무장 상태만으로도 위협적이다. 호위병들이 언제든 무기에 손을 뻗을 준비를 한다.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무슨 오해?"
"전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뭐?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왜 온 거지?
"그냥 글린다의 얼굴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
"그게 끝?"
"네. 그게 끝입니다. 얼굴을 봤으니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스나는 말을 몰아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에스나는 우리 사이를 지나쳐 유유히 멀어져 간다.
"에스나!"
"네? 왜 부르십니까?"
에스나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린다.
"너 혼났다고 하지 않았어?"
"예. 호되게 깨졌지요."
"그런데 그냥 가?"
"일단 임무를 받은 게 없으니까요."
"여기 글린다가 있는데?"
"제 눈에도 보입니다."
"안 잡아가?"
"제가 왜요?"
뭐지. 왜 대화가 안 통하는 느낌이지. 에스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투다.
"잡아가는 게 임무 아니었어?"
"어제 왔을 때는 그런 임무였죠."
"지금은?"
"지금은 그냥 제 목표였던 글린다의 얼굴을 보러 온 겁니다. 대장한테 혼나고 다른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 잡아간다고?"
"네."
에스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만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지? 주변을 보자 호위병들도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글린다도 입을 벌리고 멍하니 에스나를 바라본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이만."
에스나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다른 사람들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인다. 어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